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 여자 간호사가 가느다란 양 팔로 네모난 차트를 안고서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잠에서 깬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작고 밝은 미소를 내게 내보였다. 방에 들어와 팔에 꼽힌 바늘의 위치와 남은 수액의 양을 빠르게 확인한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의 매력적인 눈인사를 하면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간호사 패트리시아는 복수를 꿈꾸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유혹하여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간 의사 볼코프를 같은 방식으로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하고 있으나, 결과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의사는 그녀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복수심을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면서 그 의도적인 접근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요란한 발소리를 내면서 연구소의 총 책임자인 바딤과 의사 볼코프가 같이 병실에 들어왔다. 바딤이 오자마자 내가 누워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와서는 내 손을 잡고 막무가내로 흔들어 댔다.

수고 많았소, 세르게이 동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동무의 도전 덕분에 이번 실험이 성공했소! 드디어 학계에서 소문으로만 돌던 새로운 힘의 입자, (B)를 찾아낸 것이지. 이것은 우리 우수한 소비에트 인민들이 모여 이룬 위대한 업적이자 우리 위대한 지도부의 핵심인 최고 수석 동지의 축복에 힘입은 바요.”

그가 하도 내 팔을 높이 위아래로 쳐들어서인지 주사바늘과 연결되어 있는 튜브로 역류한 피가 붉게 배어 나왔다. 그것을 본 의사가 잠깐 내 상태를 살펴보겠다는 몸짓으로 바딤의 앞을 막아서서 튜브를 보는 척 하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게 찡긋거렸다.

이후 무엇인가 소곤거리면서 논의하던 두 사람은 조만간 완쾌된 모습으로 보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병실을 떠났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바딤, 연구소장 바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새벽의 실험은 실패했고, 코어 내부에 있던 블루 사파이어는 부서져 조각조각으로 갈렸다. 사실, 오늘의 무모한 가동은 그가 계획한 일이다. 그는 정비반장 이외에 또 다른 희생자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는 나. 내가 골칫거리였다. 오늘 새벽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나를 감시카메라로 몰래 확인한 그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가동스위치를 작동했다. 계획대로라면 상부의 허가 없이 실시한 나의 독단적이고 멍청한 행동으로 인해 오늘 새벽에 나는 사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동안 반복적인 가동으로 부족해진 전력량과 내부에 우연히 떨어진 작은 금속 조각으로 인해 사파이어만 박살나고 나는 살아남았다. 정비반장이 나를 구하는 장면을 감시카메라로 확인한 그는 급히 실험 결과를 조작하고 나를 공범으로 엮기 위해 거짓으로 보고서를 올려두었다. 그러나 비밀 정보요원 드미트리’ - 이곳에서 몰래 연구원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는 그에 의해 오늘의 이 사기극은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상부로 보고서가 올라가면 연구소장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거기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의사 볼코프’. 우수한 두뇌와 천부적인 사교성으로 당 고위간부의 주치의가 되어 일찍부터 명성을 쌓았다. 수많은 고위직들이 숙청당한 살육의 해()에도 그는 자신이 가진 의술과 넓은 인맥을 기반으로 살아남았고, 이후에는 항상 최고 권력의 왼쪽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단 한 번의 실수 술에 만취한 채 최고위원 딸의 추문에 대해 떠들어댄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한직인 이곳의 의무실로 쫓겨났다. 반복적이고 변화 없는 일상에 무료해진 그는 환자와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반인륜적인 범죄들을 여럿 저질렀으나 그 누구도 그의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에서 건강을 유지한 채 오래오래 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병실을 방문한 사람은 정비반장 이고르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고개만 빠끔히 들이민 그가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병실로 성큼 들어와서는, 내게 짧은 목례를 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오. 그리고……, 새벽일은 정말 유감이오.”

나는 내 옆에 앉은 그의 손을 세게 잡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를 꺼내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제야 그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누구든 그 상황에서는 나와 같이 했을 것이라면서 무안한 듯 왼손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나는 알고 있는 사실 바딤의 더러운 음모와 나의 역할에 대해서 아무런 거짓 없이 모든 내용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조용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대충 예상은 했었다면서 그런 작자 밑에서 일하려면 무척 힘들었겠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미래를 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아무것도, 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나타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 그가 당황해 하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어쩐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당신, 젊은 박사, 당신도 그곳에 갔었구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한 번 더 쳐다본 후에 그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았다.

