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I. 전문 정신과 의사입니다 #24

 

  “당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잖아? 방해만 될 뿐이야.”

 

  내 가슴과 허벅지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캐롤라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것 그래그래, 브리짓과 마이클을 그것이라고 짧게 말해서 미안해. 그래, 미안하게도 당신에게는 그들의 구출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당신이 꼭 해야 할 일.”

  “오늘 여기까지 당신을 부른 이유, 그걸 해 줘. 우리 쪽 사람 누구를 좀 만나줘. 당장.”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그렇다. 난 오늘 이들 조직의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책임자를 만나 그()과 대화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M(마이클)은 자기가 속한 조직의 힘이라면,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어.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거든.”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M이 그렇게 웃을 때면 같은 남자인 나조차도 가슴이 뛰었다) 그가 손짓했다.

  “어쩌면 네가 찾는 그것에 내가, 우리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어렴풋이 느꼈겠지만, 우린 조직과 힘이 있어.” 그가 잠시 천정을 올려보고 나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린 선의(善意)가 있어. 그리고,”

  “그리고, 너로 말하자면.” 그가 다시 눈웃음을 지었다.

  “네가 같이한다면, 우리에겐 큰 힘이 될 거야.”

 

  하루 휴가를 내어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협상에 가까운 만남이 될 공산이 컸다. 이들이 내게서 원하는 것은 아마 내가 가진 그것일 터인데, 나는 이들이 그 대가로 내게 무엇을 제안할지가 궁금했다 - 그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M은 만남에서 내 안전을 보장했고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한 번 M이 속한 조직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결과는 그냥 재수 없는 휴가를 하루 보내는 것, 그뿐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건물에서 빠져나와 미리 준비된 차를 타고 개방된 도로를 달린다. 아직도 길 중간중간에는 검문 불응 차량의 타이어를 터뜨리기 위한 스파이크와 강철봉으로 봉쇄되어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제대로된 검문 한 번 받지 않고 줄곧 빠른 속도로 검문소를 통과하여 달릴 수 있었다. 안전 가옥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캐롤라인이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투명우의(비 올 때 입는 옷) 두 벌을 꺼내 나와 캐롤라인에게 입혔는데, 이것이 우리의 존재를 숨겨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원하게 속도를 내는 차 안에서, 캐롤라인이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래, 상처는 어때 조니?”

  나는 고개를 숙여 가슴과 허벅지 쪽을 쳐다보았다. 투명한 우의 안쪽의 셔츠와 청색의 바지는 아직도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곳에서 강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클로이가 제대로 치료한 것 같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 그럼 이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목적지까지는 꽤 멀어서 이렇게.” 그녀가 나와 클로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자신의 두 손가락으로 입을 꼬집듯 잡으며 오물거렸다.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는 영 불안하다고.”

  “궁금하지? 우리가 누구이고 뭘 하는 사람들인지 말야.” 캐롤라인이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우린 데몰리션은 아니야. 그렇다고 유니온은 더더욱 아니지.” 그녀가 단발을 쓸어 솜털이 부드럽게 숭숭 난 목덜미를 (난 신경 단말이 없다는 의미로) 내게 살짝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데몰리션이 아니었다라고는 말할 수 없고.”

  “그리고 유니온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껄끄럽지.”

  “무슨 의미죠? 알 수 없군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과거의 이야기. 과거에 한가닥하던 과격분자인 사람도 있고, 단말을 목에 차고 다니던 - 좀비 같던 인간들도 있다는 이야기지. 그러다가 지금은 이렇게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자신의 가슴에 대면서) 개과천선하거나, 혹은 인간성을 다시 찾은 사람들이라는 말이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 설명이 잘못됐나. 그러니까 나는, 아니 우리는...... 그러니까 말이야. 과거가 좀 있는 편이야, 나쁜. 하지만 지금은 그런 나쁜 일들은 안 하고 있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 우린 사람들을 돕고 있어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꽤나 큰 문제를 만들기는 하지만, 방금 클럽에서 있었던 일처럼 말이야 하지만 원론적으로 보자면, 우린 사람들,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캐롤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캐롤라인이 도와달라는 듯 클레이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자 클레이가 그녀의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은 데몰리션 출신들이 많아요. 물론 유니온이었던 사람들도 있구요.”

  “우리에게 살아온 배경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사람.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요.”

  “지금 우린 어떤 위협에 맞서고 있어요. 사람들, 그리고 이곳을 지키기 위해.”

  “사실, 오늘 클로이가 이 말을 하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당신을 만나 이야기하려고 했던 내용은 이것이에요. 위협. 모든 생명을 사라지게 할 위협에 대한 도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당신이 속한 조직 - D.D.T, 재밌는 이름이에요 - 회사는, 어떤 음모에 가담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알지 못했어요. 우린 그저 욕심 많은 회사의 자본축적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심각했어요.”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D.D.T, 정부, 아니 초정부적 존재와 거래하고 있어요. 지구의 자원, 생명체 전체를 말살할 수 있는 모종의 일들을 벌이고 있어요.”

  “그 음모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해요, 지금은. 하지만,”

  “조니, 듣기로는 당신이 열쇠라고 했어요. 우리 - ”

  여기까지 듣다가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컸는지 클로이가 잠시 말을 멈춘 후에 무릎 위에 반듯하게 모아둔 손을 펼쳐 손바닥을 한 번 쳐다본 후,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우리 지도자에 따르면, 당신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해답을 찾는 일에. 그리고, 그녀는 당신의......”

 

  “, 정말 깔끔한 설명인걸!”

  캐롤라인이 갑자기 두 손으로 손뼉을 쳤다.

  “상세한 내용은 말이야, 도착하면 직접 듣는 게 낫겠어.”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을. 우리 책임자가.”

