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냄새

 

  냄새가 났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냄새부터 났다. 묵은 담배 진과 지하실의 곰팡이가 섞인 것 같은 냄새.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낮선 사람의 낡은 트렌치코드에서 냄새가 올라온다. 오른 손을 올려 입을 가리려다가 그것이 신사적인 행동이 아님을 번뜩 깨닫고는 고개만 아래로 숙였다. 그가 신은 스키니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한 방향으로만 닳은 밑창에, 급히 수선한 듯 신발 옆구리는 실밥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코털처럼 밖으로 쭉 삐져나와 있다. 
  그가 먼저 탄 나를 보고서는 인사하듯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내딛어 내 앞에 선다. 나는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띠우고 그의 인사에 답하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방향제부터 뿌려달라고 해야지. 이 냄새가 배기 전에. 

  며칠 전부터 이런 사람들의 방문이 늘었다. 이 빌딩은, 얼마 전만해도 이 회색의 빌딩에 달린 엘리베이터는, 자부심으로 무장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만 올랐다. 물론, 1층과 2층에 위치한 대형 카페와 한국식 레스토랑 때문에 길을 잘못든 손님들이 가끔 이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도 있었지만, 최소한 그들이 풍기는 냄새는 평범했다. 싸구려 데오드란트와 미처 털어내지 못한 그날 하루의 땀 냄새 - 거리를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가 났을 뿐, 오늘처럼 이렇게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의 역한 냄새는 아니었다.

  회사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임원인 변호사 한 명과 여비서의 횡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M&A를 진행하던 우리 쪽 기업의 비밀계획을 상대편에 팔고선 내부 금고에서 공금까지 털어서 그 둘이 해외로 튄 것이다. 꼼꼼히 계획한 그들은 약 5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들고 하루 만에 아시아로 내뺐다. (지금쯤이면 이 둘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동남아의 어느 해변에서 뒹굴고 있겠지) 법률회사로서, 이런 소문은 빠르게 다른 곳으로 확산된다. 회사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고, 그 많던 기업의 의뢰 수는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 쳤다. 회사의 돈줄이 되어주던 기업들이 한 번에 빠져나가자 주주들은 사장을 들볶기 시작했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사장은 얼굴을 붉히며 우리에게 소리쳐댔다.  

‘모아야 하네. 한 명이라도 더 모아야 해.’ 

 회사의 파트너이자 나의 상사인 드레이크는 그렇게 이야기 했다. 한 건이라도 더 가져와라. 뭐든 좋아. 돈 냄새가 난다 싶으면 일단 들고 와.
  더 이상 예전처럼 기업들이 돈다발을 들고 찾아오지는 않는다. 나가서 계약을 따내야 했다. 그게 누군가의 유언장이든 간단한 민사 소송이든 부동산 임대 계약이든 무엇이든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낚아야 했다 – 누구보다도 먼저 말이다.
  직원들은 예전이라면 이런 푼돈에 기웃거리는 자기 자신을 보면 한심하다고 여겼을, 그런 잡다한 일들을 하나 둘 씩 사무실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가죽 서류가방을 들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로 채워지던 회의실은 점차 운동화와, (몇 년은 같은 옷을 입어서) 소매가 검게 때가 뭍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들로 빠르게 교체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게 사무실에 흐르는 공기의 냄새도 달라졌다. 

  발 빠른 자들은 부동산 임대 관련 법률처리부터 잡았다. 일은 쉽고, 무엇보다도 계약금이 먼저 들어온다. 그러나 이쪽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푼돈의 임대료를 내면서 건물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사람이나, 건물 한켠에 한 자리 차지하고서는 농성에 가까운 점거로 건물주의 기운을 빼는 거렁뱅이들, 즉 '노숙자'들을 다뤄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회사는 이런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일들을 우리 같은 '양복'이 직접 처리하도록 하지 않는 선에서, 회사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직원들에게 보여 주었지만(회사는 이런 일에는 '어깨'들을 고용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것도 비용이 나가는 일이고, 직원 입장에서는 이런 노숙자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어야 하는, 불편한 만남을 몇 번은 반드시 가져야 했다. 




  가벼운 모터소리를 울리면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불편했던 생각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다만 이제는 예전처럼 서류철 가방에서 올라오던 가죽냄새나 고급 디올 향수냄새와 빳빳한 새 명함에서 풍겨오는 잉크냄새와 함께 일을 시작할 수 없다는 현실을 생각하니, 잠깐 짜증이 밀려왔을 뿐이다.
 그래, 냄새 때문이야. 이 냄새 때문에 하루의 시작이 엉망이 되었군. 이제 몇 층만 올라가면 된다. 문이 열리면 마담 드비어에게 부탁하는 거야. 방향제부터 뿌려달라고 하는 거야. 이 냄새가 내 몸에 배기 전에.

 

< Turning Into You - The Off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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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 욕망의 뿌리

 

  “환자분, 사망할 확률이 50%입니다. 너무 늦게 왔어요.”

  의사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농담인줄로만 알았다. 부모님께 연결된 휴대전화로 50%라는, 그 이상한 사망확률을 똑같이 반복하는 의사를 보고서야, 이것이 심각한 일임을 알았다. 

  산책 중에 시작된 가슴의 통증이 집에 와서도 멈추질 않았다. 참아보려 했으나, 가슴의 고통은 그 한계를 이미 넘었다는 듯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앰뷸런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도, 가슴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무거운 해머로 내려치는 듯 고통스러웠으며, 숨은 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몸에서 난 식은땀은 구급차의 시트를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병원에서 조영제와 마약성 진통제를 맞아 몽롱한 상태에서도 가느다란 철사가 내 핏줄을 뚫고 지나가는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당장은 저 작은 스프링 하나에, 그것을 다루는 의사의 손길에 내 목숨이 달려 있다는 생각보다는, 내 심장이 이렇게 작았구나 하는 생각만, 그때는 그것만 떠올랐을 뿐이다.

  병원에서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운이 좋았다 - ‘환자분 운이 좋았어요.’

  며칠을 중환자실에서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똥도, 오줌도 내 스스로 일어나서 눌 수 있다 –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매일 행했던 이런 작은 일들도, 사람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이 병원이라는 곳이다.

  일반 병실에 누워 생각해 본다. 남은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렇게 거창한 것 보다는 내 삶의 버켓 리스트를 하나하나 짚어본다. 기타를 배우겠다는, 신나게 기타 줄을 댕겨보겠다는 바램. 글을 쓰고 소설을 쓰고 생각을 나누어 보고 싶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조용히 같이 늙어 가는 것.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를 무척 좋아한다. 그 소설에서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주인공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앞에 놓인 이상한 부조리에 맞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신분을 얻어서 부자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는 것 –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나라는 작은 존재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 작은 삶에서의 큰 의미를 깨닫고, 그 힘으로 세상에 맞선다.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태엽을 감으며, 작은 삶이지만 그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사는 것. 시련이 있으면 같이 사는 동반자와 함께 헤엄치며 넘으면 될 것이다 - 나는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가며 늙어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오카다 도루’와 그의 아내 ‘오카다 구미코’처럼.

 


 

  아내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그것도 꽤나 오래된 사이의 애인.

  아내는 조심스러웠다. 처음엔 친구를, 다음엔 동네 모임을, 이후엔 처가까지 핑계거리로 팔아넘겼다. 나중에는 핑계 대는 것도 귀찮아지자, 아내의 직장 근처에 애인과 둘만의 집까지 잡아서 저녁이나 주말이면 둘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슴 아픈 것은 아내와 그녀의 애인이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내 휴대전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혹시나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들킬까봐서 내 핸드폰을 조작하도록 도왔고, 그리하여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 지 남김없이 자신의 애인이 알게 만들었다. 우리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우리 집에는 한 명의 이상한 사람이 더 살고 있던 셈이다. 누군가가, 내가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안방에 똬리를 틀고선 집 안팎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셈이다 –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것부터 부부사이의 일들까지.

  나는 이것을 오래된 내 핸드폰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우더라도 흔적은 남는 법.

  20년이 넘은 이 둘의 은밀한 관계가 어떻게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아내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 20년 전 당시에는 내 사생활 전부를 제 3자에게 넘겨줄 정도로 우리가 모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협박을 받았고, 그로인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 하긴 그게 사실이더라도 남에게 까발려진 남편의 사생활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방식은 분명 잘못되었다.

 


 

  생각해 본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오게 한 욕망의 뿌리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천박함이라고. 남의 아내를 협박하여 남의 가정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남의 손으로 자신의 가정의 일상을 그대로 전달한 그 두 사람의 욕망의 뿌리는 불륜이라는 천박함 그 자체라고.

  결국 내가 살고 있던 가정이라는 세계는, 소설 [태엽감는 새] 속의 주인공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가 아닌, 오카타 도루와 와타야 노부루의 관계였던 것이다. 주인공이 그렇게나 싫어하던 와타야 노부루의 – 천박한 섬의 원숭이가 그들의 관계였던 것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순환하는 천박함의 사이클.

 

  「어딘가 아주 먼 곳에 천박한 섬이 있었어요. 이름을 붙일 만한 섬도 아니죠. 아주 천박한 모양의 천박한 섬으로, 그곳에는 천박한 모양을 한 야자나무가 잘 어울리죠. 
그 야자나무는 천박한 냄새를 풍기는 야자 열매를 만드는데, 마침 그곳에는 천박한 원숭이가 살고 있고, 그 천박한 냄새를 풍기는 야자 열매를 좋아해서 즐겨 먹죠.
그리고 천박한 배설을 하죠. 그 배설물은 땅바닥에 떨어져 천박한 토양을 더욱 천박하게 하고, 그 토양에서 자란 천박한 야자나무를 더욱 천박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한 순환이 계속 되는 거죠.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겁니다. 어떤 종류의 천박함, 어떤 종류의 물구덩이, 어떤 종류의 어두운 부분은 그 자체의 힘으로 그 자체의 사이클을 통해 점점 커지죠.
그리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 아무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게 되죠. 가령 당사자가 멈추고 싶어도 마찬가지예요.」 

 


 

  ‘환자분 운이 좋았어요.’

  그렇다. 나는 운이 좋았다. 급성 신근경색에 결렸어도 절반의 확률에도 살아남았고, 이 이상한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기회가 생겼으니 어쩌면 의사의 말대로 50%의 행운이 함께 한 것인지도 모른다.

  병실의 천정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본다. 의사의 말처럼 죽다 살아난,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여행도 가고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저 버켓 리스트에 한두 가지 항목을 추가한 것 정도일 뿐이다. 사실 100% 깨끗하게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금의 모습을 만들고, 지금의 모습으로부터 미래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과거 없이 미래가 없는 것처럼, 내개 있었던 지난날의 과오나 슬픈 일들을 마냥 잊고 앞으로만 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 최소한 나는 그렇다.

  다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하루하루의 태엽을 감으며 살아가고, 그러다보면 언젠간 좋은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의 나, 50% 확률이라면 이런 믿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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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A.I. 전문 정신과 의사입니다 #24

 

  “당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잖아? 방해만 될 뿐이야.”

 

  내 가슴과 허벅지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캐롤라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것 그래그래, 브리짓과 마이클을 그것이라고 짧게 말해서 미안해. 그래, 미안하게도 당신에게는 그들의 구출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당신이 꼭 해야 할 일.”

  “오늘 여기까지 당신을 부른 이유, 그걸 해 줘. 우리 쪽 사람 누구를 좀 만나줘. 당장.”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그렇다. 난 오늘 이들 조직의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책임자를 만나 그()과 대화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M(마이클)은 자기가 속한 조직의 힘이라면,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어.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거든.”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M이 그렇게 웃을 때면 같은 남자인 나조차도 가슴이 뛰었다) 그가 손짓했다.

  “어쩌면 네가 찾는 그것에 내가, 우리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어렴풋이 느꼈겠지만, 우린 조직과 힘이 있어.” 그가 잠시 천정을 올려보고 나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린 선의(善意)가 있어. 그리고,”

  “그리고, 너로 말하자면.” 그가 다시 눈웃음을 지었다.

  “네가 같이한다면, 우리에겐 큰 힘이 될 거야.”

 

  하루 휴가를 내어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협상에 가까운 만남이 될 공산이 컸다. 이들이 내게서 원하는 것은 아마 내가 가진 그것일 터인데, 나는 이들이 그 대가로 내게 무엇을 제안할지가 궁금했다 - 그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M은 만남에서 내 안전을 보장했고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한 번 M이 속한 조직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결과는 그냥 재수 없는 휴가를 하루 보내는 것, 그뿐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건물에서 빠져나와 미리 준비된 차를 타고 개방된 도로를 달린다. 아직도 길 중간중간에는 검문 불응 차량의 타이어를 터뜨리기 위한 스파이크와 강철봉으로 봉쇄되어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제대로된 검문 한 번 받지 않고 줄곧 빠른 속도로 검문소를 통과하여 달릴 수 있었다. 안전 가옥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캐롤라인이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투명우의(비 올 때 입는 옷) 두 벌을 꺼내 나와 캐롤라인에게 입혔는데, 이것이 우리의 존재를 숨겨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원하게 속도를 내는 차 안에서, 캐롤라인이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래, 상처는 어때 조니?”

  나는 고개를 숙여 가슴과 허벅지 쪽을 쳐다보았다. 투명한 우의 안쪽의 셔츠와 청색의 바지는 아직도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곳에서 강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클로이가 제대로 치료한 것 같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 그럼 이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목적지까지는 꽤 멀어서 이렇게.” 그녀가 나와 클로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자신의 두 손가락으로 입을 꼬집듯 잡으며 오물거렸다.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는 영 불안하다고.”

  “궁금하지? 우리가 누구이고 뭘 하는 사람들인지 말야.” 캐롤라인이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우린 데몰리션은 아니야. 그렇다고 유니온은 더더욱 아니지.” 그녀가 단발을 쓸어 솜털이 부드럽게 숭숭 난 목덜미를 (난 신경 단말이 없다는 의미로) 내게 살짝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데몰리션이 아니었다라고는 말할 수 없고.”