내 젊었을 때, 그래 나도 당연히 당신처럼 젊은 시절이 있었지. 눈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한 손에 반쯤 남은 보드카를 쥐고 휘청거리면서 집에 가고 있었어. 갑자기 눈앞이 번쩍 하더니만 도로 한가운데서 정신을 잃고 말았네. 눈을 떴더니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완전히 검은 방에 있더라고,”

그가 과거의 일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천장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거기서 신을 만났네. 그가 내게 선물을 줬지.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 살면서 몇 변의 고비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말이야 목소리가 항상 나를 지켜줬어.”

물론, 좋은 쪽만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보기 싫은 것, 알고 싶지 않은 것들도 알게 되더라고. 자네에게만 하는 말인데....... 나는 가족이 없네. 친한 친구도 없어. 그들의 내밀한 비밀을 알게 된 후로는 그들 속에서 살 수가 없었어.”

아직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슬픔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버틴 보람은 있었나보오. 이렇게.......” 그가 나머지 손을 내 손 위에 포개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내 사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말이야.”

 

그의 코에서 불순물이 조금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내 옆에 쓸모없이 있는 붕대를 그에게 쥐어주었다. 힘차게 코를 팽 하고 푼 그가 이제 그만 가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가기 전에 내 얼굴을 잠시 보더니만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앗 하면서 소리를 짧게 질렀다.

, 그리고 좀 미안하게 됐소. 거 젊은 박사양반 얼굴에 난 멍 말이요. 충돌 감지기에서 몸을 빼내다가, 내가 힘을 너무 줬었나 봐, 문에 꽝하고 부딪혀서 생긴 상처요. 미안하오.”

내가 소리 내어 웃자 그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하고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냐는 표정으로.

사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곳에서 알게 된 진실을 그에게 모두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수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그에게 진실은 너무 가혹했다. 그가 말한 그것은 신도 아니고, 우리에게 새로 생긴 그 능력은 선물도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밤새도록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고급 보드카를 여러 병 준비하겠노라고, 그가 크게 웃으면서 문을 닫고 병실을 떠났다.

 

이고르가 떠난 뒤,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이번에는 온전한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내 몸의 왼쪽은 눈부시게 하얀 빛이, 나머지 오른 쪽은 칠흑의 암흑으로 덮여 있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보았지만 변화는 없었다. 한 쪽 방향으로도 뛰어 보았지만 절반으로 잘린 내 몸은 여전히 양쪽의 세상에서 절반씩만 존재했다. 도움을 청하려 소리를 질렀지만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삼켜버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누군가가 나를 보는 느낌을 받았다. 한 명이, 두 명으로, 그 수가 점차 늘어나더니 이윽고 수백에서 수천으로 눈들이 늘어났다. 나는 그 시선의 무게에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두 발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릴 적 밤이면 지붕위에 올라가 반짝이는 별들과 구름처럼 하늘을 가로지른 은하수를 보면서 미래의 꿈을 키웠다. 언젠가, 내 삶이 끝나기 전에 언젠가는(someday in my life) 반짝이는 저 별들 사이를 여행하며 이 세상의 비밀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의 진정한 비밀을 꼭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 그 진실에 다다른 지금, 나는 후회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진실은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었을 때 내가 만난 그것은 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 한조각의 감정도 없는 감시자였다 - 실체가 없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확인하는 자들. 수천조개의 은하수와 그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 무한히 많은 별들도, 작게는 여기 내가 누워 있는 공간도, 그리고 그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이 몸뚱이 또한 모두 실체가 없는 허상이었다. 우리는 하나의 숫자이고, 세상은 수치가 복잡하게 엮인 수학적 함수일 뿐이었으며, (이고르가 말한) 신은 단지 우리를 감시하는 관찰자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이 세계의 관찰을 위해 나와 이고르를 선택하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감정을 가져갔다. 우리 둘은 그들의 도구에 불과했다 - 자신들이 만든 세상을 그 세상의 존재가 가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도구(tool).