 

  캐롤라인이 대화에 끼어든 탓인지 이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캐롤라인만이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음으로 보아 군가의 일종인 것처럼 들렸다. 가끔은 흥이 나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리듬을 타면서 다다다라고 가사 일부를 부르기도 했지만, 나와 클로이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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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단발로 짧게 머리를 자른 여성이 안전가옥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왔다. 노란색 운동복 차림에 작은 배낭을 어깨에 반쯤만 걸친 차림으로, 한여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손에는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클로이를 보자마자 그 여성은 안도의 미소와 함께 클로이를 뜨겁게 포옹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로이.”

클로이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며 다친 부위는 없는지, 클로이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갈색머리의 그녀가 나를 쳐다보면서 내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조니, 조니 타일러?”

 

그녀가 내민 손을 잡자 장갑을 통해서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게다가 가르마로 가려진 그녀의 오른쪽 눈 근처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레이저 포인터처럼 붉은 색 빛이 흐리게 잠깐 비쳤다가 사라지는 것도 보인다. 아마도 이 여성은 오른쪽 눈, 그리고 최소한 오른손은 본래의 자기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을 느꼈는지, 그녀가 단단하게 쥔 손에 점점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눈을 아래로 내려서 부여잡은 손을 슬쩍 한 번 보고는 위아래로 힘을 주지 않고 흔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자 내가 먼저 잡은 손을 놓았다 - 이때 그녀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작은 승리의 미소를.

 

이런 상황에 처음 얼굴을 맞대게 된 것이 매우 유감이지만....... 어쨌든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캐롤라인 베커라고 해요. 그런데......”

이봐요. 몸은 괜찮아요? 셔츠 앞부분이 붉은데. 배에서 피가 나는 것 아닌가요?”

고개를 숙여보니 그녀, 캐롤라인의 말 대로 내가 입고 있는 셔츠 앞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다. 다급히 셔츠 버튼을 몇 개 풀러 가슴 쪽을 보았다. 대못으로 구멍이 났던 오른쪽 가슴의 상처가 벌어져서 거기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클로이가 급히 옆으로 와서 상처를 살피더니, 괜찮다고 하는 내 말을 무시하고서, 어께를 잡아끌어서는 던지듯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캐롤라인이 자신이 매고 온 가방에서 의료용 킷으로 보이는 작은 상자를 클로이에게 주자 그녀가 바늘과 실을 들고 다시 구멍이 난 내 가슴의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내 상처에 바느질을 하면서, 클로이가 오늘 클럽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캐롤라인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네 말 대로라면, 일단 브리짓은 회사 안에 있다는 이야기네, 뭐 총상을 입기는 했어도.”

클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캐롤라인이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 그렇다면.......” 그녀가 그 말과 함께 하고 두 손으로 박수 소리를 내면서 소파에서 훌쩍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깜짝 놀란 클로이가 의료용 바늘로 내 가슴을 깊게 찌르는 바람에 내가 하는 소리를 내자 캐롤라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남자가 뭐 그런 것 갖고 호들갑이냐는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뛴 채 말을 계속했다.

아직 희망은 있네. 어떻게든 구해야겠지? 그 둘을 말이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방법은 있는가

 

잠깐, 미스터 타일러. 아니 조니라고 불러도 될까?” 

날 뭐라고 부르던 상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역겨운 표정의 ‘Z’라고 나를 부른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지금은 호칭 따위에 신경 쓸 시간조차 아깝다.

 

그래. 그럼 조니. 내 말을 잘 들어.”

두 사람을 구하고 싶지? 그렇다면 구조에서 당신은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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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커튼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급차와 경찰차 여러 대가 그 클럽 입구를 둘러싸듯이 진을 치고 있었고, 여러 명의 부상자와 사망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오가는 사람들을 계속 지켜보았지만 B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븐의 구멍으로 떨어질 때 들었던 그녀의 마지막 외침소리로 추정하자면 이 소동이 일어났을 때 그녀가 제일 먼저 체포되어 조직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창문에 반쯤 기대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클레이가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 옆에 서 있었다. 자신이 계속 확인을 하겠다면서 그녀가 얼른 옷부터 갈아입고 오라고 말을 했다.

화장실 한 구석에 있는 샤워기로 내 몸에 배기기 시작한 하수구의 냄새를 씻어내면서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정리했다.

 

꽤 오랫동안 하수구를 기어갔다고 생각했는데 클레이가 말한 안전가옥은 클럽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맨홀 뚜껑을 올리고 건물 옆에 있는 비상계단을 내려 건물의 3층으로 올라가자 클레이가 번호를 입력하고 방문을 열었다. 일인용 침대 하나와 책상과 소파 하나, 그리고 유선으로 연결된 전화기만이 그 방의 유일한 전자제품이었고 TV나 흔한 커피포트조차 그 방에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클레이가 자신과 내가 무사하게 안전가옥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듯한 전화를 어디론가 걸었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앞으로 한 시간 이내에 누군가가 도착할 것이며 그 사람만이 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고 말을 했다. 그녀가 속한 기관과 그곳에서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모두 알려 줄 것이라면서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내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말을 했었다.

 


 

샤워를 마치고 한쪽 구석에 곱게 개어져 있는 옷을 입어보았다. 몸에 약간 작은 듯 했지만 활동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창문 밖을 내다보던 클레이가 내게 말을 했다.