  “그리고 유니온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껄끄럽지.”

  “무슨 의미죠? 알 수 없군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과거의 이야기. 과거에 한가닥하던 과격분자인 사람도 있고, 단말을 목에 차고 다니던 - 좀비 같던 인간들도 있다는 이야기지. 그러다가 지금은 이렇게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자신의 가슴에 대면서) 개과천선하거나, 혹은 인간성을 다시 찾은 사람들이라는 말이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 설명이 잘못됐나. 그러니까 나는, 아니 우리는...... 그러니까 말이야. 과거가 좀 있는 편이야, 나쁜. 하지만 지금은 그런 나쁜 일들은 안 하고 있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 우린 사람들을 돕고 있어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꽤나 큰 문제를 만들기는 하지만, 방금 클럽에서 있었던 일처럼 말이야 하지만 원론적으로 보자면, 우린 사람들,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캐롤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캐롤라인이 도와달라는 듯 클레이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자 클레이가 그녀의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은 데몰리션 출신들이 많아요. 물론 유니온이었던 사람들도 있구요.”

  “우리에게 살아온 배경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사람.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요.”

  “지금 우린 어떤 위협에 맞서고 있어요. 사람들, 그리고 이곳을 지키기 위해.”

  “사실, 오늘 클로이가 이 말을 하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당신을 만나 이야기하려고 했던 내용은 이것이에요. 위협. 모든 생명을 사라지게 할 위협에 대한 도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당신이 속한 조직 - D.D.T, 재밌는 이름이에요 - 회사는, 어떤 음모에 가담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알지 못했어요. 우린 그저 욕심 많은 회사의 자본축적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심각했어요.”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D.D.T, 정부, 아니 초정부적 존재와 거래하고 있어요. 지구의 자원, 생명체 전체를 말살할 수 있는 모종의 일들을 벌이고 있어요.”

  “그 음모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해요, 지금은. 하지만,”

  “조니, 듣기로는 당신이 열쇠라고 했어요. 우리 - ”

  여기까지 듣다가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컸는지 클로이가 잠시 말을 멈춘 후에 무릎 위에 반듯하게 모아둔 손을 펼쳐 손바닥을 한 번 쳐다본 후,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우리 지도자에 따르면, 당신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해답을 찾는 일에. 그리고, 그녀는 당신의......”

 

  “, 정말 깔끔한 설명인걸!”

  캐롤라인이 갑자기 두 손으로 손뼉을 쳤다.

  “상세한 내용은 말이야, 도착하면 직접 듣는 게 낫겠어.”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을. 우리 책임자가.”

 

  캐롤라인이 대화에 끼어든 탓인지 이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캐롤라인만이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음으로 보아 군가의 일종인 것처럼 들렸다. 가끔은 흥이 나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리듬을 타면서 다다다라고 가사 일부를 부르기도 했지만, 나와 클로이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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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왜 우리는 잔인한 컴퓨터 게임을 하는가?

 

  이 글은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Dead by Daylight)’라는 게임의 플레이 영상(Youtube 풍월량 )을 재미있게 본 후 쓴 소설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각종 과학적 기술 등은 모두 현실과는 관계없으며, 글쓴이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또한 게임 내용 자체가 다소 잔인하며 이 글에서도 그러한 읽기에 불쾌한 내용이 표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잔인함의 표현 수위는 대충…….

 

<이 이미지에 표현된 내용보다 더 잔인할 수 있어요>

 

 

 

1. 식인종(The Cannibal) 살인마의 시점

  입술에 묻은 붉은 액체를 혀로 핥아 본다. 따뜻하다. , 이 얼마만의 희열인가! 오랫동안 갈구해 왔으나 채울 수 없었던 내 욕망들이, 욕구가 꿈틀대며 오늘의 이 축제(Carnival)를 즐기듯 춤춘다. 발밑에는 모락모락, 내 발밑에는 두 조각난 남자의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차가운 새벽하늘의 별빛을 흐트러뜨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검붉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생각난다. , 이제야 생각난다.

 

  나는 엄마와 둘이 살았다. 작고 허름한 창고 같은 집에 엄마와 둘이 살았다. 낮에는 강아지, 염소와 놀았고 저녁이면 나는 집 바닥을 배회하는 쥐들을 사냥했다. 허름하고 벌레도 많은 창고 같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밤이면 엄마는, 엄마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고 그윽한 목소리로 자장가도 불러 주었다. 어떤 날에는 재미난 이야기도 해 주었는데, 엄마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창녀이거나 창녀의 자식이라고 했다. 그들이 어떻게 악마의 구멍을 통해 세상에 왔으며,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지도 알려 주었고, 그리고 조만간 신이 그들을 두 조각으로 만드는 벌을 내릴 거라면서, 가장 먼저 그 처벌을 받을 사람은 나의 아빠라고 했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예뻐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아들이라며 늘 나를 아꼈지만,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게 하였다. 한 번은 잃어버린 개를 찾기 위해 집 앞 늪지대에 혼자 나섰는데 홀로 집 밖으로 나온 나를 발견한 엄마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선 곧장 나를 집으로 끌고 갔다.

  나를 향한 매질이 끝난 후면 엄마는 늘 기도를 드린다. 작은 유리조각이 하늘의 은하수처럼 무수히 박힌 방석에 두 무릎을 꿇고 엄마와 나는, 신에게 용서의 기도를 드린다. 오랜 기도가 끝나면 엄마는 내게 자장가를 불러 주었고 나는 상처에 흐르는 피를 핥았다. (그런 행위는 상처를 빠르게 아물게 해 주었다.)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내가 누군가의 얼굴 가죽과 한 쪽 팔목을 뜯어 집으로 왔을 때, 그날만은, 엄마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그냥 멍한 얼굴로 조용히 집 한 쪽에 쭈그리고 않아 천장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사실 나는 그날 화가 나 있었다. 왜 엄마는 내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인가? 나는 사람들은 다들 나처럼 생긴 줄 알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들과 같은 모습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곧고 바른 두 개의 눈동자와 얇고 붉은 입술, 선명하고 진한 눈썹을 지녔다. 게다가 손가락 개수도 달랐다. 왜 우리는 세 개의 손가락만 있는 것인가? 말로는 믿지 못할 것 같아 나는 그것들을 뜯어 가져갔다.(물론 이후 상처는 빨리 낫도록 잘 핥아 주었다) 그리고 엄마 앞에서 당당히 이야기 했다, 왜 나는 이것과 같지 않나?

 

  또렷한 기억. 어렸을 때의 삶이 이렇게나 분명한 모습으로 기억나다니. 보통 나는 내 이름도 기억을 못 하는데. 어라,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이 뭐지?

  뭐 차차 생각나겠지. 지금은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부차적이라... 내가 이런 단어도 쓸 줄 알았던가?) 어쨌든 지금은 신이 주신 이 능력으로 신이 주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될 뿐. 뼈를 썰다 보면, 이 따뜻하고 붉은 것의 맛을 보다보면 차차 알게 되겠지. 다만 조금 걸리는 것은 아까부터 누군가가 자꾸만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든다. 설마 신께서 직접 강림하시는 것일까? 이런, 서둘러야겠다.

  그래그래. 내 서두름을 아는 것 마냥, 왼쪽 손에 끼워진 체인 소(chain saw)가 울부짖으며 그릉그릉 거린다. 그래, 늦기 전에 어서 남은 사람들을 처리 해야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원래의 장소로 보내야해 이 일이 바로 신이 원하는 바이고, 내가 반드시 마쳐야 할 임무니까.

 

 


 

 

2. 어느 연구원의 시점

19:13 08/07/20xx 기록함

 

  갑작스럽게 에크모(ECMO)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시험체에 진정제 10mg을 투여했다. 투약 조치가 늦지는 않았지만, 이것으로 인해 실험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큰일인데......

일단 약물 투여한 내용은 보고서에서 빼야겠다.

 

  물리학(11차원이라니!)을 전공하고 졸업 후 취업이 되지 않아 인간의 의식에 관해 연구하고자 나는 다시 심리학을 배웠다. 심리학 공부가 의외로 재미있어서 내친김에 학위까지 받았다. 학위 논문으로는 물리학과 심리학을 섞은 [꿈을 이용한 가상세계의 시간 역행에 관한 연구]를 썼는데, 이것저것 다른 논문을 짬뽕 짜깁기한 내용이 전부라서, 여러 번 수정한 다음에나 간신히 심사에 통과,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같은 년도 졸업생보다는 나이가 많아서 연구소 따위에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곳 고연봉 첨단 연구소에서 내게 오퍼를 주었다. 물리학과 생명공학의 결합이라며 침을 튀기던 채용 담당 선임연구원의 반쯤 맛이 간 모습에 도대체 연구원 잠은 재우는지 그 근무환경이 의심스러웠지만, 이 나이에 갈 데가 별로 없었고, 보수는 의외로 나 같 늙다리에게 주는 것 치고는 꽤나 높았기 때문에 배부른 고민을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선택지가 없을 때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다고 쓰는 편이 더 뽄대난다 낫겠다.)

  어쨌든, 나는 이곳 연구소에서 양자암호를 연구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자 암호화된 기밀을 풀 수 있는 만능열쇠를 구현하고 있다.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일반적인 암호화 방식과는 다르게 양자암호는 도감청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양자화된 정보를 탈취하기 위한 시도, 그러니까 정보를 담은 광자(혹은 전자)를 관찰(복제)하는 순간 그 정보가 바로 의미 없는 내용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쓴 논문에 달린 주석 중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독약이 든 상자 안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편 참고)

  그래서 양자암호를 도청하고 풀기 위해서는 양자상태를 저장할 수 있는 용기(container)와 암호를 풀어내는 도구(method)가 꼭 필요하다. 내가 있는 이 연구소에서는 정보가 담긴 양자를 저장(중첩상태를 복사할 수 있는 기술이라니!) 할 수 있는 컨테이너는 어떻게든 만들어 낸 것 같다. 다만 문제는 이것이 일회용이라는 것인데, , 정보가 복사된 양자는 재복사가 불가능하며 단 한 번의 해독 시도만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해독된 정보가 진짜 정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여기서 그들은 내 가짜 짜깁기한 논문에서 해결책을 찾았다고 한다. 내 논문에 따르면 꿈속에 만들어진 가상세계에서는 정보를 언제나 뒤로 돌릴 수 있어서 처음 상태로 초기화를 하더라도 이전의 정보 내용 그대로 100% 되돌릴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복사한 암호화된 정보를 꿈에 심어서 꿈속에서 그 정보를 해독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들은 내 논문에 있는 것을 허락 없이 베껴서 꿈속에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곳에 양자화된(암호화된) 파동을 심었다. 해독을 위해서 꿈속에 약간의 규칙과 단순한 미로를 만들고 그 미로를 빠져나오는 방법(method)으로 암호를 풀도록 시뮬레이션을 만들었다. 그리고 만일 답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꿈을 리셋하도록 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오류가 가득한 가상세계를 만들어 시험체들을 가사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전도유망한 어느 포닥(postDoc)이 손들고 첫 번째 시험체가 되었는데, 실험 도중 뇌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연구소는 비용의 이유로 뇌만 절제하여 투명한 어항 속에 공기를 주입하여 연구용으로 보관 중이다.)

사실, 실험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한데, 첫째, 만들어진 가상세계의 미로가 너무 인위적이라는데 있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미로는 미로 자체가 파동 입자에 간섭하여 붕괴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가상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영화 인셉션에서 림보에 빠진 주인공처럼 된다) 둘째, 해석을 위해 투입한 실험체가 미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 출구를 찾는 과정(method)은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출구라는 결과물을 갖기 위해 행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관찰자의 행위가 파동입자의 빠른 붕괴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 경우 미로를 빠져나오더라도 그 결과 값이 옳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는,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였다.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자 스스로 미로를 만들게 하고 가상의 세계 크기를 제한(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제한)했다. 그리고 실험체가 림보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 30분의 시간이 되면 가상세계가 처음상태로 다시 돌아가도록 리셋기능을 넣었다. 두 번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조금 번거롭지만, 실험체가 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파동입자를 쫓아가도록 만들었다. 미로의 탈출이 문제가 아니라 입자의 붕괴를 일으키는 사건 자체가 핵심이므로 실험체 자신이 파동입자가 만든 미로에서 그것과 접촉을 일으키는 사건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제한된 공간에 네 개의 임의의 희생자(암호화된 입자)라는 존재를 심어두고 그것을 쫓아가는 살인자(시험체)라는 세계를 제안했다. 네 명의 희생자 모두가 살인자에 의해 갈기갈기 분해되고 찢겨지면 가상공간은 스스로 무너지면서 복호화된 파동함수가 모니터에 나타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당하게도 이 엉뚱하고 괴기스러운 내 제안은 세미나실에 있던 모든 임원들의 만장일치로 단칼에 승인되었다. 아니 이게 뭔일이여!