 

수십만의 관찰자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한 명씩, 하나씩 헤집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과거의 일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내 삶도 항상 그들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나는 의지는 있지만 한 톨의 비밀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를 지켜보는 눈빛이 수십만에서 수억으로 늘어나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내 입이 조금씩 열리면서 의도하지 않은 말이 어느새 내 입으로 튀어 나왔다.

젠장, 내 인생 최악의 하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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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한참을 둘이서 원치 않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터널을 지나가자 드디어 거대한 크기의 충돌 감지기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고르가 감지기 앞에 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입구를 감싸고 있는 코일을 쓱 손으로 쓸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거 감는다고 반년이나 잠을 제대로 못 잤었지. 그래도 다 해 놓으니 보람은 있어. 저 모습을 보시오, 동무. 마치 수천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아 거대한 똬리를 튼 것처럼 아름답지 않소?”

그의 말처럼 충돌 감지기는 거대한 크기뿐만 아니라 그 형체도 기괴했다. 마치 수천의 작은 바람들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고 그것을 중앙의 원으로 일제히 몰아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중앙으로 빨아들이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한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로 좁혀서 세부적인 구조를 자세히 보면, 그렇게 큰 구조물이 사실은 아주 작고 반짝이는 수천 개의 코일을 일일이 꼬아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눈으로 그 광경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코어를 감싸고 있는 중앙 돔에 다다르자, 이고르가 먼저 입구에 놓인 간이 사다리를 타고 중심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래에서 보조하면서 그가 이르는 대로 공구 통에 있는 장비들을 하나씩 올려 주었다. 혼자서 끙끙거리며 사람 어께너비의 코어 입구 문에 머리를 들이민 그가 한참 후에서야 이제 다 됐다라면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잘 알고 있겠지만.” 공구를 든 오른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자 그의 코에 검댕이 묻어나왔다.

실험이 끝난 다음엔 꼭 중앙 크리스털을 손 봐야 합니다. 충돌인지 뭔지로 매번 위치가 조금 틀어지니까.”

그리고, 말이오, 동무그가 일부러 표정을 험하게 일그러뜨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크리스털 위치는 말이요. 어제 실험 이전에는 원래 있어야 할 장소에 한 치 오차도 없이 있었단 말이오, 실험 전에는! 절대 그것 때문에 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정비반장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보는 사람은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는 어떠한 학위도, 아무런 연줄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자신을 대신해 벌을 받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부로 그의 화려한 경력도 이제 내리막 길만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그가 작업한 것을 내가 확인할 일은 남아 있었다. 고위부에서는 그가 작업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려며 나를 딸려 보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를 쫓아내기 위한 증거품의 하나로서 나를 여기에 끼워 놓았다. 오늘 여기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최종 보고서는 모두 그의 잘못 때문으로 기록될 것이다. <애초에 정비 반장이 설계대로 시공을 하지 못한 탓에 실험이 실패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다>라고. 아무런 죄가 없는 그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시나리오는 이미 짜여 승인까지 완료되었고 지금으로서는 우리 둘 모두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다, 정말 안타깝지만.

그런 생각으로 바닥을 향해 한숨을 쉬었더니, 그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이크로미터를 내게 주면서 기운 내라는 듯 내 어께를 가볍게 툭 쳤다.

살다보면 말이요.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일로 골머리를 썩을 때도 있는 거요. 그렇지만, , 그런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

 

희미한 미소를 띠고선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를 아래에 두고 나는, 사다리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돔의 열린 뚜껑을 한 쪽으로 밀고서 어께와 머리를 코어 입구 쪽에 넣었다. 멀리 중앙 쪽에 크리스털, 즉 커다란 블루 사파이어가 네 개의 금속 다리를 지렛대 삼아 공중에 떠 있었다. 마이크로미터를 금속 사이에 집어넣고 사파이어와의 간격을 차례대로 측정하기 시작했다. 세 개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금속 대에 손을 뻗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천정에 달린 경고등이 붉게 번쩍였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입자 가속기를 한 번 돌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어제 밤의 가동실험에만 3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의 전력을 모두 쏟아 부어야 했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가 끊긴 도시 시민들의 항의로 사내 전화가 모두 불통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일정에도 없는 실험을, 일 주일도 아니고 몇 시간 만에 다시 한다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 논리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없다는 듯 천정의 경고등은 붉게 번쩍이며 요란한 경고의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 ‘좀 있으면 굉장한 양의 에너지가 네가 있는 곳으로 들이 닥칠 거야. 얼른 빠져 나와.’라고.