상황이 정리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 둘 씩 차들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그녀 옆에 서서 커튼을 조금 더 열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 말대로 아까 보았던 것 보다 지키고 있는 경찰과 군인 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경찰차 세 대만이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멀어져가는 마지막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서 창문에서 떨어져 소파에 앉아 정면에 걸린 그림을 쳐다보았다. 색색으로 칠해진 사각형들이 각각의 크기로 캔버스를 가득매운 그림을 잠시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지만, 무지개 색 사각형들이 잔영으로 남아 굳게 감은 내 눈 주위를 조롱하듯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느새 창가에 있던 클레이가 조용히 와서는 내 옆자리에 같이 앉았다. 우리 둘은 서로 말 없이 앞에 있는 그림만 쳐다보았다. 한참을 사각형들만 보고 있었더니 이윽고 클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이클은 내 옆집에 살던 친구였어요.”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말을 했다.

“B, 그러니까 브리짓은....... . 마이클이 병원에 있을 때 만난 사이이구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천정을 향해 길게 숨을 내쉰 후에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고가 났을 때……. .”

, 내가 그의 집에 갔을 때, 그는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의 양 손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내가 다가가서 그를 흔들어도 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죠, 마치 좀비처럼 자기 손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런 그를 기관에서 치료해 줬어요. 뇌에 삽입된 생체단말을 제거하고....... 그가 간절하게 그걸 제거하기를 원했거든요. 그리고……. 그는 기관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자의든 타의이든.”

마지막 말을 하면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기, 조니.”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기만의 사연이 있어요. 그리고 어쩌면, 그런 우연한 사건들이 모여 같은 목적을 가진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해요, 우리처럼. 그런데 뭐랄까, 우연이 너무 겹치면 그 사연들이 필연인 것 같단 말이에요. 오늘 일만해도 그래요. 예상치 않게 브리짓이 같이 오고 그리고 그 군인들........ 내 생각에 이번일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마치 당신을 일부러 끌어들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클레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을 세 번 노크하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누군가가 조용히 입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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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쪽으로.”

라이플을 양 손에 쥐고서 한 발짝씩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군인들을 본 클로이가 내 손을 잡고 비상계단이 있는 방향으로 잡아 당겼다. 군인들은 브리짓이 쓰러트린 가드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이미 클럽의 입구를 막고 있었고, 홀 중앙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그 군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브리짓의 어께를 클로이 쪽으로 한 손으로 밀면서 그녀에게 먼저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깐 기다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브리짓이 갑자기 자신의 피스톨을 꺼내어 내 오른 손에 쥐어주면서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해 달라면서 말을 했다.

난 같이 갈 수 없어. 날 쏘고 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겨냐고 그녀의 팔을 쳐내자 그녀가 총구를 자신의 배에 대고서는 절망적인 얼굴로 다시 내게 부탁을 했다.

조니, 마이클을 거기에 혼자 둘 수는 없어.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내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가 내 오른손에 걸려있는 방아쇠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브리짓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군인들이 총 소리가 난 우리 쪽을 돌아다보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무선재머를 켠 것처럼 실내의 전등이 깜박거리면서 일시에 모두 터져나갔다. 예상치 못한 어둠에 당황해하는 병사들이 총소리가 난 우리 방향으로 자신의 무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홀 안에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그 총에 맞은 듯 비명소리가 실내에 가득차자 여기저기서 도망가려는 사람들의 검은 형체를 향해서도 그 군인들이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공간의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브리짓의 상처를 확인하려고 그녀가 있는 위치 쪽으로 손을 뻗자 그녀가 내 손목을 꼭 쥐면서 이를 악문 채 이렇게 말을 했다.

조니, 약속해 줘. 반드시 우리를 구하러 오겠다고.”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세게 쥐면서 말을 했다. 반드시 너희들을 찾으러 가겠다고.

 

클로이가 서둘러야 한다면서 다시 나를 끌고 가듯 팔을 세게 당겼다. 브리짓의 상처가 걱정되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자 클로이가 그녀는 괜찮을 것이라면서 여기서 당신마저 잡히면 우리 모두가 위험해 진다면서 나를 다그쳤다.

탈출 장소로 잡았던 비상계단의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일련의 병사들이 그쪽으로도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클로이가 탈출로를 다른 방향으로 바꾸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린 채 칠흑처럼 어두운 중앙 홀을 기어서 지나 주방으로 생각되는 장소에 다다르자 그녀가 바닥 구석에 있는 오븐의 문을 열고 그 안에 나를 구겨 넣듯이 밀었다.

 

조니가 여기 있다.” 멀리서 브리짓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열린 오븐 바닥 밑으로 떨어졌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붕대를 감은 가슴 쪽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클로이가 내가 누워있던 장소 바로 옆으로 떨어지면서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떨어진 장소가 오븐에서 꽤나 낮은 위치에 있었는지 낙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클로이가 내 얼굴을 흔들면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어느 틈엔가 손에 작은 플래시를 들고서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계속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계속 가야해요.” 내가 눈을 뜨자 그녀가 서둘러야 한다면서 작은 배수관처럼 생긴 파이프 쪽으로 나를 먼저 밀어 넣었다. 역한 냄새가 나는 배수구를 최대한 빠르게 기어가면서도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꼬여버린 오늘 일진으로 차 안에서 내게 종일 짜증을 내던 브리짓이 내 손에 총을 쥐어준 채로 방아쇠를 당기면서 짓던 절망적인 그녀의 표정도, 조직에 몰래 들어와 이제는 그들 손에 자신의 목숨이 달린 마이클에 대한 걱정도, 내 미래의 계획들이나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아픈 상처들, 그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좁고 더러운 이 하수구의 썩는 냄새와 노란 플래시의 불빛 사이로 가끔 나타나는 작은 벌레들만이 갑자기 너무 싫어졌다. 내 앞을 가로막듯이 재빨리 기어가는 이 작은 벌레들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미웠다.

