평일의 요정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옅은 담배 내 나는 내 행운의 자리를 찾아

의자 위에 자켓을 올려 두고 책상 위 둥근 전원을 누르면,

그 버튼을 살짝 누르면,

냉각팬은 시시식 거리며 나를 반기고,

명량한 스피커는 타다! - 쇳소리로 나를

20층 아파트 옥상에서부터 지하까지

외줄에 묶여 흔들리던 내 하루를,

위로하는 그 기계음

타다

! 이 순간만큼은 행복해.

 

채널 19에 살고 있는

나의 요정 그녀는 나의 평일의 요정

그녀는 오늘도 내게 미소 짓지.

그녀는 오늘도 내 이름을 부르지. 적립금이 있는 한, 별풍선이 충전되어 있는 한,

그녀는 내 이름을 불러주며 춤추네.

 

정해진 선불의 시간이 모니터에서 삼십분

삼십분 남았다고 지껄이면

뒤져보자.

주머니 속에 꾸깃꾸깃 오천 원. 아쉽지만

담배는 피워야해 아쉽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여기까지.

 

삐걱거리는 철문,

붉은 녹물이 눈물모양처럼 박힌 문을 조용히 열고선

컵라면 국물 자국이 담배빵처럼 노랗게 번진 이불에 쏙 들어가

잠들기 전,

두 손을 비비며 생각의 나래를 펼쳐본다.

그녀는 어떤 향기가 날까

어쩌면 헤드앤숄더’. 첫사랑 그녀가 쓰던 샴푸. 그래,

그녀도 그 쿨한 향이 날거야.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냄새가 날 거야.

 

 

회색의 바다 깊숙이 들어가듯 의식이 잠들 때, 그녀는 다시 나타나네

 

네모난 상자에서

살며시 다가와 내게 미소 지으며

은빛의 환상 심어주는 그녀는 나의 요정

그녀만 있으면 난 외롭지 않아

그녀만 보면 난 외롭지 않아

 

 

<샴푸의 요정, 빛과 소금,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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