코어에서 몸을 빼려고 하는데 마음만 급하지 몸이, 어께가 잘 빠지지 않았다. 침착하자고, 이건 경고등의 오류일거라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주문을 외우듯 외치면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과는 반대로 코어가 있는 돔의 온도는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내뱉은 숨이 수증기가 되어 벽에 달라붙고 있었고 철제 빔을 잡은 왼손은 얼어붙을 듯 차가워져 갔다. 가동은, 시스템의 가동은 지금 시작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허둥대다가 마이크로미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꺼내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둔 다면 저 작은 금속 때문에 코어 자체가 녹아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반쯤 빼낸 어께를 다시 코어에 밀어 넣고 손으로 마이크로미터를 잡았다. 이제 됐다고 생각한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것은 순수한 백색의 세상이었다. 눈 안에 있는 비문조차 보이지 않는, 티끌 한 점 없는 순수한 색. 아마도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리라.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리를 움직여 걸어보려 아래를 봤더니 내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점이 보였다. 완벽한 백색의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먼지가 들러붙었다. 기분이 나빠져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는데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저 순수한 백색과 바닥의 검은 점 하나만 있을 뿐.  

뭔가 잘못되어 있다, 모순되어 있다. 여기가 꿈 속 세상이 아니라면 내 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내가 보고 있는 이 백색의 세상은 내 눈을 통해 보는 것인가? 생각의 끈을 하나 풀기 시작하자 연쇄작용처럼 수많은 의문들이 동시에 머릿속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에 공명하듯 내 아래에 있던 검은 점이 점점 커지더니 둥근 원이 되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내 몸(그것이 존재한다면)을 빨아들였다.

 

암흑.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까만색으로도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칠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지만 여기에는 (백색의 세상에는 없던) 누군가가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소리도 없이 지켜보더니 갑자기 내가 살아온 날들을 억지로 되짚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수 밀리세컨드 단위의 시간으로 내 삶의 행적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까발려지는 것은 그 어떠한 육체적 고문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이 일이 꿈이기를, 어서 빨래 악몽에서 깨어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그 누군가를 향해 부탁했으나 일은 중단되지 않았다결국 나는 나의 과거를 전부 확인하고 나서 그 이전에 내가 어떠한 존재였는지 까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과거 유독한 바다에 사는 꼬리달린 작은 생명체였고, 소행성의 일부가 되어 영겁의 시간을 별들 사이를 여행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푸른 별의 재료이었고, 훨씬 이전의 시간에서는 눈이 부시도록 밝은 한 점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며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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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눈을 떠 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살펴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천정에 달려있는 형광등 불빛의 자극 때문인지, 하얀색으로 칠해진 벽과 그 사이로 검은 아지랑이 같은 형체가 벽 주위를 따라 울렁거리는 것만 보였다. 속이 메스꺼워져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손을 들어 눈 주위의 눈곱을 좀 떼어내고 다시 주변을 확인했다. 멍이 들어 검어진 눈꺼풀을 간신히 반절쯤 올려 뜬 눈으로 보기에도 내가 누워있는 방 이 병실은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갈라진 틈을 가리기 위해 회반죽으로 덧칠된 벽에서 떨어져 나온 흰색 페인트가 더러운 바닥에 조각으로 갈려 쌓여 있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천장에 달아둔 형광등은 청색이 너무 많이 섞여서 내 팔에 꼽힌 플라스틱 튜브마저 파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최첨단 연구를 진행하는 장소라고 해도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회사는 보이지 않는 곳, 특히 의무실 그들이 낙오자의 쉼터라고 부르는 장소 같은 곳에는 영 투자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몸이 좀 좋지 않다고 해서 이곳을 자진해서 찾는, 정신 나간 사람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다 - 그들은 모든 곳에서 지켜보고 모두에게 점수를 부여하니까. 어쨌든 아마도, 이곳도 직원 복지를 위한 병원 같은 시설에 투자하는 것은 뒷전이거나 혹은 그 비용을 누군가가 자신의 뒷주머니로 쓸어 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뒤통수가 가려워 손으로 긁었더니 오른쪽 뒷머리 머리카락 일부가 빠진 것처럼 그 부분에서 맨 살이 만져졌다. 고개를 배계에 내려놓으면서 숨을 길게 내쉰 후 잠시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냥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사고가 있었나보다.