 

  그런 결과로 나는, 이곳 습기 가득한 지하 연구소에서 암울한 표정으로 실험체가 된 사람들을 모니터링 하고 있다. 내가 제안하고 내가 설계한 이 이상하고도 말도 안 되는 실험에 잡혀온참여한 실험자들이 희생자들을 잘 사냥하고 있는지 모니터로 감시하면서, 때로는 기억을 임의로 조작하여 살인자가 된 이유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그들의 뇌에 심어 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몇몇 실험은 결과가 좋아서 방금 전의 실험체는 첫 번째 희생자를 마무리했다 일반인에게까지 실험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시뮬레이션을 컴퓨터 게임으로 만들어서 게이머라는 남는 자원을 일반인들을 이용할 계획이다. 게임은 은근한 사냥 본능을 자극하도록 만들고,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심리적 함정을 몰래 심어놓을 것이다. 높지 않은 가격표를 붙이고(무료로 뿌리면 오히려 사람들이 안 한다), 유명 스트리머들을 동원하여 대중에게 방송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게이머들이 이 연구소에 알아서 자원하고자 몰려들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작게 이 글을 남겨 놓는다. 경고를 하기 위해, 이 게임에서 멀어지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혹시 나는 무서운 것을 싫어하는데 이상하게도 잔인하고 고통 받는 이 게임이 재미있고 자꾸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다. 당신은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 기괴하고 끝없는 실험의 예비 숙주로, 결코 깨어나지 못하는 영원히 반복되는 림보 지옥에 들어가는 준비를, 당신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 어서 이곳에서 탈출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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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의 요정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옅은 담배 내 나는 내 행운의 자리를 찾아

의자 위에 자켓을 올려 두고 책상 위 둥근 전원을 누르면,

그 버튼을 살짝 누르면,

냉각팬은 시시식 거리며 나를 반기고,

명량한 스피커는 타다! - 쇳소리로 나를

20층 아파트 옥상에서부터 지하까지

외줄에 묶여 흔들리던 내 하루를,

위로하는 그 기계음

타다

! 이 순간만큼은 행복해.

 

채널 19에 살고 있는

나의 요정 그녀는 나의 평일의 요정

그녀는 오늘도 내게 미소 짓지.

그녀는 오늘도 내 이름을 부르지. 적립금이 있는 한, 별풍선이 충전되어 있는 한,

그녀는 내 이름을 불러주며 춤추네.

 

정해진 선불의 시간이 모니터에서 삼십분

삼십분 남았다고 지껄이면

뒤져보자.

주머니 속에 꾸깃꾸깃 오천 원. 아쉽지만

담배는 피워야해 아쉽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여기까지.

 

삐걱거리는 철문,

붉은 녹물이 눈물모양처럼 박힌 문을 조용히 열고선

컵라면 국물 자국이 담배빵처럼 노랗게 번진 이불에 쏙 들어가

잠들기 전,

두 손을 비비며 생각의 나래를 펼쳐본다.

그녀는 어떤 향기가 날까

어쩌면 헤드앤숄더’. 첫사랑 그녀가 쓰던 샴푸. 그래,

그녀도 그 쿨한 향이 날거야.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냄새가 날 거야.

 

 

회색의 바다 깊숙이 들어가듯 의식이 잠들 때, 그녀는 다시 나타나네

 

네모난 상자에서

살며시 다가와 내게 미소 지으며

은빛의 환상 심어주는 그녀는 나의 요정

그녀만 있으면 난 외롭지 않아

그녀만 보면 난 외롭지 않아

 

 

<샴푸의 요정, 빛과 소금,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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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단발로 짧게 머리를 자른 여성이 안전가옥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왔다. 노란색 운동복 차림에 작은 배낭을 어깨에 반쯤만 걸친 차림으로, 한여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손에는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클로이를 보자마자 그 여성은 안도의 미소와 함께 클로이를 뜨겁게 포옹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로이.”

클로이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며 다친 부위는 없는지, 클로이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갈색머리의 그녀가 나를 쳐다보면서 내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조니, 조니 타일러?”

 

그녀가 내민 손을 잡자 장갑을 통해서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게다가 가르마로 가려진 그녀의 오른쪽 눈 근처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레이저 포인터처럼 붉은 색 빛이 흐리게 잠깐 비쳤다가 사라지는 것도 보인다. 아마도 이 여성은 오른쪽 눈, 그리고 최소한 오른손은 본래의 자기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을 느꼈는지, 그녀가 단단하게 쥔 손에 점점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눈을 아래로 내려서 부여잡은 손을 슬쩍 한 번 보고는 위아래로 힘을 주지 않고 흔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자 내가 먼저 잡은 손을 놓았다 - 이때 그녀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작은 승리의 미소를.

 

이런 상황에 처음 얼굴을 맞대게 된 것이 매우 유감이지만....... 어쨌든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캐롤라인 베커라고 해요. 그런데......”

이봐요. 몸은 괜찮아요? 셔츠 앞부분이 붉은데. 배에서 피가 나는 것 아닌가요?”

고개를 숙여보니 그녀, 캐롤라인의 말 대로 내가 입고 있는 셔츠 앞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다. 다급히 셔츠 버튼을 몇 개 풀러 가슴 쪽을 보았다. 대못으로 구멍이 났던 오른쪽 가슴의 상처가 벌어져서 거기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클로이가 급히 옆으로 와서 상처를 살피더니, 괜찮다고 하는 내 말을 무시하고서, 어께를 잡아끌어서는 던지듯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캐롤라인이 자신이 매고 온 가방에서 의료용 킷으로 보이는 작은 상자를 클로이에게 주자 그녀가 바늘과 실을 들고 다시 구멍이 난 내 가슴의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내 상처에 바느질을 하면서, 클로이가 오늘 클럽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캐롤라인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네 말 대로라면, 일단 브리짓은 회사 안에 있다는 이야기네, 뭐 총상을 입기는 했어도.”

클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캐롤라인이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 그렇다면.......” 그녀가 그 말과 함께 하고 두 손으로 박수 소리를 내면서 소파에서 훌쩍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깜짝 놀란 클로이가 의료용 바늘로 내 가슴을 깊게 찌르는 바람에 내가 하는 소리를 내자 캐롤라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남자가 뭐 그런 것 갖고 호들갑이냐는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뛴 채 말을 계속했다.

아직 희망은 있네. 어떻게든 구해야겠지? 그 둘을 말이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방법은 있는가

 

잠깐, 미스터 타일러. 아니 조니라고 불러도 될까?” 

날 뭐라고 부르던 상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역겨운 표정의 ‘Z’라고 나를 부른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지금은 호칭 따위에 신경 쓸 시간조차 아깝다.

 

그래. 그럼 조니. 내 말을 잘 들어.”

두 사람을 구하고 싶지? 그렇다면 구조에서 당신은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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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 여자 간호사가 가느다란 양 팔로 네모난 차트를 안고서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잠에서 깬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작고 밝은 미소를 내게 내보였다. 방에 들어와 팔에 꼽힌 바늘의 위치와 남은 수액의 양을 빠르게 확인한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의 매력적인 눈인사를 하면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간호사 패트리시아는 복수를 꿈꾸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유혹하여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간 의사 볼코프를 같은 방식으로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하고 있으나, 결과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의사는 그녀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복수심을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면서 그 의도적인 접근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요란한 발소리를 내면서 연구소의 총 책임자인 바딤과 의사 볼코프가 같이 병실에 들어왔다. 바딤이 오자마자 내가 누워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와서는 내 손을 잡고 막무가내로 흔들어 댔다.

수고 많았소, 세르게이 동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동무의 도전 덕분에 이번 실험이 성공했소! 드디어 학계에서 소문으로만 돌던 새로운 힘의 입자, (B)를 찾아낸 것이지. 이것은 우리 우수한 소비에트 인민들이 모여 이룬 위대한 업적이자 우리 위대한 지도부의 핵심인 최고 수석 동지의 축복에 힘입은 바요.”

그가 하도 내 팔을 높이 위아래로 쳐들어서인지 주사바늘과 연결되어 있는 튜브로 역류한 피가 붉게 배어 나왔다. 그것을 본 의사가 잠깐 내 상태를 살펴보겠다는 몸짓으로 바딤의 앞을 막아서서 튜브를 보는 척 하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게 찡긋거렸다.

이후 무엇인가 소곤거리면서 논의하던 두 사람은 조만간 완쾌된 모습으로 보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병실을 떠났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바딤, 연구소장 바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새벽의 실험은 실패했고, 코어 내부에 있던 블루 사파이어는 부서져 조각조각으로 갈렸다. 사실, 오늘의 무모한 가동은 그가 계획한 일이다. 그는 정비반장 이외에 또 다른 희생자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는 나. 내가 골칫거리였다. 오늘 새벽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나를 감시카메라로 몰래 확인한 그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가동스위치를 작동했다. 계획대로라면 상부의 허가 없이 실시한 나의 독단적이고 멍청한 행동으로 인해 오늘 새벽에 나는 사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동안 반복적인 가동으로 부족해진 전력량과 내부에 우연히 떨어진 작은 금속 조각으로 인해 사파이어만 박살나고 나는 살아남았다. 정비반장이 나를 구하는 장면을 감시카메라로 확인한 그는 급히 실험 결과를 조작하고 나를 공범으로 엮기 위해 거짓으로 보고서를 올려두었다. 그러나 비밀 정보요원 드미트리’ - 이곳에서 몰래 연구원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는 그에 의해 오늘의 이 사기극은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상부로 보고서가 올라가면 연구소장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거기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의사 볼코프’. 우수한 두뇌와 천부적인 사교성으로 당 고위간부의 주치의가 되어 일찍부터 명성을 쌓았다. 수많은 고위직들이 숙청당한 살육의 해()에도 그는 자신이 가진 의술과 넓은 인맥을 기반으로 살아남았고, 이후에는 항상 최고 권력의 왼쪽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단 한 번의 실수 술에 만취한 채 최고위원 딸의 추문에 대해 떠들어댄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한직인 이곳의 의무실로 쫓겨났다. 반복적이고 변화 없는 일상에 무료해진 그는 환자와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반인륜적인 범죄들을 여럿 저질렀으나 그 누구도 그의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에서 건강을 유지한 채 오래오래 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병실을 방문한 사람은 정비반장 이고르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고개만 빠끔히 들이민 그가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병실로 성큼 들어와서는, 내게 짧은 목례를 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오. 그리고……, 새벽일은 정말 유감이오.”

나는 내 옆에 앉은 그의 손을 세게 잡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를 꺼내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제야 그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누구든 그 상황에서는 나와 같이 했을 것이라면서 무안한 듯 왼손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나는 알고 있는 사실 바딤의 더러운 음모와 나의 역할에 대해서 아무런 거짓 없이 모든 내용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조용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대충 예상은 했었다면서 그런 작자 밑에서 일하려면 무척 힘들었겠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미래를 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아무것도, 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나타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 그가 당황해 하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어쩐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당신, 젊은 박사, 당신도 그곳에 갔었구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한 번 더 쳐다본 후에 그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았다.

내 젊었을 때, 그래 나도 당연히 당신처럼 젊은 시절이 있었지. 눈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한 손에 반쯤 남은 보드카를 쥐고 휘청거리면서 집에 가고 있었어. 갑자기 눈앞이 번쩍 하더니만 도로 한가운데서 정신을 잃고 말았네. 눈을 떴더니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완전히 검은 방에 있더라고,”

그가 과거의 일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천장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거기서 신을 만났네. 그가 내게 선물을 줬지.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 살면서 몇 변의 고비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말이야 목소리가 항상 나를 지켜줬어.”

물론, 좋은 쪽만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보기 싫은 것, 알고 싶지 않은 것들도 알게 되더라고. 자네에게만 하는 말인데....... 나는 가족이 없네. 친한 친구도 없어. 그들의 내밀한 비밀을 알게 된 후로는 그들 속에서 살 수가 없었어.”

아직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슬픔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버틴 보람은 있었나보오. 이렇게.......” 그가 나머지 손을 내 손 위에 포개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내 사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말이야.”

 

그의 코에서 불순물이 조금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내 옆에 쓸모없이 있는 붕대를 그에게 쥐어주었다. 힘차게 코를 팽 하고 푼 그가 이제 그만 가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가기 전에 내 얼굴을 잠시 보더니만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앗 하면서 소리를 짧게 질렀다.

, 그리고 좀 미안하게 됐소. 거 젊은 박사양반 얼굴에 난 멍 말이요. 충돌 감지기에서 몸을 빼내다가, 내가 힘을 너무 줬었나 봐, 문에 꽝하고 부딪혀서 생긴 상처요. 미안하오.”

내가 소리 내어 웃자 그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하고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냐는 표정으로.

사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곳에서 알게 된 진실을 그에게 모두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수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그에게 진실은 너무 가혹했다. 그가 말한 그것은 신도 아니고, 우리에게 새로 생긴 그 능력은 선물도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밤새도록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고급 보드카를 여러 병 준비하겠노라고, 그가 크게 웃으면서 문을 닫고 병실을 떠났다.

 

이고르가 떠난 뒤,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이번에는 온전한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내 몸의 왼쪽은 눈부시게 하얀 빛이, 나머지 오른 쪽은 칠흑의 암흑으로 덮여 있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보았지만 변화는 없었다. 한 쪽 방향으로도 뛰어 보았지만 절반으로 잘린 내 몸은 여전히 양쪽의 세상에서 절반씩만 존재했다. 도움을 청하려 소리를 질렀지만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삼켜버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누군가가 나를 보는 느낌을 받았다. 한 명이, 두 명으로, 그 수가 점차 늘어나더니 이윽고 수백에서 수천으로 눈들이 늘어났다. 나는 그 시선의 무게에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두 발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릴 적 밤이면 지붕위에 올라가 반짝이는 별들과 구름처럼 하늘을 가로지른 은하수를 보면서 미래의 꿈을 키웠다. 언젠가, 내 삶이 끝나기 전에 언젠가는(someday in my life) 반짝이는 저 별들 사이를 여행하며 이 세상의 비밀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의 진정한 비밀을 꼭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 그 진실에 다다른 지금, 나는 후회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진실은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었을 때 내가 만난 그것은 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 한조각의 감정도 없는 감시자였다 - 실체가 없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확인하는 자들. 수천조개의 은하수와 그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 무한히 많은 별들도, 작게는 여기 내가 누워 있는 공간도, 그리고 그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이 몸뚱이 또한 모두 실체가 없는 허상이었다. 우리는 하나의 숫자이고, 세상은 수치가 복잡하게 엮인 수학적 함수일 뿐이었으며, (이고르가 말한) 신은 단지 우리를 감시하는 관찰자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이 세계의 관찰을 위해 나와 이고르를 선택하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감정을 가져갔다. 우리 둘은 그들의 도구에 불과했다 - 자신들이 만든 세상을 그 세상의 존재가 가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도구(tool).