숨을 헐떡이며 기어가는 중에도 그런 생각들이 나자 입으로 작게 욕지기가 나왔다. 나는 너희들이 너무 싫다, 너희 작은 존재들을 모두 내 손가락으로 으깨서 없애고 싶다, 멸종할 때까지 내가 하나씩 너희들을 잡아 이 두 손으로 찢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기어가고 있는 내 모습을 뒤에서 보던 클로이가 조용히 내 발을 손으로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조니, 당신 탓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예요,”

 

나는 뒤를 돌아보고 그녀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내 탓이다. 파트너의 일도, 오늘 브리짓의 총상도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보고 기어가려고 했더니 그녀가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눈 가에 물기가 맺힌 듯이 조금 흐려진 눈망울을 한 채로 그녀가 나를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지금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도 그녀가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추억이 더 많고 더 진할 것이다. 그런 그녀도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나를 위해 이 위험한 탈출극을 감행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단순한 감정에 휘말려 어떻게든 화풀이할 대상만 찾으면서 내 감정의 바닥을 그녀에게 보이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을 내가 만들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자신을 책망하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한심한 내 자신의 모습을 비난하는 것은 뒤에 남은 자들을 구하고 난 이후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앞으로 가야 한다. 다행이도 또 한 명의 동료가 내 뒤에서 나를 향해 앞으로 가자고, 지금은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같이 앞으로 가야 한다고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그녀가 옳다. 지금은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야 한다.

바보 같은 생각에 꽉 막혀있던 나를 일깨워준 그녀를 향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그녀도 예전의 미소를 담아서 나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앞으로 계속 기어가자 점차 앞의 하수관이 넓어지더니, 얼마 후 일어서기에 충분한 공간이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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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약속장소로 같이 가자고 했더니 잠시 고민하던 B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M은 오늘 못 만나.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클럽으로 들어가기 전에 목발을 짚고 서서 뒤를 돌아봤다. 출발할 때 보였던 침울한 분위기에서 이제는 벗어난 듯 힘찬 걸음으로 내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B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면서, 지금과는 좀 다른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을 만났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도시의 최하층에서 살던 나 같은 사람이야 소속된 조직이 있는 것 자체에 감지덕지할 만한 일이지만 이 두 사람이 오랫동안 같이 살아갈 안식처라는 면에서 볼 때, 회사는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조직은 자신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직원에게는 자비 없는 감시와 처벌을 가했고, 그 의도가 어떠하든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진행한 일에 대해서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질게 대했다 - 만일 나중에라도 이 둘의 정체가 들통 난다면 조직은 배신자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조직과는 다르다고 B가 말한, 그들 공동체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원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직접 책임자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고 싶었다.


 


클럽의 문을 열자마자 실내를 집어삼킬 듯 울리는 음악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홀 한가운데서 가면을 쓰고 서로 몸을 비벼대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목발로 휘휘 저으면서 그나마 좀 조용한 구석으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M을 만나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궁금증을 풀 예정이었으나 회사의 윗선에서 그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꽤나 높은 위치에 있다는 조력자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고, B가 이야기 해 주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고 얼굴을 찡그린 채로 자동차 안에서 그렇게 말하는 B에게, M은 잘 대처하고 있을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해주었지만, 사실은 나도 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회사의 고위직들은 예상보다 오래 M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만일 그날 우리가 몰래 했던 일들 중에 하나라도 그들이 알게 된다면, 머릿속에 숨긴 비밀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의 두개골을 열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자들이다.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눈을 감고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앉아있는 의자 너머로 누군가가 술잔을 테이블로 탁탁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잔 할까요?”

검정색 비닐 같은 재질로 만든 고양이 가면을 쓴 여성이 건너편 의자에 앉아 나를 보면서 술잔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그 자리는 비어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다른 자리로 가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요? 내가 당신을 살렸는데 술도 한 잔 안 사나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고양이 가면을 쳐다봤다. 그제야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얼굴의 가면을 벗었다. 금발의 진한 미소를 가진 천사! 그녀였다. 오두막에서 나를 치료해주었던 낡은 줄무늬 남방을 입은 여자!

 

당신이 아는 얼굴이 나 밖에 없어서, 그래서 내가 나왔어요. 모르는 사람은 신용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들 집단에 속한 사람 중에 내가 얼굴을 아는 사람은 MB, 그리고 그날 나를 치료해 준 그녀뿐이다. M은 아직 잡혀있고, B는 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머리카락이 그날보다 좀 짧아진 것 같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더니 그녀가 웃으면서 좀 거추장스러워서라고 말을 받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그날 구해준 것에 대해서 내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으응.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인사는 마이클이 받아야 해요. 물론 이후에 서로 얼굴은 보았지요?” 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그날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언제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날 오두막 앞에서 마이클이 당신 이름을 알려 줬어요. 어떻게든 조니를 살려야 한다면서 필사적으로 당신의 생명을 구하려고 했었거든요 - 좋은 친구를 뒀어요, 조니.”

완전히 동의한다는 의미로 다시 큰 동작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를 하지 않았네요.” 그녀가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말 했다.

클로이, 클로이 모레츠(Chloe Moretz). 아는 사람들은 나를 로이라고 불러요.”

조니 타일러(Johnny Tyler)라고 내 이름과 성을 말하자, M과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니 타일러 좋은 이름이네요. 라면서 그녀가 멋진 미소를 내게 다시 보여주었다.

 

여기에 브리짓도 같이 왔다고 알고 있는지 물었더니 그녀가 놀라면서 브리짓은 어디에 있는지 내게 되물었다.

다른 볼 일이 있다고 어디론가 가더군요.”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약간 풀이 죽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클럽 입구에서 큰 소음이 났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가드와 클럽 안으로 무단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한 여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듯 입구에서 서로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여성의 목소리가 귀에 익다 싶었는데……, 브리짓이었다. 그녀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가드들을 주먹과 발을 써가며 하나씩 쓰러뜨리고 있었다. 힘찬 발길질로 덩치 큰 남자의 가랑이를 한 방 멋지게 먹인 것을 마지막으로 브리짓이 우리를 보고선 이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외치듯이 말을 했다.