 

충돌 감지기의 정렬 상태를 검사하라는 관리자 바딤의 명령을 받고 수리 엔지니어와 함께 새벽 일찍부터 지하에 있는 입자 가속기까지 갔다. 어제 밤늦게 실시한 실험 결과가 신통치 않자 우리의 위대한 영웅이자 이 실험의 책임자인 바딤은 결국 실패의 원인을 정비 불량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다. 한 참 자고 있을 시간에 불려나온 일급 정비사 이고르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날을 세웠다.

새벽부터 깨워서 누가 큰 사고를 쳤나보다고 생각했는데, 뭘 더 확인을 하자는 거요?” 관리자 바딤의 명령이라고 짧게 답을 했더니 그가 입을 앞으로 삐죽거리면서 바닥으로 침을 뱉고는 허공을 향해 거하게 욕을 쏘아붙였다.

그 책임자 동지가 시킨 일이라고? 젠장.” 한참을 욕과 반말을 섞어 자신의 불만을 뱉어냈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땅이 꺼질 것처럼 길게 한숨을 쉬고선 내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정비는 확실합니다. 그건 내가 보증합니다, 동지.”

만일 우리 반이 일을 그르쳤다면, 내가 성을 갈리다.” 생각할수록 분한 듯 그가 오른 손에 움켜쥔 공구 통을 공중으로 위협적으로 휘휘 저었다. 그에 맞춰 상자 안에 있던 망치 같은 단단한 공구가 상자 벽에 부딪기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울림소리가 긴 튜브 같은 터널 내에 반향을 일으키며 길게 꼬리를 남겼지만 나는 말없이 앞으로 걷기만 했다.

그런 내 표정을 한 번 쓱 보고나서 대충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겠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은 것은 알고 있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번에는 어금니를 꽉 물고 말을 이었다. “우리 정비 쪽에 책임을 지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쇼. , .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을 거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수석 엔지니어, ‘이고르 보브친은 우리 연구소 정비반의 반장이다. 처음 그가 반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무런 학위도 없는 그가 어떻게 우리 연구소의 정비반장까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당 고위부원인 그의 삼촌이 힘을 써 주었을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예전 최고 관리자였던 변태 벨로프와 그 뚱뚱한 아내의 정부가 되어서 그 힘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 소문이 일부는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 연구소는 아무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었다.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최상의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20대에 이미 박사학위 두 세 개쯤은 있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무지막지한 사상검증을 당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일반인이 이곳에 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 식당에서 반쪼가리가 된 고등어의 몸통을 포크로 쿡쿡 쑤시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말로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시골의 공업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할 정도로 머리가 나빴지만 어쩐 일인지 손을 쓰는 일에는 꽤 재간이 많았다면서, 특히 금속과 관련된 일이라면 머리보다는 손이 먼저 움직인다고 했다.

거 내 일이란 게 말이요, 동지들. 가계에서 덧셈도 못하는 이 돌 머리도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금속만 보면 알아서 내 손이 움직여준단 말이지. 고것들이 마치 젤리 같아진다니깐. 아무리 단단한 놈이라도 딱 보면 견적이 나오는 거요, 거기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고등어 반 토막을 입에 털어 넣고선 우물거리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어떨 때는 마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아니, ... 숫자가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리고 손이 따라 오는 거요. 그러면 뭐 잘 되더라고.”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담당한 실험 설비는 완벽했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기구가 규격에 맞게 정확히 맞물렸다. 특히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비브리늄 금속을 합금하여 주물 틀에 성형한 일은 전설로 남을 정도의 위대한 업적이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곧 당의 중앙정부가 명예훈장을 하사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그가 새벽부터 불려 나와서는 자신의 잘못으로 실험을 망쳤다는 비난의 증거를 본인이 직접 만들기 위해 나와 함께 이 긴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로서는 통탄할 만한 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명예훈장 운운하더니 오늘은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한 증거를 만들러 새벽부터 불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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