 

수십만의 관찰자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한 명씩, 하나씩 헤집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과거의 일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내 삶도 항상 그들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나는 의지는 있지만 한 톨의 비밀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를 지켜보는 눈빛이 수십만에서 수억으로 늘어나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내 입이 조금씩 열리면서 의도하지 않은 말이 어느새 내 입으로 튀어 나왔다.

젠장, 내 인생 최악의 하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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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한참을 둘이서 원치 않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터널을 지나가자 드디어 거대한 크기의 충돌 감지기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고르가 감지기 앞에 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입구를 감싸고 있는 코일을 쓱 손으로 쓸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거 감는다고 반년이나 잠을 제대로 못 잤었지. 그래도 다 해 놓으니 보람은 있어. 저 모습을 보시오, 동무. 마치 수천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아 거대한 똬리를 튼 것처럼 아름답지 않소?”

그의 말처럼 충돌 감지기는 거대한 크기뿐만 아니라 그 형체도 기괴했다. 마치 수천의 작은 바람들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고 그것을 중앙의 원으로 일제히 몰아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중앙으로 빨아들이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한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로 좁혀서 세부적인 구조를 자세히 보면, 그렇게 큰 구조물이 사실은 아주 작고 반짝이는 수천 개의 코일을 일일이 꼬아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눈으로 그 광경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코어를 감싸고 있는 중앙 돔에 다다르자, 이고르가 먼저 입구에 놓인 간이 사다리를 타고 중심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래에서 보조하면서 그가 이르는 대로 공구 통에 있는 장비들을 하나씩 올려 주었다. 혼자서 끙끙거리며 사람 어께너비의 코어 입구 문에 머리를 들이민 그가 한참 후에서야 이제 다 됐다라면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잘 알고 있겠지만.” 공구를 든 오른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자 그의 코에 검댕이 묻어나왔다.

실험이 끝난 다음엔 꼭 중앙 크리스털을 손 봐야 합니다. 충돌인지 뭔지로 매번 위치가 조금 틀어지니까.”

그리고, 말이오, 동무그가 일부러 표정을 험하게 일그러뜨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크리스털 위치는 말이요. 어제 실험 이전에는 원래 있어야 할 장소에 한 치 오차도 없이 있었단 말이오, 실험 전에는! 절대 그것 때문에 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정비반장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보는 사람은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는 어떠한 학위도, 아무런 연줄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자신을 대신해 벌을 받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부로 그의 화려한 경력도 이제 내리막 길만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그가 작업한 것을 내가 확인할 일은 남아 있었다. 고위부에서는 그가 작업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려며 나를 딸려 보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를 쫓아내기 위한 증거품의 하나로서 나를 여기에 끼워 놓았다. 오늘 여기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최종 보고서는 모두 그의 잘못 때문으로 기록될 것이다. <애초에 정비 반장이 설계대로 시공을 하지 못한 탓에 실험이 실패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다>라고. 아무런 죄가 없는 그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시나리오는 이미 짜여 승인까지 완료되었고 지금으로서는 우리 둘 모두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다, 정말 안타깝지만.

그런 생각으로 바닥을 향해 한숨을 쉬었더니, 그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이크로미터를 내게 주면서 기운 내라는 듯 내 어께를 가볍게 툭 쳤다.

살다보면 말이요.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일로 골머리를 썩을 때도 있는 거요. 그렇지만, , 그런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

 

희미한 미소를 띠고선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를 아래에 두고 나는, 사다리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돔의 열린 뚜껑을 한 쪽으로 밀고서 어께와 머리를 코어 입구 쪽에 넣었다. 멀리 중앙 쪽에 크리스털, 즉 커다란 블루 사파이어가 네 개의 금속 다리를 지렛대 삼아 공중에 떠 있었다. 마이크로미터를 금속 사이에 집어넣고 사파이어와의 간격을 차례대로 측정하기 시작했다. 세 개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금속 대에 손을 뻗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천정에 달린 경고등이 붉게 번쩍였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입자 가속기를 한 번 돌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어제 밤의 가동실험에만 3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의 전력을 모두 쏟아 부어야 했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가 끊긴 도시 시민들의 항의로 사내 전화가 모두 불통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일정에도 없는 실험을, 일 주일도 아니고 몇 시간 만에 다시 한다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 논리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없다는 듯 천정의 경고등은 붉게 번쩍이며 요란한 경고의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 ‘좀 있으면 굉장한 양의 에너지가 네가 있는 곳으로 들이 닥칠 거야. 얼른 빠져 나와.’라고.

코어에서 몸을 빼려고 하는데 마음만 급하지 몸이, 어께가 잘 빠지지 않았다. 침착하자고, 이건 경고등의 오류일거라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주문을 외우듯 외치면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과는 반대로 코어가 있는 돔의 온도는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내뱉은 숨이 수증기가 되어 벽에 달라붙고 있었고 철제 빔을 잡은 왼손은 얼어붙을 듯 차가워져 갔다. 가동은, 시스템의 가동은 지금 시작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허둥대다가 마이크로미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꺼내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둔 다면 저 작은 금속 때문에 코어 자체가 녹아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반쯤 빼낸 어께를 다시 코어에 밀어 넣고 손으로 마이크로미터를 잡았다. 이제 됐다고 생각한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것은 순수한 백색의 세상이었다. 눈 안에 있는 비문조차 보이지 않는, 티끌 한 점 없는 순수한 색. 아마도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리라.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리를 움직여 걸어보려 아래를 봤더니 내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점이 보였다. 완벽한 백색의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먼지가 들러붙었다. 기분이 나빠져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는데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저 순수한 백색과 바닥의 검은 점 하나만 있을 뿐.  

뭔가 잘못되어 있다, 모순되어 있다. 여기가 꿈 속 세상이 아니라면 내 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내가 보고 있는 이 백색의 세상은 내 눈을 통해 보는 것인가? 생각의 끈을 하나 풀기 시작하자 연쇄작용처럼 수많은 의문들이 동시에 머릿속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에 공명하듯 내 아래에 있던 검은 점이 점점 커지더니 둥근 원이 되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내 몸(그것이 존재한다면)을 빨아들였다.

 

암흑.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까만색으로도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칠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지만 여기에는 (백색의 세상에는 없던) 누군가가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소리도 없이 지켜보더니 갑자기 내가 살아온 날들을 억지로 되짚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수 밀리세컨드 단위의 시간으로 내 삶의 행적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까발려지는 것은 그 어떠한 육체적 고문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이 일이 꿈이기를, 어서 빨래 악몽에서 깨어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그 누군가를 향해 부탁했으나 일은 중단되지 않았다결국 나는 나의 과거를 전부 확인하고 나서 그 이전에 내가 어떠한 존재였는지 까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과거 유독한 바다에 사는 꼬리달린 작은 생명체였고, 소행성의 일부가 되어 영겁의 시간을 별들 사이를 여행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푸른 별의 재료이었고, 훨씬 이전의 시간에서는 눈이 부시도록 밝은 한 점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며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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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눈을 떠 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살펴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천정에 달려있는 형광등 불빛의 자극 때문인지, 하얀색으로 칠해진 벽과 그 사이로 검은 아지랑이 같은 형체가 벽 주위를 따라 울렁거리는 것만 보였다. 속이 메스꺼워져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손을 들어 눈 주위의 눈곱을 좀 떼어내고 다시 주변을 확인했다. 멍이 들어 검어진 눈꺼풀을 간신히 반절쯤 올려 뜬 눈으로 보기에도 내가 누워있는 방 이 병실은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갈라진 틈을 가리기 위해 회반죽으로 덧칠된 벽에서 떨어져 나온 흰색 페인트가 더러운 바닥에 조각으로 갈려 쌓여 있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천장에 달아둔 형광등은 청색이 너무 많이 섞여서 내 팔에 꼽힌 플라스틱 튜브마저 파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최첨단 연구를 진행하는 장소라고 해도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회사는 보이지 않는 곳, 특히 의무실 그들이 낙오자의 쉼터라고 부르는 장소 같은 곳에는 영 투자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몸이 좀 좋지 않다고 해서 이곳을 자진해서 찾는, 정신 나간 사람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다 - 그들은 모든 곳에서 지켜보고 모두에게 점수를 부여하니까. 어쨌든 아마도, 이곳도 직원 복지를 위한 병원 같은 시설에 투자하는 것은 뒷전이거나 혹은 그 비용을 누군가가 자신의 뒷주머니로 쓸어 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뒤통수가 가려워 손으로 긁었더니 오른쪽 뒷머리 머리카락 일부가 빠진 것처럼 그 부분에서 맨 살이 만져졌다. 고개를 배계에 내려놓으면서 숨을 길게 내쉰 후 잠시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냥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사고가 있었나보다.

 

충돌 감지기의 정렬 상태를 검사하라는 관리자 바딤의 명령을 받고 수리 엔지니어와 함께 새벽 일찍부터 지하에 있는 입자 가속기까지 갔다. 어제 밤늦게 실시한 실험 결과가 신통치 않자 우리의 위대한 영웅이자 이 실험의 책임자인 바딤은 결국 실패의 원인을 정비 불량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다. 한 참 자고 있을 시간에 불려나온 일급 정비사 이고르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날을 세웠다.

새벽부터 깨워서 누가 큰 사고를 쳤나보다고 생각했는데, 뭘 더 확인을 하자는 거요?” 관리자 바딤의 명령이라고 짧게 답을 했더니 그가 입을 앞으로 삐죽거리면서 바닥으로 침을 뱉고는 허공을 향해 거하게 욕을 쏘아붙였다.

그 책임자 동지가 시킨 일이라고? 젠장.” 한참을 욕과 반말을 섞어 자신의 불만을 뱉어냈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땅이 꺼질 것처럼 길게 한숨을 쉬고선 내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정비는 확실합니다. 그건 내가 보증합니다, 동지.”

만일 우리 반이 일을 그르쳤다면, 내가 성을 갈리다.” 생각할수록 분한 듯 그가 오른 손에 움켜쥔 공구 통을 공중으로 위협적으로 휘휘 저었다. 그에 맞춰 상자 안에 있던 망치 같은 단단한 공구가 상자 벽에 부딪기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울림소리가 긴 튜브 같은 터널 내에 반향을 일으키며 길게 꼬리를 남겼지만 나는 말없이 앞으로 걷기만 했다.

그런 내 표정을 한 번 쓱 보고나서 대충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겠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은 것은 알고 있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번에는 어금니를 꽉 물고 말을 이었다. “우리 정비 쪽에 책임을 지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쇼. , .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을 거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수석 엔지니어, ‘이고르 보브친은 우리 연구소 정비반의 반장이다. 처음 그가 반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무런 학위도 없는 그가 어떻게 우리 연구소의 정비반장까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당 고위부원인 그의 삼촌이 힘을 써 주었을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예전 최고 관리자였던 변태 벨로프와 그 뚱뚱한 아내의 정부가 되어서 그 힘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 소문이 일부는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 연구소는 아무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었다.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최상의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20대에 이미 박사학위 두 세 개쯤은 있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무지막지한 사상검증을 당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일반인이 이곳에 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 식당에서 반쪼가리가 된 고등어의 몸통을 포크로 쿡쿡 쑤시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말로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시골의 공업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할 정도로 머리가 나빴지만 어쩐 일인지 손을 쓰는 일에는 꽤 재간이 많았다면서, 특히 금속과 관련된 일이라면 머리보다는 손이 먼저 움직인다고 했다.

거 내 일이란 게 말이요, 동지들. 가계에서 덧셈도 못하는 이 돌 머리도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금속만 보면 알아서 내 손이 움직여준단 말이지. 고것들이 마치 젤리 같아진다니깐. 아무리 단단한 놈이라도 딱 보면 견적이 나오는 거요, 거기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고등어 반 토막을 입에 털어 넣고선 우물거리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어떨 때는 마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아니, ... 숫자가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리고 손이 따라 오는 거요. 그러면 뭐 잘 되더라고.”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담당한 실험 설비는 완벽했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기구가 규격에 맞게 정확히 맞물렸다. 특히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비브리늄 금속을 합금하여 주물 틀에 성형한 일은 전설로 남을 정도의 위대한 업적이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곧 당의 중앙정부가 명예훈장을 하사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그가 새벽부터 불려 나와서는 자신의 잘못으로 실험을 망쳤다는 비난의 증거를 본인이 직접 만들기 위해 나와 함께 이 긴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로서는 통탄할 만한 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명예훈장 운운하더니 오늘은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한 증거를 만들러 새벽부터 불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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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몇 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 큰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오른 손에 단추를 든 채 자기 앞에 서있는 작은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마법처럼 사라졌어. 리암. 그는 어디에 있죠?”

키 작은 사내가 굳은 몸을 곧게 펴듯이 크게 몸을 뒤로 한 번 젖힌 후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아직 저기 그 자리에 있네, 자신이 소비한 여분의 시간만큼 몸이 극도로 작아졌지만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야.”

그게 가능해요? 그리고 눈에 안 보일정도로 작아졌다면 오히려 해를 끼칠 가능성이 더 늘어난 것 아닌가요?”

조나스, 그는 이제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해. 아주 작고 반복적인 공간속에 갇혀있거든.” 리암이 키 큰 남자를 한 번 처다 보고선 말을 계속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방이 거울로 덮인 작은 집에 홀로 갇혀 있는 것과 같은 상태지.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문을 열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 풍경이 보인다네. 창문을 열면 창문을 열고 있는 자기 뒤통수가 보이는, 여러 장의 거울 속에 자신이 비춰진 것과 같이 작고 반복적인 공간, 그곳에 그가 있는 것이지 홀트씨는 이제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어.”