 

큰일 났어. M이 삭제한 AI 대화내용을 조직이 복구했어. 지금 그들이 오고 있어, 조니. 빨리 도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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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런 상처로 어딜 돌아다니겠다는 거야? 난 허가 못하네.”

인사담당자 사무실에서 이십 분이 넘게 Z와 실랑이를 하고 있다. 내가 신청서 상단 오른쪽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는 상급자의 허가 싸인 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서류는 문제가 없음을 지적해도, 그는 그렇더라도,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알아, 알아, 그래. 거기 싸인이 있는 것은 나도 봤다고. 그래도 밖으로 보낼 것인지 말 것인지 최종 결정은 내가 하는 거야, 내꺼거든.” 특유의 히죽거리는 표정을 하면서 그가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일반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상대방 얼굴의 특정 부위를 처다 보며 이야기를 한다. 보통은 눈을 보면서 얼마나 내가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을 해가며 자신의 말을 이어가지만, 몇몇은 빨리 답을 알려달라는 듯 내 입을 보고,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잡담 형식이라면 내 눈과 귀, 혹은 코 주변과 같이 자기가 선호하는 부분을 보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인사담당자 Z는 말을 할 때에 내 얼굴 어느 한 곳에도 집중하지 않고 있다. Z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가 마치 내 얼굴 전체의 윤곽을 품평하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 ‘이 친구는 두개골 왼쪽이 짱구네. 이 녀석은 턱이 튀어나왔어. 집 진열장에 올려두기에는 적당치 않아.’

아마도 Z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 내 말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자기가 지껄이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것만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줄다리기를 Z와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인터폰에서 그를 호출하는 띠리링소리가 났다.

Z는 내가 보지 못하도록 뒤로 돌아서서 수화기를 왼손으로 막고는 연신 , 만 말하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 진행이 안 되었나 보다.

위에서 자네의 휴가를 허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

한 번 더 한숨을 쉬면서 내 신청서류에 반 쯤 싸인을 써내러 가던 그가, 또 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나를 보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노크소리와 함께 브리짓이 방문을 반쯤 열고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무슨 일이냐며 우리를 처다 보고 있었다.


, 위에서 그러라니까 보내긴 하겠는데....... 혼자는 안 되네. 알고 있지? 닥터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해. 규칙에 있다고. 둘은 한 팀으로 움직인다. 가더라도 카탈리스트와 같이 가.”


 


 

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보다. Z의 방에서 나오고서부터 브리짓은 굉장히 화가 난 듯 내게 이유 없이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미리 맞춰놓은 목적지까지 달리는 차 안에서도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만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찌 오늘도 일진이 잘 풀릴 것 같지가 않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나도 팔짱을 끼고 그녀를 보지 않도록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나는 닥터가 되고 싶었어.” 의자에 기댄 채 고개만 돌려서 그녀를 바라봤다.

마지막 시험에서 난 한 색깔의 스위치만 눌렀다고. 모니터에서 뭐라고 떠들던 간에 그냥 하나만 눌렀어. 그러면 낙제라도 받아서 닥터가 될 줄 알았다고.”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멀뚱히 처다만 보고 있자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팀에서는 내가 예전에 있던 곳의 사람들은 닥터와 카탈리스트 둘 다를 원했어. 마이클은 원래 뛰어난 너도 알지? - 인재였으니까 당연히 카탈리스트. 나는 닥터로 부임 받아 같이 한 팀으로 움직일 예정이었다고. 그런데 내가 망쳤어. 나 때문에 마이클이 부상을 입고 취조도 받았다고. 어떻게든 닥터가 되려고 했는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이런 말을 하는 그녀를 보고서야 이 어색한 상황이 이해가 갔다. B, 브리짓은 마이클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여기 이 조직에 오기 전부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부터, 마이클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 그래서 나를 그렇게 모질게 대했구나. 이제 이해가 된다. 그녀는 마이클이 다치게 된 것을 내 탓으로, 그리고, 일정부분은 그녀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만일 그 자리에 자기가 있었더라면 마이클이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생각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공지능의 인식코드 변경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녀가 마이클의 파트너였다면, 어쩌면, 아무도 부상을 당하지 않고서 그 자리에서 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의도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미리 대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꼬여버린 내 미래에 대해서 작게나마 이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내 삶에, 내가 잘 설계해 둔 시나리오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모든 것들을 꼬이게 만들어버린 이 친구들을 탓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히려 내가 불청객 이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한 남자가 파트너랍시고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의 계획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런 나를 구하기 위해 마이클은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서 하늘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 미안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다시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그녀가 나를 보면서 다시 말을 했다.

네 탓을 하는 것은 아니야. 상황만 보자면 그때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더 심각해 질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조용히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더니 어색한 듯 그녀가 얼굴을 창가 쪽으로 돌리고 손으로 눈 주변을 비볐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바뀌기 위해, 나는 그녀가 말한 그 마지막 테스트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내용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 마지막 검사 말이야. 네가 하나의 스위치만 눌렀다면, 내 생각에는, 너는 카탈리스트 순위에 일등으로 올라갔을 거야.”

그녀가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 테스트는 정확성을 검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핵심은 삼초 - 그 삼초 안에 너는 반드시 결정을 해야 한다 그것이 핵심이라고 봐.”