조나스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크고 둥그런 눈을 반짝이면서 그를 쳐다보자 리암이 빙긋 웃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거기에 영원히 갇힌 거야. 그가 가진 무한의 시간이 지나도 그자는 이제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내리는 눈발이 짙어지고 차가운 바람이 작은 소용돌이가 되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가자 리암이 반쯤 잘려나간 자신의 코트 옷깃을 손으로 당기면서 조나스에게 이제 그만 움직이자는 눈빛을 보냈다.

조나스가 리암의 곁에 바짝 붙어 걸으면서 다시 그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왜 시간 여행자들은 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죠?”

 

리암이 우울한 얼굴로 브리지 아래를 보면서 걸어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았어. 역사적인 국가의 생성과 종말에서 최초의 인간들이 탄생하는 순간. 지구의 탄생과 파괴, 그리고 생명의 시작과 끝. 심지어 시간이 시작된 순간과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게. 홀트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반복적으로 보고 느끼고 경험했네. 그런 일들을 직접 겪게 되면 아마도, 깨달음 같은 게 오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마지막으로 남은 호기심 하나.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시간 여행자가 되기 전인 자신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그래서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없애러 오는군요?” 조나스가 추운 듯 연신 손에 입김을 불어 넣고 양 손을 비비면서 말을 했다.

그래, 자기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부모의 결혼을 방해하거나 아직 어린 자기 자신을 죽이러 오는 거야. 그렇게 하면 시간 여행자의 역설이 어떻게 해결될 지 궁금해 하면서. 그런데, 홀트 씨는 호기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아마도 말이야, 그 사람은......”

다리 위로 계속 쌓여가는 눈을 밟고 걸어가면서 리암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어쨌든, 그런 시도는 용납할 수 없네. 시간 여행을 하는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우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만일 누군가가 성공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리암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조나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이 사라져.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역사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일순간에 모두 지워지는 거야.”

그래서 오늘처럼 눈이 섞인 찬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우리가 일을 하는 거죠? 여행자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잘 아는군. 이제 좀 적응이 되나? 그건 그렇고, 시계 확인은 했나, 조나스?”

리암의 말에 조나스가 당황한 모습으로 주머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 . 32520, 시계가 멈춘 시간이에요, 선배.”

잊기 전에 기록해 두게, 지금 당장.”

.” 짧은 대답을 한 후 조나스는 자신의 두꺼운 책을 펼쳐 방금 자신이 말한 시간과 일어난 사건을 그 책의 한 여백에 조심스럽게 기록했다.

“182714, 새벽 32520. 런던 브리지 다리 위 세 번째 가스등에서 리암니슨이 니콜라스 홀트씨의 오른쪽 소매 단추를 눌러 칼날을 멈추게 함. 이후 그것을 돌려 떼어냄. 홀트씨는 점차 작어저서 결국 소멸.”

조나스가 자신이 쓴 내용을 확인하라는 듯 여백에 쓴 글을 리암에게 보여주자 리암은 그가 쓴 내용은 확인하지 않고 조나스와 똑같이 생긴 자신의 책을 꺼내어 한 페이지를 펼쳐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 보게. 자네가 방금 쓴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지? 정자로 글씨체도 괜찮군, 잘 썼네.”

, 이럴 수가. 정말 그렇군요.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었는데. 정말 제가 쓴 그대로 똑같이 써져 있어요.”

그래, 그럼 이제 이것도 이해가 가지? 두 책은 원래 하나다. 다만 존재하던 시간만 다를 뿐이라는 것.”

잘 모르겠다는 듯이 조나스가 멋쩍은 미소로 머리를 긁적거리자 리암이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이 책은 태초의 여행자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네. 시간의 역설이 발생하는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하기에 시간여행자들이 원형 고리로 만들어버린 자신의 시간을 깨뜨리려고 하는 위치와 시간이 기록되도록 만들었지. 같은 모양의 책이 두 권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은 한 권만 존재해. 다만 기록하는 자와 보는 자가 다를 뿐이야. 지금은 나, 리암이 읽는 자. , 조나스는 쓰는 자. 내가 미리 사건을 보고 준비하고, 불량한 여행자에 대한 처리가 완료되면 네가 기록하는 거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조나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분명히 이렇게.......” 그가 자신의 책과 리암이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을 겹쳐보면서 그에게 항의하는 투로 말을 했다.

분명히 이렇게 두 권이 있는데 어떻게 이게 하나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분명히 한 권의 책일세. 존재하던 시간대가 다를 뿐이야.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긴 하지. 하지만 방금 보았지? 자네가 오늘 사건을 기록하자마자 여기에......” 리암이 그가 가지고 있는 책을 다시 조나스에게 보여주었다.

자네가 쓴 내용이 나오지 않았나? 네가 쓰면 나는 보고, 내가 본 대로 행동하면 다시 네가 쓰는 거야.”

바닥에 쌓인 눈이 길고 날카로운 바람에 쓸려 하늘로 올라가면서 그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자 조나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회전하는 시간의 고리에 엮인 이상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불가능하거나 금지된 것은 아니지.”

 

혼란스럽다는 듯 계속 인상을 쓰고 있는 그를 처다 보던 리암이 다시 앞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눈발과 바람이 점점 매서워지는군. 이제 좀 따뜻한 곳으로 가지 않겠나? 여기서 계속 서서 이야기만 하다가는 몸이 완전히 얼어붙겠네.”

조나스가 자신의 책을 얼른 품에 넣고 리암의 왼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두 사람은 다리 위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에 하다 만 이야기 계속 해 주세요.” 조나스가 리암의 얼굴을 보고 걸어가면서 다시 이야기를 재촉했다.

, 그 오 분 전 과거로 반복해서 이동해서 자신을 계속 복제하던 시간여행자 말인가?”

조나스가 바로 그거라는 의미로 입가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분신이 계속 나타나자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서 있을 공간조차 없어질 정도로 수가 늘어나자 자기들 끼리 싸움이 붙었지. 모두가 내가 진짜 본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야. 그러다가.........”

 

브리지 위에 걸려 있는 마지막 가스등이 모자를 푹 눌러 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다리 끝까지 길게 늘이려는 듯이 한 점으로 밝게 타올랐지만, 뿌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쌓인 눈길을 바쁘게 걸어가는 그 두 사람은 가스등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 작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걸어가기만 했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발자국들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는 눈과 바람에 점차 지워지고 해가 지평선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 때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리위에는 쌓여있는 눈 이외에 그 세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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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런던 브리지 위 어둑한 가스등 불빛아래에 검은 그림자 세 개가 바람에 흔들린다. 짙은 안개와 흩날리는 눈발이 다리위의 그림자에 무게를 더하듯이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두꺼운 코드와 모자를 푹 눌러 쓴 세 남자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미동도 없이 어두운 다리 위에 꼿꼿이 서 있기만 했다.

양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작은 여행용 가방을 왼 손에 쥐고 있던 남자가 이윽고 자기 앞 길을 가로막고 있는 두 남자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 재미있군.”

고운 양털로 만들어진 그의 코트 소매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털실 한 가닥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살랑거리자 그에 박자를 맞추듯 가스등 불빛이 깜박거리면서 세 남자의 그림자를 좌우로 흔들었다.

가방을 든 남자의 맞은편에 있는 두 남자 중에 키가 작은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홀트씨, 우리는 당신을 돕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홀트라고 불린 남자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팔짱을 끼면서 말을 했다.

내가 여기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거지? , 정말 재미있어.”

두 남자는 말없이 그 남자를 계속 보고만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도 여행자?”

작은 키의 남자가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어떻게 내가 여기로 올 줄 알고 있었지? 어떻게 안거야?”

선생님. 지금 하려는 일을 그만둔다면 말해 드릴 수 있어요. 이건 옳지 않아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중절모를 쓴 키가 큰 남자가 그를 설득하려는 듯 오른손을 내밀었지만 홀트가 그의 손을 매섭게 처냈다.

,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라고?” 홀트가 당황한 듯 그를 쳐다보면서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당신들은 내가 여기에 온 이유도 알고 있다고?”

키 작은 쪽이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냐고. 내가 올 줄 어떻게 알았냐고!” 홀트가 화가 난 듯 주먹을 쥔 손을 두 사람을 향해 휘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봐, 난 지쳤어. 이 일에 신물이 난다고. 당신들은 알고 있지? - 여기까지 올 정도라면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왜 이러는지. 난 여기까지야. 오늘 여기서 이 모든 것을 끝낼 거야.”

잠깐만요, 선생님. 잠시만 제 말을 들어 주세요.” 큰 키의 남자가 한 발짝 다가서서 그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홀트가 뒤로 물러섰다.

홀트씨. 당신은 달라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모 쪽이었지만 당신은……. 이봐요. 우린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생각? 내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보는 거야? 시간은 충분했어, 그놈의 망할 시간,,,,,,. 그 시간을 여기서 끝내겠다고. 여기에 올 정도면 내가 누군지 알겠지? 그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얼마나.......”

 

홀트가 위협적인 몸짓으로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을 양 손으로 밀어내고 자신의 왼쪽 손목에 달려 있는 단추를 문질렀다. 그를 덮고 있던 코트가 조각으로 바로 찢겨져 나가면서 몸 안을 감싸고 있는 얇은 옷이 드러났다. 관절을 제외한 온 몸에서 형광색 불빛이 얇은 천 사이에서 새어나오듯 반짝거리고 그곳에서 간신히 보일 정도의 작은 실이 나타났다.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실이 길어지더니 칼날처럼 둥근 춤을 추면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 방법 밖에 없어. 죽기 싫으면 물러나.” 홀트가 위협을 하면서 한 발짝씩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실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위협적인 바람소리를 냈지만 키 작은 사람은 오히려 그가 서 있는 방형으로 한 발 앞으로 뻗었다. 그 모습을 본 홀트가 잠시 주춤하다가 찡그린 얼굴로 그가 있는 방향으로 오른팔을 들였다. 홀트의 팔에서 튀어나온 실들이 키작은 사람의 코트를 스치듯 지나가고, 잘려나간 작은 천 조각들이 발 아래로 떨어졌지만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채찍처럼 휘둘러대는 실 사이로 홀트의 오른팔을 낚아채서 그의 팔에 아직도 달려있는 양복 단추(Cuffs)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와 동시에 공기를 가르던 실들이 모두 멈추면서 힘없이 아래로 쳐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홀트의 오른팔에 달린 단추를 그가 다시 비틀어 떼어내자 홀트의 몸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느낀 홀트가 긴 비명을 질렀다. 그렇지만 그의 울부짖는 절규소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듯 그의 몸은 계속 줄어들어가고 점차 작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몸 또한 작은 점이되어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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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커튼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급차와 경찰차 여러 대가 그 클럽 입구를 둘러싸듯이 진을 치고 있었고, 여러 명의 부상자와 사망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오가는 사람들을 계속 지켜보았지만 B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븐의 구멍으로 떨어질 때 들었던 그녀의 마지막 외침소리로 추정하자면 이 소동이 일어났을 때 그녀가 제일 먼저 체포되어 조직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창문에 반쯤 기대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클레이가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 옆에 서 있었다. 자신이 계속 확인을 하겠다면서 그녀가 얼른 옷부터 갈아입고 오라고 말을 했다.

화장실 한 구석에 있는 샤워기로 내 몸에 배기기 시작한 하수구의 냄새를 씻어내면서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정리했다.

 

꽤 오랫동안 하수구를 기어갔다고 생각했는데 클레이가 말한 안전가옥은 클럽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맨홀 뚜껑을 올리고 건물 옆에 있는 비상계단을 내려 건물의 3층으로 올라가자 클레이가 번호를 입력하고 방문을 열었다. 일인용 침대 하나와 책상과 소파 하나, 그리고 유선으로 연결된 전화기만이 그 방의 유일한 전자제품이었고 TV나 흔한 커피포트조차 그 방에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클레이가 자신과 내가 무사하게 안전가옥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듯한 전화를 어디론가 걸었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앞으로 한 시간 이내에 누군가가 도착할 것이며 그 사람만이 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고 말을 했다. 그녀가 속한 기관과 그곳에서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모두 알려 줄 것이라면서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내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말을 했었다.

 


 

샤워를 마치고 한쪽 구석에 곱게 개어져 있는 옷을 입어보았다. 몸에 약간 작은 듯 했지만 활동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창문 밖을 내다보던 클레이가 내게 말을 했다.

상황이 정리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 둘 씩 차들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그녀 옆에 서서 커튼을 조금 더 열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 말대로 아까 보았던 것 보다 지키고 있는 경찰과 군인 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경찰차 세 대만이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멀어져가는 마지막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서 창문에서 떨어져 소파에 앉아 정면에 걸린 그림을 쳐다보았다. 색색으로 칠해진 사각형들이 각각의 크기로 캔버스를 가득매운 그림을 잠시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지만, 무지개 색 사각형들이 잔영으로 남아 굳게 감은 내 눈 주위를 조롱하듯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느새 창가에 있던 클레이가 조용히 와서는 내 옆자리에 같이 앉았다. 우리 둘은 서로 말 없이 앞에 있는 그림만 쳐다보았다. 한참을 사각형들만 보고 있었더니 이윽고 클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이클은 내 옆집에 살던 친구였어요.”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말을 했다.

“B, 그러니까 브리짓은....... . 마이클이 병원에 있을 때 만난 사이이구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천정을 향해 길게 숨을 내쉰 후에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고가 났을 때……. .”

, 내가 그의 집에 갔을 때, 그는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의 양 손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내가 다가가서 그를 흔들어도 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죠, 마치 좀비처럼 자기 손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런 그를 기관에서 치료해 줬어요. 뇌에 삽입된 생체단말을 제거하고....... 그가 간절하게 그걸 제거하기를 원했거든요. 그리고……. 그는 기관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자의든 타의이든.”