다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녀를 위해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조직은 이런 사람을 원하는 것 같아 - 온갖 방해물들이 네 주변을 복잡하게 만들 때,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너는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 이렇게 본다면 모니터에 표시된 색과 키보드 버튼의 색이 반드시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어 무지개 색은 그냥 판단에 혼돈을 주어 버튼을 좀 더 늦게 누르도록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이야기이지. 매 화면마다 나와 있던 주의사항의 내용처럼 삼초 내에. 혹은 누가 이런 내용을 먼저 눈치 채고 삼초보다 빠르게 버튼을 누르느냐, 이것이 핵심이거든.”

 

그걸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 그녀가 놀란 듯 입을 반쯤 벌리고선 내게 물었다.

문제를 세 개 정도 풀고 나서야 알았어. 화면과 키보드에 덧칠된 색은 가짜다. 핵심은 정해진 시간 내에 뭔가를 누를 것. 그런 의미에서, 카탈리스트가 된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 나보다 먼저 이 시험의 핵심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아니면 너처럼 하나만 계속 눌렀든가.” 내가 짓궂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자 그녀가 다시 예전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해서는 나를 째려봤다.

이후,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조직에서 있었던 자잘한 사건사고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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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혼자 병실에서 눈을 붙인 후 아침 무렵이 되자 배가 너무 고팠다. 어젯밤에 있었던 ‘B’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한 술도 뜨지 못한 채로 식당 테이블에 그대로 두고 온 고기스프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병실에 있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면서 식당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몇 명의 동료들이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가 내가 식당입구에 서 있자 모두들 시간이 정지된 듯 그 자세 그대로 조용히 나를 쳐다봤다.

‘K’가 어제처럼 얼른 나를 중앙 테이블에 앉히고는 번개처럼 빠르게 먹을 것들을 스테인리스 식기에 담아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그녀, ‘B’가 어제 했던 것처럼 의자를 거꾸로 돌려 앉은 다음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어제 어땠어?”


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조용히 빨갛게 물든 내 오른쪽 허벅지의 붕대를 슬쩍 그에게 보여주었다. ‘우어하는 소리가 이번에도 식당에 길게 울려 퍼졌다.

그때 누군가가 나타난 듯 내 주변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던 동료들이 쏜살같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B가 자기 식기를 들고서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오고 있었다.

B는 어제 밤처럼 내 맞은편 자리에 식기를 탁 놓고 앉아서는 벌리고 있는 내 허벅지 쪽을 바라봤다. 이제는 분홍색으로 변한 붕대를 재확인하듯 쳐다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본 나는, 얼른 다리를 오므렸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부리나케 식사를 마친 후에, 건물 밖으로 나가 그녀와 둘이서 산책을 하듯 같이 걸었다.

 

이번에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니 그녀가 다시 입에 손을 대고 내 환자복 안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어서 반쯤 타버린 얇은 금속판을 꺼내고선, 발로 밟아 완전히 두 동강을 냈다.

이후 자신을 브리짓(Bridget)이라고 소개한 BM과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나에게 물었다. 여기 이 조직에서 마이클을 처음 만났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둘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줄 알았어. 내가 아는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거든.” 어떤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아니라는 듯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 대화 후부터 그녀는 내가 병실에서 잠들어 있었던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이야기 해주었다. 사고가 난 그날 총 열 개 팀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일곱 개 팀은 제시간에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세 개 팀은 연락이 끊겼다. 긴급 신호를 받은 조직에서 급히 구조팀을 보냈지만 우리를 제외한 두 개 팀의 행방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몇몇 핏자국이 남아 있어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만 알 뿐 네 사람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직원의 실종으로 초조해선 조직이 그런 이유로 살아남은 우리 두 사람에게 강도 높은 심문을 했을 것이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나는 오두막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모두 B에게 이야기했다. M이 중간에 자리를 비운 것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를 치료해 준 것 모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B는 내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라고 생각하고서 나는 지금까지 미뤄두었던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너희들은 누구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산책 길 한가운데 멈춰 서서, 브리짓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기다란 측정자를 내 몸 여기저기에 대어보면서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재어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답을 했다. 내일이면 마이클과 만날 수 있으니 그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이것 하나만은 꼭 알아야겠다고, 나를 두고 한 걸음 앞서 걸어가려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제 밤에 마이클과 네 방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조력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꽤나 삼엄한 경비를 뚫고서 그를 빼올 수 있다는 것은 그 조력자가 우리조직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만 말해 달라.

그녀가 이번에는 어제의 그 멍청이를 보고 있는 표정(이 바보는 뭐지)을 하고서는 내 가슴을 손으로 툭 쳤다.

바보야. 내일이면 알 수 있다니까.” 그러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거리면서, 이번에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미소를 내게 보냈다

 


 

브리짓과 헤어지고 나서 혼자 병실에 누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우리는 인공지능의 짓으로 여겨지는 공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었다. 파트너가 부른 알 수 없는 그룹의 도움으로 내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날 우리 이외에 두 개의 팀이 더 공격을 받았다. 그것이 AI가 한 짓인지 아니면 조직이 이야기하듯 테러리스트 데몰리션에서 가한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조직에서는 살아남은 우리를 심문 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모종의 집단이 조직 내에서 비밀리에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만 내가 알게 되었다.

 

며칠간, 정말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들이 내 주변에서 벌어졌다. 나는 그냥 내가 원하던 정보만, 진실만 조용히 꺼내어, 여기서 몰래 나가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너무도 많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고 그로 인해 몸에 깊은 상처도 생겼다. 더욱이 의도하지 않은 이런 엮임으로 인해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바뀔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캄캄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아마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동료를 오늘 만나지 않았는가. 어쩌면 세상은 내가 넘을 수 있는 만큼의 고난을 주거나, 혼자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에는 같이 해결하라고, 좋은 동료를 슬쩍 내 옆에 끼워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닥쳐올 것들은 어찌되었든 결국 제시간을 맞춰 우리에게 오게 되어 있는 법. 지금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이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지금까지 확인된 것들을 순차적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가 이날 밤은 나도 모르게 일찍 잠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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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하는 나를 뒤에 두고 B, 자신의 방문을 여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내가 ‘B108xx’가 맞는지 슬쩍 물어보자 이 바보는 뭐지하는 표정으로 멍하게 나를 보다가 한 숨을 쉬면서 내가 모르는 번호로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방은 내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정에는 예의 그 화재경보기가 특유의 작고 파란 전구를 깜박거리며 지금 이 방은 화재로부터 안전하다고 알려주고 있었고, 출입문 방향으로 왼쪽 끝에 세워진 반사등과 천정의 백색 형광등도 우리가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방 중앙에서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신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을 구경하고 있는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B, 턱을 까딱이며 침대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저 처음으로 여자 방에 들어와서 좀 신기했을 따름이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더니 그녀가 자신의 오른 손 검지를 펴서 내 입에 댔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그 자세에서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재머를 꺼내어 스위치를 켰다. 전선이 일시적으로 합선되는 듯한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의 형광등이 잠시 깜박이다가 다시 밝아지자 그녀가 벽으로 다가가 천정에 달린 형광등과 구석에 세워져 있는 반사등, 두 개 모두와 연결된 스위치를 껐다.

파란색의 화재경보기 전구도 나간 듯, 코앞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방 안이 갑자기 암흑으로 바뀌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 어찌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카탈리스트 B그리고 보니 나는 아직 그녀의 진짜 이름도 모르고 있는데 - 동료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내게 하려고 자신의 방에 일부러 데려온 것 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왜 침대에 앉혀놓고 불까지 꺼야 하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초조해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둠속에서 깍지 낀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위아래로 열심히 교차시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앞에 서서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을 거야.”

상처 입은 사람을 이렇게 심하게 대하다니…….”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옷을 벗고 있는 듯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암흑으로 덮인 방으로 작고 약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다만 단둘이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내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 B는 계속 혼잣말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우리 카탈리스트 동료를 구해준 영웅이 깨어난 첫날은 좀 특별한 기억이 남도록 해야겠지?”

 

그 말을 듣고 나는 더욱 세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눈을 떠서는 안 된다, 오늘의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되뇌었다. 그런 상태로 몇 초의 시간이 지나자, 약하지만 노란색 빛이 질끈 감은 내 눈꺼풀을 살짝 통과하여 들어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며시 실눈을 뜨고 앞을 보았더니 그녀가 손가락 사이에 반지처럼 끼워둔 작은 플래시로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왼 손을 허리위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내 얼굴을 비추면서, 속옷만 입은 상태로, 무엇인가 재미난 장면을 보고 있다는 듯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내가 더듬거리면서 이런 상황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자 그녀가 정말 환하게, 소리 내지 않고, 웃으면서 왼손 검지를 이번엔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선 플래시를 반 쯤 열려있는 화장실 쪽을 비추었다.

 

반 쯤 열린 화장실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거기서 검은 실루엣의 키가 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B가 그 사람의 얼굴을 플래시로 비추자.......

M이었다! 내 파트너 마이클이 오른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으로 나를 보고선 빙긋 웃고 있었다.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그가 내 옆에 앉아서 왼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서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힘찬 악수를 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 M이 내 옆에, 온전한 하나의 몸으로, 머리에 전극이 꼽히지 않은 채로, 내 앞에 직접 와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을 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도 B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왼손 검지를 입에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 방은 도청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처음 도착해서 B가 재머의 스위치를 켠 것도, 내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몸짓을 보인 것도 모두 도청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자신의 왼 손을 펼쳐 거기에 쓰인 글자를 내게 보여주었다. 날짜와 만날 장소, 시간을 적은 글을 머릿속으로 외우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를 감은 오른쪽 손에는, 내가 괜찮은지,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이 써져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였다. 그가 내게 미안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신세를 진 쪽은 나였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마이클이다.

 

그렇게 나와 M이 말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듯, 출입문 쪽 구석에 서 있던 B가 다시 혼잣말을 했다.

“J. 상의 좀 빨리 벗을 수 없어? 시간만 끌고 있잖아.”

나와 마이클은 뜨거운 포옹을 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생사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어떻게든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면서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 느낌을 그도 받았는지 내 등에도 따뜻한 무언가가 떨어지며 젖어들고 있었다.


 


한참을 그런 모습으로 있었던 듯, 구석에 있던 B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손 너무 오래 한자리에만 있는 것 아니야? 거기가 아니라니까.”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붕대가 감긴 내 오른쪽 허벅지를 강하게 손으로 잡았다.