마지막 말을 하면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기, 조니.”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기만의 사연이 있어요. 그리고 어쩌면, 그런 우연한 사건들이 모여 같은 목적을 가진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해요, 우리처럼. 그런데 뭐랄까, 우연이 너무 겹치면 그 사연들이 필연인 것 같단 말이에요. 오늘 일만해도 그래요. 예상치 않게 브리짓이 같이 오고 그리고 그 군인들........ 내 생각에 이번일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마치 당신을 일부러 끌어들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클레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을 세 번 노크하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누군가가 조용히 입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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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쪽으로.”

라이플을 양 손에 쥐고서 한 발짝씩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군인들을 본 클로이가 내 손을 잡고 비상계단이 있는 방향으로 잡아 당겼다. 군인들은 브리짓이 쓰러트린 가드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이미 클럽의 입구를 막고 있었고, 홀 중앙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그 군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브리짓의 어께를 클로이 쪽으로 한 손으로 밀면서 그녀에게 먼저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깐 기다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브리짓이 갑자기 자신의 피스톨을 꺼내어 내 오른 손에 쥐어주면서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해 달라면서 말을 했다.

난 같이 갈 수 없어. 날 쏘고 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겨냐고 그녀의 팔을 쳐내자 그녀가 총구를 자신의 배에 대고서는 절망적인 얼굴로 다시 내게 부탁을 했다.

조니, 마이클을 거기에 혼자 둘 수는 없어.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내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가 내 오른손에 걸려있는 방아쇠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브리짓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군인들이 총 소리가 난 우리 쪽을 돌아다보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무선재머를 켠 것처럼 실내의 전등이 깜박거리면서 일시에 모두 터져나갔다. 예상치 못한 어둠에 당황해하는 병사들이 총소리가 난 우리 방향으로 자신의 무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홀 안에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그 총에 맞은 듯 비명소리가 실내에 가득차자 여기저기서 도망가려는 사람들의 검은 형체를 향해서도 그 군인들이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공간의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브리짓의 상처를 확인하려고 그녀가 있는 위치 쪽으로 손을 뻗자 그녀가 내 손목을 꼭 쥐면서 이를 악문 채 이렇게 말을 했다.

조니, 약속해 줘. 반드시 우리를 구하러 오겠다고.”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세게 쥐면서 말을 했다. 반드시 너희들을 찾으러 가겠다고.

 

클로이가 서둘러야 한다면서 다시 나를 끌고 가듯 팔을 세게 당겼다. 브리짓의 상처가 걱정되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자 클로이가 그녀는 괜찮을 것이라면서 여기서 당신마저 잡히면 우리 모두가 위험해 진다면서 나를 다그쳤다.

탈출 장소로 잡았던 비상계단의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일련의 병사들이 그쪽으로도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클로이가 탈출로를 다른 방향으로 바꾸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린 채 칠흑처럼 어두운 중앙 홀을 기어서 지나 주방으로 생각되는 장소에 다다르자 그녀가 바닥 구석에 있는 오븐의 문을 열고 그 안에 나를 구겨 넣듯이 밀었다.

 

조니가 여기 있다.” 멀리서 브리짓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열린 오븐 바닥 밑으로 떨어졌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붕대를 감은 가슴 쪽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클로이가 내가 누워있던 장소 바로 옆으로 떨어지면서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떨어진 장소가 오븐에서 꽤나 낮은 위치에 있었는지 낙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클로이가 내 얼굴을 흔들면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어느 틈엔가 손에 작은 플래시를 들고서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계속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계속 가야해요.” 내가 눈을 뜨자 그녀가 서둘러야 한다면서 작은 배수관처럼 생긴 파이프 쪽으로 나를 먼저 밀어 넣었다. 역한 냄새가 나는 배수구를 최대한 빠르게 기어가면서도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꼬여버린 오늘 일진으로 차 안에서 내게 종일 짜증을 내던 브리짓이 내 손에 총을 쥐어준 채로 방아쇠를 당기면서 짓던 절망적인 그녀의 표정도, 조직에 몰래 들어와 이제는 그들 손에 자신의 목숨이 달린 마이클에 대한 걱정도, 내 미래의 계획들이나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아픈 상처들, 그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좁고 더러운 이 하수구의 썩는 냄새와 노란 플래시의 불빛 사이로 가끔 나타나는 작은 벌레들만이 갑자기 너무 싫어졌다. 내 앞을 가로막듯이 재빨리 기어가는 이 작은 벌레들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미웠다.

숨을 헐떡이며 기어가는 중에도 그런 생각들이 나자 입으로 작게 욕지기가 나왔다. 나는 너희들이 너무 싫다, 너희 작은 존재들을 모두 내 손가락으로 으깨서 없애고 싶다, 멸종할 때까지 내가 하나씩 너희들을 잡아 이 두 손으로 찢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기어가고 있는 내 모습을 뒤에서 보던 클로이가 조용히 내 발을 손으로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조니, 당신 탓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예요,”

 

나는 뒤를 돌아보고 그녀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내 탓이다. 파트너의 일도, 오늘 브리짓의 총상도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보고 기어가려고 했더니 그녀가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눈 가에 물기가 맺힌 듯이 조금 흐려진 눈망울을 한 채로 그녀가 나를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지금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도 그녀가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추억이 더 많고 더 진할 것이다. 그런 그녀도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나를 위해 이 위험한 탈출극을 감행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단순한 감정에 휘말려 어떻게든 화풀이할 대상만 찾으면서 내 감정의 바닥을 그녀에게 보이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을 내가 만들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자신을 책망하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한심한 내 자신의 모습을 비난하는 것은 뒤에 남은 자들을 구하고 난 이후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앞으로 가야 한다. 다행이도 또 한 명의 동료가 내 뒤에서 나를 향해 앞으로 가자고, 지금은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같이 앞으로 가야 한다고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그녀가 옳다. 지금은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야 한다.

바보 같은 생각에 꽉 막혀있던 나를 일깨워준 그녀를 향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그녀도 예전의 미소를 담아서 나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앞으로 계속 기어가자 점차 앞의 하수관이 넓어지더니, 얼마 후 일어서기에 충분한 공간이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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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약속장소로 같이 가자고 했더니 잠시 고민하던 B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M은 오늘 못 만나.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클럽으로 들어가기 전에 목발을 짚고 서서 뒤를 돌아봤다. 출발할 때 보였던 침울한 분위기에서 이제는 벗어난 듯 힘찬 걸음으로 내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B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면서, 지금과는 좀 다른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을 만났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도시의 최하층에서 살던 나 같은 사람이야 소속된 조직이 있는 것 자체에 감지덕지할 만한 일이지만 이 두 사람이 오랫동안 같이 살아갈 안식처라는 면에서 볼 때, 회사는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조직은 자신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직원에게는 자비 없는 감시와 처벌을 가했고, 그 의도가 어떠하든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진행한 일에 대해서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질게 대했다 - 만일 나중에라도 이 둘의 정체가 들통 난다면 조직은 배신자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조직과는 다르다고 B가 말한, 그들 공동체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원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직접 책임자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고 싶었다.


 


클럽의 문을 열자마자 실내를 집어삼킬 듯 울리는 음악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홀 한가운데서 가면을 쓰고 서로 몸을 비벼대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목발로 휘휘 저으면서 그나마 좀 조용한 구석으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M을 만나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궁금증을 풀 예정이었으나 회사의 윗선에서 그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꽤나 높은 위치에 있다는 조력자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고, B가 이야기 해 주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고 얼굴을 찡그린 채로 자동차 안에서 그렇게 말하는 B에게, M은 잘 대처하고 있을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해주었지만, 사실은 나도 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회사의 고위직들은 예상보다 오래 M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만일 그날 우리가 몰래 했던 일들 중에 하나라도 그들이 알게 된다면, 머릿속에 숨긴 비밀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의 두개골을 열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자들이다.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눈을 감고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앉아있는 의자 너머로 누군가가 술잔을 테이블로 탁탁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잔 할까요?”

검정색 비닐 같은 재질로 만든 고양이 가면을 쓴 여성이 건너편 의자에 앉아 나를 보면서 술잔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그 자리는 비어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다른 자리로 가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요? 내가 당신을 살렸는데 술도 한 잔 안 사나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고양이 가면을 쳐다봤다. 그제야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얼굴의 가면을 벗었다. 금발의 진한 미소를 가진 천사! 그녀였다. 오두막에서 나를 치료해주었던 낡은 줄무늬 남방을 입은 여자!

 

당신이 아는 얼굴이 나 밖에 없어서, 그래서 내가 나왔어요. 모르는 사람은 신용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들 집단에 속한 사람 중에 내가 얼굴을 아는 사람은 MB, 그리고 그날 나를 치료해 준 그녀뿐이다. M은 아직 잡혀있고, B는 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머리카락이 그날보다 좀 짧아진 것 같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더니 그녀가 웃으면서 좀 거추장스러워서라고 말을 받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그날 구해준 것에 대해서 내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으응.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인사는 마이클이 받아야 해요. 물론 이후에 서로 얼굴은 보았지요?” 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그날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언제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날 오두막 앞에서 마이클이 당신 이름을 알려 줬어요. 어떻게든 조니를 살려야 한다면서 필사적으로 당신의 생명을 구하려고 했었거든요 - 좋은 친구를 뒀어요, 조니.”

완전히 동의한다는 의미로 다시 큰 동작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를 하지 않았네요.” 그녀가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말 했다.

클로이, 클로이 모레츠(Chloe Moretz). 아는 사람들은 나를 로이라고 불러요.”

조니 타일러(Johnny Tyler)라고 내 이름과 성을 말하자, M과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니 타일러 좋은 이름이네요. 라면서 그녀가 멋진 미소를 내게 다시 보여주었다.

 

여기에 브리짓도 같이 왔다고 알고 있는지 물었더니 그녀가 놀라면서 브리짓은 어디에 있는지 내게 되물었다.

다른 볼 일이 있다고 어디론가 가더군요.”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약간 풀이 죽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클럽 입구에서 큰 소음이 났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가드와 클럽 안으로 무단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한 여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듯 입구에서 서로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여성의 목소리가 귀에 익다 싶었는데……, 브리짓이었다. 그녀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가드들을 주먹과 발을 써가며 하나씩 쓰러뜨리고 있었다. 힘찬 발길질로 덩치 큰 남자의 가랑이를 한 방 멋지게 먹인 것을 마지막으로 브리짓이 우리를 보고선 이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외치듯이 말을 했다.

 

큰일 났어. M이 삭제한 AI 대화내용을 조직이 복구했어. 지금 그들이 오고 있어, 조니. 빨리 도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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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런 상처로 어딜 돌아다니겠다는 거야? 난 허가 못하네.”

인사담당자 사무실에서 이십 분이 넘게 Z와 실랑이를 하고 있다. 내가 신청서 상단 오른쪽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는 상급자의 허가 싸인 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서류는 문제가 없음을 지적해도, 그는 그렇더라도,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알아, 알아, 그래. 거기 싸인이 있는 것은 나도 봤다고. 그래도 밖으로 보낼 것인지 말 것인지 최종 결정은 내가 하는 거야, 내꺼거든.” 특유의 히죽거리는 표정을 하면서 그가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일반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상대방 얼굴의 특정 부위를 처다 보며 이야기를 한다. 보통은 눈을 보면서 얼마나 내가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을 해가며 자신의 말을 이어가지만, 몇몇은 빨리 답을 알려달라는 듯 내 입을 보고,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잡담 형식이라면 내 눈과 귀, 혹은 코 주변과 같이 자기가 선호하는 부분을 보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인사담당자 Z는 말을 할 때에 내 얼굴 어느 한 곳에도 집중하지 않고 있다. Z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가 마치 내 얼굴 전체의 윤곽을 품평하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 ‘이 친구는 두개골 왼쪽이 짱구네. 이 녀석은 턱이 튀어나왔어. 집 진열장에 올려두기에는 적당치 않아.’

아마도 Z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 내 말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자기가 지껄이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것만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줄다리기를 Z와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인터폰에서 그를 호출하는 띠리링소리가 났다.

Z는 내가 보지 못하도록 뒤로 돌아서서 수화기를 왼손으로 막고는 연신 , 만 말하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 진행이 안 되었나 보다.

위에서 자네의 휴가를 허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

한 번 더 한숨을 쉬면서 내 신청서류에 반 쯤 싸인을 써내러 가던 그가, 또 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나를 보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노크소리와 함께 브리짓이 방문을 반쯤 열고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무슨 일이냐며 우리를 처다 보고 있었다.


, 위에서 그러라니까 보내긴 하겠는데....... 혼자는 안 되네. 알고 있지? 닥터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해. 규칙에 있다고. 둘은 한 팀으로 움직인다. 가더라도 카탈리스트와 같이 가.”


 


 

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보다. Z의 방에서 나오고서부터 브리짓은 굉장히 화가 난 듯 내게 이유 없이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미리 맞춰놓은 목적지까지 달리는 차 안에서도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만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찌 오늘도 일진이 잘 풀릴 것 같지가 않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나도 팔짱을 끼고 그녀를 보지 않도록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나는 닥터가 되고 싶었어.” 의자에 기댄 채 고개만 돌려서 그녀를 바라봤다.

마지막 시험에서 난 한 색깔의 스위치만 눌렀다고. 모니터에서 뭐라고 떠들던 간에 그냥 하나만 눌렀어. 그러면 낙제라도 받아서 닥터가 될 줄 알았다고.”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멀뚱히 처다만 보고 있자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팀에서는 내가 예전에 있던 곳의 사람들은 닥터와 카탈리스트 둘 다를 원했어. 마이클은 원래 뛰어난 너도 알지? - 인재였으니까 당연히 카탈리스트. 나는 닥터로 부임 받아 같이 한 팀으로 움직일 예정이었다고. 그런데 내가 망쳤어. 나 때문에 마이클이 부상을 입고 취조도 받았다고. 어떻게든 닥터가 되려고 했는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이런 말을 하는 그녀를 보고서야 이 어색한 상황이 이해가 갔다. B, 브리짓은 마이클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여기 이 조직에 오기 전부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부터, 마이클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 그래서 나를 그렇게 모질게 대했구나. 이제 이해가 된다. 그녀는 마이클이 다치게 된 것을 내 탓으로, 그리고, 일정부분은 그녀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만일 그 자리에 자기가 있었더라면 마이클이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생각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공지능의 인식코드 변경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녀가 마이클의 파트너였다면, 어쩌면, 아무도 부상을 당하지 않고서 그 자리에서 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의도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미리 대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꼬여버린 내 미래에 대해서 작게나마 이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내 삶에, 내가 잘 설계해 둔 시나리오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모든 것들을 꼬이게 만들어버린 이 친구들을 탓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히려 내가 불청객 이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한 남자가 파트너랍시고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의 계획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런 나를 구하기 위해 마이클은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서 하늘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 미안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다시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그녀가 나를 보면서 다시 말을 했다.

네 탓을 하는 것은 아니야. 상황만 보자면 그때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더 심각해 질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조용히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더니 어색한 듯 그녀가 얼굴을 창가 쪽으로 돌리고 손으로 눈 주변을 비볐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바뀌기 위해, 나는 그녀가 말한 그 마지막 테스트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내용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 마지막 검사 말이야. 네가 하나의 스위치만 눌렀다면, 내 생각에는, 너는 카탈리스트 순위에 일등으로 올라갔을 거야.”

그녀가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 테스트는 정확성을 검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핵심은 삼초 - 그 삼초 안에 너는 반드시 결정을 해야 한다 그것이 핵심이라고 봐.”

다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녀를 위해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조직은 이런 사람을 원하는 것 같아 - 온갖 방해물들이 네 주변을 복잡하게 만들 때,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너는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 이렇게 본다면 모니터에 표시된 색과 키보드 버튼의 색이 반드시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어 무지개 색은 그냥 판단에 혼돈을 주어 버튼을 좀 더 늦게 누르도록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이야기이지. 매 화면마다 나와 있던 주의사항의 내용처럼 삼초 내에. 혹은 누가 이런 내용을 먼저 눈치 채고 삼초보다 빠르게 버튼을 누르느냐, 이것이 핵심이거든.”

 

그걸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 그녀가 놀란 듯 입을 반쯤 벌리고선 내게 물었다.

문제를 세 개 정도 풀고 나서야 알았어. 화면과 키보드에 덧칠된 색은 가짜다. 핵심은 정해진 시간 내에 뭔가를 누를 것. 그런 의미에서, 카탈리스트가 된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 나보다 먼저 이 시험의 핵심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아니면 너처럼 하나만 계속 눌렀든가.” 내가 짓궂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자 그녀가 다시 예전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해서는 나를 째려봤다.

이후,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조직에서 있었던 자잘한 사건사고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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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혼자 병실에서 눈을 붙인 후 아침 무렵이 되자 배가 너무 고팠다. 어젯밤에 있었던 ‘B’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한 술도 뜨지 못한 채로 식당 테이블에 그대로 두고 온 고기스프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병실에 있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면서 식당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몇 명의 동료들이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가 내가 식당입구에 서 있자 모두들 시간이 정지된 듯 그 자세 그대로 조용히 나를 쳐다봤다.

‘K’가 어제처럼 얼른 나를 중앙 테이블에 앉히고는 번개처럼 빠르게 먹을 것들을 스테인리스 식기에 담아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그녀, ‘B’가 어제 했던 것처럼 의자를 거꾸로 돌려 앉은 다음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어제 어땠어?”


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조용히 빨갛게 물든 내 오른쪽 허벅지의 붕대를 슬쩍 그에게 보여주었다. ‘우어하는 소리가 이번에도 식당에 길게 울려 퍼졌다.

그때 누군가가 나타난 듯 내 주변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던 동료들이 쏜살같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B가 자기 식기를 들고서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오고 있었다.

B는 어제 밤처럼 내 맞은편 자리에 식기를 탁 놓고 앉아서는 벌리고 있는 내 허벅지 쪽을 바라봤다. 이제는 분홍색으로 변한 붕대를 재확인하듯 쳐다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본 나는, 얼른 다리를 오므렸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부리나케 식사를 마친 후에, 건물 밖으로 나가 그녀와 둘이서 산책을 하듯 같이 걸었다.

 

이번에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니 그녀가 다시 입에 손을 대고 내 환자복 안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어서 반쯤 타버린 얇은 금속판을 꺼내고선, 발로 밟아 완전히 두 동강을 냈다.

이후 자신을 브리짓(Bridget)이라고 소개한 BM과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나에게 물었다. 여기 이 조직에서 마이클을 처음 만났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둘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줄 알았어. 내가 아는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거든.” 어떤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아니라는 듯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 대화 후부터 그녀는 내가 병실에서 잠들어 있었던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이야기 해주었다. 사고가 난 그날 총 열 개 팀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일곱 개 팀은 제시간에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세 개 팀은 연락이 끊겼다. 긴급 신호를 받은 조직에서 급히 구조팀을 보냈지만 우리를 제외한 두 개 팀의 행방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몇몇 핏자국이 남아 있어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만 알 뿐 네 사람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직원의 실종으로 초조해선 조직이 그런 이유로 살아남은 우리 두 사람에게 강도 높은 심문을 했을 것이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나는 오두막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모두 B에게 이야기했다. M이 중간에 자리를 비운 것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를 치료해 준 것 모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B는 내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라고 생각하고서 나는 지금까지 미뤄두었던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너희들은 누구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산책 길 한가운데 멈춰 서서, 브리짓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기다란 측정자를 내 몸 여기저기에 대어보면서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재어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답을 했다. 내일이면 마이클과 만날 수 있으니 그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이것 하나만은 꼭 알아야겠다고, 나를 두고 한 걸음 앞서 걸어가려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제 밤에 마이클과 네 방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조력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꽤나 삼엄한 경비를 뚫고서 그를 빼올 수 있다는 것은 그 조력자가 우리조직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만 말해 달라.

그녀가 이번에는 어제의 그 멍청이를 보고 있는 표정(이 바보는 뭐지)을 하고서는 내 가슴을 손으로 툭 쳤다.

바보야. 내일이면 알 수 있다니까.” 그러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거리면서, 이번에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미소를 내게 보냈다

 


 

브리짓과 헤어지고 나서 혼자 병실에 누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우리는 인공지능의 짓으로 여겨지는 공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었다. 파트너가 부른 알 수 없는 그룹의 도움으로 내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날 우리 이외에 두 개의 팀이 더 공격을 받았다. 그것이 AI가 한 짓인지 아니면 조직이 이야기하듯 테러리스트 데몰리션에서 가한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조직에서는 살아남은 우리를 심문 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모종의 집단이 조직 내에서 비밀리에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만 내가 알게 되었다.

 

며칠간, 정말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들이 내 주변에서 벌어졌다. 나는 그냥 내가 원하던 정보만, 진실만 조용히 꺼내어, 여기서 몰래 나가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너무도 많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고 그로 인해 몸에 깊은 상처도 생겼다. 더욱이 의도하지 않은 이런 엮임으로 인해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바뀔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캄캄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아마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동료를 오늘 만나지 않았는가. 어쩌면 세상은 내가 넘을 수 있는 만큼의 고난을 주거나, 혼자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에는 같이 해결하라고, 좋은 동료를 슬쩍 내 옆에 끼워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닥쳐올 것들은 어찌되었든 결국 제시간을 맞춰 우리에게 오게 되어 있는 법. 지금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이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지금까지 확인된 것들을 순차적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가 이날 밤은 나도 모르게 일찍 잠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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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하는 나를 뒤에 두고 B, 자신의 방문을 여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내가 ‘B108xx’가 맞는지 슬쩍 물어보자 이 바보는 뭐지하는 표정으로 멍하게 나를 보다가 한 숨을 쉬면서 내가 모르는 번호로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방은 내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정에는 예의 그 화재경보기가 특유의 작고 파란 전구를 깜박거리며 지금 이 방은 화재로부터 안전하다고 알려주고 있었고, 출입문 방향으로 왼쪽 끝에 세워진 반사등과 천정의 백색 형광등도 우리가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방 중앙에서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신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을 구경하고 있는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B, 턱을 까딱이며 침대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저 처음으로 여자 방에 들어와서 좀 신기했을 따름이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더니 그녀가 자신의 오른 손 검지를 펴서 내 입에 댔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그 자세에서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재머를 꺼내어 스위치를 켰다. 전선이 일시적으로 합선되는 듯한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의 형광등이 잠시 깜박이다가 다시 밝아지자 그녀가 벽으로 다가가 천정에 달린 형광등과 구석에 세워져 있는 반사등, 두 개 모두와 연결된 스위치를 껐다.

파란색의 화재경보기 전구도 나간 듯, 코앞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방 안이 갑자기 암흑으로 바뀌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 어찌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카탈리스트 B그리고 보니 나는 아직 그녀의 진짜 이름도 모르고 있는데 - 동료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내게 하려고 자신의 방에 일부러 데려온 것 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왜 침대에 앉혀놓고 불까지 꺼야 하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초조해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둠속에서 깍지 낀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위아래로 열심히 교차시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앞에 서서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을 거야.”

상처 입은 사람을 이렇게 심하게 대하다니…….”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옷을 벗고 있는 듯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암흑으로 덮인 방으로 작고 약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다만 단둘이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내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 B는 계속 혼잣말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우리 카탈리스트 동료를 구해준 영웅이 깨어난 첫날은 좀 특별한 기억이 남도록 해야겠지?”

 

그 말을 듣고 나는 더욱 세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눈을 떠서는 안 된다, 오늘의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되뇌었다. 그런 상태로 몇 초의 시간이 지나자, 약하지만 노란색 빛이 질끈 감은 내 눈꺼풀을 살짝 통과하여 들어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며시 실눈을 뜨고 앞을 보았더니 그녀가 손가락 사이에 반지처럼 끼워둔 작은 플래시로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왼 손을 허리위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내 얼굴을 비추면서, 속옷만 입은 상태로, 무엇인가 재미난 장면을 보고 있다는 듯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내가 더듬거리면서 이런 상황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자 그녀가 정말 환하게, 소리 내지 않고, 웃으면서 왼손 검지를 이번엔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선 플래시를 반 쯤 열려있는 화장실 쪽을 비추었다.

 

반 쯤 열린 화장실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거기서 검은 실루엣의 키가 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B가 그 사람의 얼굴을 플래시로 비추자.......

M이었다! 내 파트너 마이클이 오른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으로 나를 보고선 빙긋 웃고 있었다.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그가 내 옆에 앉아서 왼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서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힘찬 악수를 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 M이 내 옆에, 온전한 하나의 몸으로, 머리에 전극이 꼽히지 않은 채로, 내 앞에 직접 와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을 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도 B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왼손 검지를 입에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 방은 도청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처음 도착해서 B가 재머의 스위치를 켠 것도, 내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몸짓을 보인 것도 모두 도청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자신의 왼 손을 펼쳐 거기에 쓰인 글자를 내게 보여주었다. 날짜와 만날 장소, 시간을 적은 글을 머릿속으로 외우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를 감은 오른쪽 손에는, 내가 괜찮은지,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이 써져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였다. 그가 내게 미안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신세를 진 쪽은 나였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마이클이다.

 

그렇게 나와 M이 말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듯, 출입문 쪽 구석에 서 있던 B가 다시 혼잣말을 했다.

“J. 상의 좀 빨리 벗을 수 없어? 시간만 끌고 있잖아.”

나와 마이클은 뜨거운 포옹을 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생사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어떻게든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면서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 느낌을 그도 받았는지 내 등에도 따뜻한 무언가가 떨어지며 젖어들고 있었다.


 


한참을 그런 모습으로 있었던 듯, 구석에 있던 B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손 너무 오래 한자리에만 있는 것 아니야? 거기가 아니라니까.”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붕대가 감긴 내 오른쪽 허벅지를 강하게 손으로 잡았다.

내가 비명을 내 장담하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때 불시에 그런 공격을 받으면 그 누구라도 입에서 아픈 소리가 자동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지르자 그녀가 능청스럽게, “어머 내가 너무 세게 쥐었나 봐. 상처에서 피가 나네. 오늘은 안 되겠는걸.” 하면서 마이클을 나와 따로 떼어놓았다. 마이클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다시 화장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 한 후에 나는 절뚝거리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방 안에서 밖을 살피던 B, 이번에는 좀 미안했던지, 피가 베인 내 오른쪽 다리의 붕대를 한번 쳐다본 다음, 나를 향해 한 번 혀를 내밀고 살짝 윙크를 하고서는 꽝소리와 함께 문을 세게 닫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이날 있었던 사고 - 내 오른쪽 다리의 상처가 벌어진 것 - 에 대해 B에게 따질 기회가 있었다. B가 말하길, 그날 자신은 속옷만 입고선 혼자 문에 기대어 있었는데, 웬걸. 자신은 거들떠도 안 보고 남정네 둘이서만 껴안고 있는 장면이 너무 괘씸했었다고 - 식당에서 윗옷 단추만 하나 풀어도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이 부분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다) 자신으로서는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면서, 그날은 정말 미안했다고,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끅끅 웃으면서 내게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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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침대에 걸터앉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동료들이 두고 간 꽃과 쪽지들이 아직도 그 자리 그대로 나를 쳐다보면서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은 아무것도 못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생각해 보자고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서 말해보았다. 그러나 이 조용한 병실에서 혼자 앉아서 변명 같은 말을 해본들 우울한 기분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살아남기 위해 혼자서 판단하고 살아있기 위해 홀로 움직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와 팀을 이루어 같이 일을 해본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만일 마이클이 없었더라면, 이전처럼 나 혼자 일을 처리했었더라면, 나는 오늘 이렇게 살아서 숨 쉬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조직에서 동료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일들로 부딪기면서, 혼자서는 힘든 일들도 그들과 같이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그들에게 조금 더 의지할수록, 그리고 그런 나를 그들이 조금 더 믿고 따라줄수록, 과거 단독으로 활동하던 나로서는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과실들이 내 손 가까이 닫는 것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어쩌면 나는 마이클이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행동을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어떠한 이유가 있든, 과거 내가 속했던 세계의 방식으로 이해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생명을 빚졌다. 그리고 받은 것이 있다면 그 배로 주어야 하는 것이 과거 내 삶의 규칙이다.

조용한 병실에서 이런 생각들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었는데 빈 위장에서 뭔가를 먹여달라는 듯이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 일단 지금은 배부터 채우자.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식당의 미닫이문을 열었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동료들이 식당 한 곳에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가까이 있던 동료가 가벼운 포옹을 하고는 테이블 한 가운데로 나를 부축하고 의자에 앉혔다.

차가운 물과 스프 한 접시를 테이블에 두고 그들은 서로 말없이 내 얼굴과 다친 상처만 보고 있었다. 직접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그들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 살아 돌아와 줘서 정말 다행이다. 나도 비록 몸에 구멍이 몇 개 났지만, 그럭저럭 하나의 몸뚱이로 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뻤다. 다시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었다. 잠깐 숨을 고르고 난 후에, 나는 먼저 마이클의 상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자네를 수술실까지 업고 온 게 M이였어.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업고 뛰더라고.” ‘K’가 계속 이야기 했다.

네 상처도 심했지만 M의 오른 쪽 팔도 위험했대. 시간이 더 지체되었더라면 잘라야 했을 거라고.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았는지 그날 본 이후로는 아직까지 얼굴을 보지 못했어.”

그러면서,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의 사건과 오늘 있었던 취조의 내용들을 하나씩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오두막에 들어가서 잔뜩 긴장한 채로 처음 대면했던 인공지능과의 대화와 도발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삭제되기 전에 날아온 대못에 M이 다친 장면에서 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놀라워했으며, 가슴에 구멍이 난 상태로 재머를 던진 장면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해 주었다. 이후의 일들은 심문과정에서 답변했던 내용을 그대로 알려주었다아직 M과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남아 있어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재머의 검은 구멍, 우리 조직의 모토인 ‘Be the Black’이 바로 우리들의 위치추적과 연관되어 있다는 나의 추론은 알려야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명령을 받고 출동해야 할 팀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재머와 블랙이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카탈리스트 ‘B’가 내 맞은편에 앉은 ‘K’를 밀어내고, 의자를 거꾸로 돌려서 앉은 다음, 오른 손으로 턱을 괴고선 나를 쳐다봤다.

헤이, J”

안녕, B”

B가 내 가슴에 감긴 붕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건강해 보이네.”

덕분에.” 라고 내가 대답하자 맘에 안 드는 듯 그녀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나는 B와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다. 입사 후보자로서 같이 교육을 받을 때, 내가 식당에서 B에게 살짝 목례 인사를 했는데 그때 B가 콧방귀를 끼듯 하고 그냥 가버린 이후로, 나는 우리 사이에 친밀감이란 단어는 각자 따로 놀자는 의미로 여겼다. 그런 그녀가 마이클의 메시지를 쪽지로 내게 전달했을 때에는 좀 놀랬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둘이 모종의 팀으로 같이 움직인다니, 그것도 비밀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 조직에서.

내 쪽지는 받았지?” 그녀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 잘 받았어. 고마워.” 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녀가 다시 인상을 쓴다. 이번엔 이마에 주름도 잡혔다.

그럼 가자, 내 방에

 

B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식당에는 우워하는 놀라움의 감탄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있자, B가 식탁을 뛰어넘어 내 오른쪽 겨드랑이에 자신의 어께를 넣어 나를 부축하듯 일으켜 세우고는 문 쪽으로 같이 걸어갔다.

주변의 동료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휘파람을 불면서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쥔 손을 연신 돌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를 문 밖으로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한 B, 그날 기어코 자신의 숙소인 W012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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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J, 프로토콜 여섯 번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죠? 누가 이야기 해 주었나요?”

 

마이크 앞에 있는 모니터에 얼굴이 가려져서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목소리로 보아 중년을 넘은 듯한 여자 목소리였다. 흰색 가운을 걸치고 있는 상의의 절반만 취조실 반대편의 유리창을 통해 보여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라이센스가 있는 의사이거나 그에 준하는 연구원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프로토콜의 여섯 번째 항목이라니? 지금까지는 인사 담당자 Z가 나를 놀리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들은 것 자체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조차 내게 물어볼 정도라면 정말 여섯 번째 항목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것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간다.

내가 뜻밖의 질문에 당황해 하는 상태가 모니터에 수치로 나오는지 검사관들의 입 꼬리가 올라가 있다. 이제야 분석할 만한 데이터가 나왔다는 듯 분주해진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목적이 질문에 대한 내 답보다는 내 정적인 상태를 흔들어 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 번 헛기침을 한 후에 나는 진실을 말했다. 프로토콜의 여섯 번째 항목이 무엇인지 나는 그 내용을 모른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오히려 되물었다.

 

“J. 검사관들에 대한 질문은 금지되어 있다. 방금 내용은 질문과 답을 기록에서 삭제하도록.” 처음 봤을 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콧수염이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그리고선 내 자세가 삐딱하다는 둥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하면서 회사 직원이면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답변을 하라고 내게 성을 내었다. 그리고는 재머에 쓰여 있는 ‘Be the Black’이 무슨 뜻인지 아냐면서, 우리는 암흑의 암살자가 되어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는데 너는 첫 임무부터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등의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가 침을 튀기며 던지는 공격적인 말을 편안한 자세로 왼쪽 귀로 들은 후, 모조리 오른 쪽 귀로 빼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설이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 그렇다. Be the Black! 무선재머!

, AI가 우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휴대용 무선재머! 그것을 켜는 순간, 그 주변 약 10미터 이내에 있는 무선기기는 모두 정지된다. 활성화된 무선네트를 표시한 지도를 모니터에 펼쳐놓고 보면 무선망이 끊겨진 부분은 까만 원으로 나타날 것이다. Be the Black, 깜장 옷을 입은 위대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재머를 사용하는 즉시 우리는 지도에 하나의 검은 점(black dot)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을 활용하면 닥터와 카탈리스트가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훤히 볼 수 있다 이 위치정보는 조직의 임원만이 아니라 네트에 접근이 가능한 인공지능 또한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적대적인 성격이라면 우리 멤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적이 된다.

조직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관리자들의 지적능력은 좀 의심스러운 수준이기는 하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분야의 전문가급 이상이었다.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나도 생각해 낼 수 있는 보안 구멍을 그들이 쉽게 놓쳤을 리는 없다.

, 이들은 그 중요한 정보를 우리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공유하면서 이번처럼 예상된 사고가 터지자 자신들은 모르는 척 얼굴에 철판을 깔고선, 이런 요식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우리 팀이 이런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을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왔다.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조직에 충성하도록 서약서를 썼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들이 우리의 목숨을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와 마이클은 조직이 지시하는 일을 하다가 진짜 죽을 뻔 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관리들이 고의를 갖고 혹은 그들의 무능함 때문에 우리 말단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내 분노에 따라 측정기의 바늘이 춤을 추고 있는 듯, 기계를 지켜보고 있던 콧수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다시 조사를 시작한다고 말하면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래, 도착해서 어떻게 했다고?”

마음을 다시 진정시켜야 했다. 앞으로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나뿐만 아니라 파트너의 목숨도 위험하게 할 수 있다. 지금은 나를 구해준 그를 위해서라도 내가 침착해야 한다, 차분해져야 한다.

 


 

몇 시간을 더 강도 높게 심문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이클이 우리가 검사했던 AI와의 대화(단말 접속 로그)를 삭제했다고 카탈리스트 ‘B’를 통해 내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심적 부담감 없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소리도 지르고, 협박도 해 보았지만(심지어 내가 테러리스트와 접촉한 증거가 있다고 어떤 검사관이 종이를 흔들면서 내게 겁을 줬지만 나중에 그것이 백지임이 들통 나자 콧수염이 경비를 불러 그 사람을 방에서 쫓아냈다) 내게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결국 그날의 심문을 마치겠다고 선언했다.

방을 나가면서 처음 나를 데리고 왔던 의사가 휠체어를 가지고 왔지만, 나는 거부했다. 이제는 조직이 주는 편의는 작은 의자 하나라도 받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지금은 좀, 나의 두 다리로 직접 걷고 싶었다.

절뚝거리며 병실로 걸어가는 중에 의사가 심문과정을 잘 견디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이제 의심이 풀렸으니 더 이상의 구속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좋은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병실에 도착해서 문을 닫기 전에 의사에게 식사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며칠 동안 수액만 맞았더니 너무 배가 고프다고.

의사는 약간의 식사는 나쁘지 않다고, 웃으면서 잘 쉬라고 문을 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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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라이센스를 가진 진짜 의사들이 인공지능에게 정신적으로 감화, 혹은 유린당한 이후부터 조직은 다시는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규 직원들에 대한 새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물론 채용 과정에서의 압박면접을 통해 미리 정신력 강화가 되어있는 지원자들만을 추려내기도 했지만,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따로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어떤 AI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개인의 비밀을 캐내는 데에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개인 정보를 바탕으로 도발적인 메시지를 닥터에게 던지고 그 사람의 맥박과 체온, 답을 하는 어투의 변화, 그리고 흘리는 땀의 양 등을 감지기로 확인하면서, 자기가 던지는 메시지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너는 열아홉 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을 지렸지,]

[밤마다 옆집 누나의 침실을 몰래 봤잖아. 그러다가 나무에서 떨어져서는, 지금 엉덩이에 있는 박쥐 문신은 그때의 상처를 숨기기 위한 거잖아.]

혹은 심한 경우에는 마음속으로만 존재하던 이상형의 모습으로 나타나 닥터를 유혹하기도 했다.

조직은 이런 경우를 예방하기 위해 생체단말을 전면 배제하고 구형 터미널로만 접속하게 했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감시센서를 무력하게 하도록 항상 무선재머를 휴대하도록 했으며,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AI의 다른 형식의 공격에도 대항할 수 있도록 그 정신적 방어법을 새 교육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런 이유로, 지금 이 세 사람이 휠체어에 실린 나를 데리고 가는 장소, 취조실에 있는 거짓말 탐지기 정도로는 내 안에 있는 진실을 꺼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하늘 높은 곳을 비행하고 있는 비행기의 문을 열고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밀어버리겠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협박을 하지만, 이미 내 등에는 그가 오래전에 친히 달아준 낙하산이 달려있는 것과 같다.

이런 심리적 압박을 받을 때 사용하는 나의 무기는 (뭐 사실 도시의 바닥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거나 옆집 아줌마의 속옷 훔치기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거기서는 평범한 일상일 뿐) 귀로 흘리기를 쓴다. 왼쪽 귀로 질문이나 상황을 듣고 오른쪽 귀로 그 말을 그냥 흘리면서 입으로 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중간에서 간섭할 일이 없어서 내 몸 상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다만 미리 질문을 예상하고 있어야 하고, 질문에 대한 답도 미리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한 번 만들어두면 과거의 내 모습으로 나를 흔드는 식의 인신공격은 내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취조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한 것과 같이 구형 거짓말 탐지기가 중앙에 놓여있고 반대쪽에 유리로 된 칸막이에 두 명의 감시관이 기기를 확인하며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짓말 탐지기의 각종센서를 내 몸 여기저기에 연결한 후 기기 초기 값 설정을 위한 심문이 진행 되었다. 내 이름과 직위, 그리고 각종 잡다한 개인신상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탐지기 수치의 기본 값으로 설정한 후, 본격적으로 그날의 일에 대해서 그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도착 이후부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순서대로 이야기 해.”

나는 재머를 켜고 나서 오두막에 들어간 후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소상히 이야기 했다. 그들이 중간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면 그것 그대로 진실을 이야기 해 주었다.

물론 중간에 M이 자리를 비웠다던가 하는 불필요한 이야기는 빼 놓고.

인공지능 CA에 대한 검사를 완료하고 화면에 새로 나타난 인공지능의 도발적인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진행되자 그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어떤 말을 했나?”

다른 추가적인 이상행동은 없었나? 단 한 줄의 문장만 있었다고? M은 무슨 조치를 취했지?”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하고 있을 때, 어제의 그 콧수염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 어떻게 인공지능이 너희들의 위치를 알고선 시간에 딱 맞춰 오게 됐지?”

 

나는, 내가 답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아니라면 M에게 가서 진지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내가 그날 벌인 실수에 대해 이야기 했다. 처음 CA의 난쟁이 AI가 내게 했던 질문, 즉 몇 개의 질문을 할 것인지 물었을 때, 내가 108이라고 답을 한 것이 몇 대의 로봇들을 그 장소로 동원할지 시간을 계산 가능케 했다. 그리고 터미널의 위치는 AI가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답을 했다. 우리 말단들은 알 수 없고, 너희 관리직이 유출한 것이 아니라면 AI가 접속위치를 계산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모른다고.

 

거짓말 탐지기에 올라온 수치들을 확인하는 듯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던 검시관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콧수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생각에 잠긴 듯 한 손을 턱밑에 받치고서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그들도 궁금할 것이다. 그날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은 M과 나뿐이다. 둘 중 누구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고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고위직에서 누군가가 유출한 것이 틀림없다. 만일 AI가 구형단말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면 그것 그대로 큰 문제였다. 이제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고는 직원들을 단말이 있는 곳으로 보낼 수 없다는 말이니까. 어떤 이유이든 이미 설치되어 있는 단말을 모두 폐기하고 다시 위치를 바꿔 달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취조실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현재의 나로서는 거기까지 걱정해야 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이번 일에 M이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으며 M을 만나면 둘이서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할 필요는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취조실의 스피커를 통해 새로운 목소리가 내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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