내가 비명을 내 장담하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때 불시에 그런 공격을 받으면 그 누구라도 입에서 아픈 소리가 자동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지르자 그녀가 능청스럽게, “어머 내가 너무 세게 쥐었나 봐. 상처에서 피가 나네. 오늘은 안 되겠는걸.” 하면서 마이클을 나와 따로 떼어놓았다. 마이클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다시 화장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 한 후에 나는 절뚝거리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방 안에서 밖을 살피던 B, 이번에는 좀 미안했던지, 피가 베인 내 오른쪽 다리의 붕대를 한번 쳐다본 다음, 나를 향해 한 번 혀를 내밀고 살짝 윙크를 하고서는 꽝소리와 함께 문을 세게 닫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이날 있었던 사고 - 내 오른쪽 다리의 상처가 벌어진 것 - 에 대해 B에게 따질 기회가 있었다. B가 말하길, 그날 자신은 속옷만 입고선 혼자 문에 기대어 있었는데, 웬걸. 자신은 거들떠도 안 보고 남정네 둘이서만 껴안고 있는 장면이 너무 괘씸했었다고 - 식당에서 윗옷 단추만 하나 풀어도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이 부분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다) 자신으로서는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면서, 그날은 정말 미안했다고,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끅끅 웃으면서 내게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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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침대에 걸터앉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동료들이 두고 간 꽃과 쪽지들이 아직도 그 자리 그대로 나를 쳐다보면서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은 아무것도 못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생각해 보자고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서 말해보았다. 그러나 이 조용한 병실에서 혼자 앉아서 변명 같은 말을 해본들 우울한 기분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살아남기 위해 혼자서 판단하고 살아있기 위해 홀로 움직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와 팀을 이루어 같이 일을 해본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만일 마이클이 없었더라면, 이전처럼 나 혼자 일을 처리했었더라면, 나는 오늘 이렇게 살아서 숨 쉬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조직에서 동료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일들로 부딪기면서, 혼자서는 힘든 일들도 그들과 같이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그들에게 조금 더 의지할수록, 그리고 그런 나를 그들이 조금 더 믿고 따라줄수록, 과거 단독으로 활동하던 나로서는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과실들이 내 손 가까이 닫는 것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어쩌면 나는 마이클이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행동을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어떠한 이유가 있든, 과거 내가 속했던 세계의 방식으로 이해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생명을 빚졌다. 그리고 받은 것이 있다면 그 배로 주어야 하는 것이 과거 내 삶의 규칙이다.

조용한 병실에서 이런 생각들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었는데 빈 위장에서 뭔가를 먹여달라는 듯이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 일단 지금은 배부터 채우자.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식당의 미닫이문을 열었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동료들이 식당 한 곳에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가까이 있던 동료가 가벼운 포옹을 하고는 테이블 한 가운데로 나를 부축하고 의자에 앉혔다.

차가운 물과 스프 한 접시를 테이블에 두고 그들은 서로 말없이 내 얼굴과 다친 상처만 보고 있었다. 직접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그들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 살아 돌아와 줘서 정말 다행이다. 나도 비록 몸에 구멍이 몇 개 났지만, 그럭저럭 하나의 몸뚱이로 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뻤다. 다시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었다. 잠깐 숨을 고르고 난 후에, 나는 먼저 마이클의 상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자네를 수술실까지 업고 온 게 M이였어.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업고 뛰더라고.” ‘K’가 계속 이야기 했다.

네 상처도 심했지만 M의 오른 쪽 팔도 위험했대. 시간이 더 지체되었더라면 잘라야 했을 거라고.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았는지 그날 본 이후로는 아직까지 얼굴을 보지 못했어.”

그러면서,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의 사건과 오늘 있었던 취조의 내용들을 하나씩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오두막에 들어가서 잔뜩 긴장한 채로 처음 대면했던 인공지능과의 대화와 도발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삭제되기 전에 날아온 대못에 M이 다친 장면에서 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놀라워했으며, 가슴에 구멍이 난 상태로 재머를 던진 장면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해 주었다. 이후의 일들은 심문과정에서 답변했던 내용을 그대로 알려주었다아직 M과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남아 있어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재머의 검은 구멍, 우리 조직의 모토인 ‘Be the Black’이 바로 우리들의 위치추적과 연관되어 있다는 나의 추론은 알려야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명령을 받고 출동해야 할 팀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재머와 블랙이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카탈리스트 ‘B’가 내 맞은편에 앉은 ‘K’를 밀어내고, 의자를 거꾸로 돌려서 앉은 다음, 오른 손으로 턱을 괴고선 나를 쳐다봤다.

헤이, J”

안녕, B”

B가 내 가슴에 감긴 붕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건강해 보이네.”

덕분에.” 라고 내가 대답하자 맘에 안 드는 듯 그녀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나는 B와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다. 입사 후보자로서 같이 교육을 받을 때, 내가 식당에서 B에게 살짝 목례 인사를 했는데 그때 B가 콧방귀를 끼듯 하고 그냥 가버린 이후로, 나는 우리 사이에 친밀감이란 단어는 각자 따로 놀자는 의미로 여겼다. 그런 그녀가 마이클의 메시지를 쪽지로 내게 전달했을 때에는 좀 놀랬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둘이 모종의 팀으로 같이 움직인다니, 그것도 비밀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 조직에서.

내 쪽지는 받았지?” 그녀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 잘 받았어. 고마워.” 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녀가 다시 인상을 쓴다. 이번엔 이마에 주름도 잡혔다.

그럼 가자, 내 방에

 

B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식당에는 우워하는 놀라움의 감탄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있자, B가 식탁을 뛰어넘어 내 오른쪽 겨드랑이에 자신의 어께를 넣어 나를 부축하듯 일으켜 세우고는 문 쪽으로 같이 걸어갔다.

주변의 동료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휘파람을 불면서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쥔 손을 연신 돌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를 문 밖으로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한 B, 그날 기어코 자신의 숙소인 W012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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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J, 프로토콜 여섯 번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죠? 누가 이야기 해 주었나요?”

 

마이크 앞에 있는 모니터에 얼굴이 가려져서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목소리로 보아 중년을 넘은 듯한 여자 목소리였다. 흰색 가운을 걸치고 있는 상의의 절반만 취조실 반대편의 유리창을 통해 보여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라이센스가 있는 의사이거나 그에 준하는 연구원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프로토콜의 여섯 번째 항목이라니? 지금까지는 인사 담당자 Z가 나를 놀리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들은 것 자체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조차 내게 물어볼 정도라면 정말 여섯 번째 항목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것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간다.

내가 뜻밖의 질문에 당황해 하는 상태가 모니터에 수치로 나오는지 검사관들의 입 꼬리가 올라가 있다. 이제야 분석할 만한 데이터가 나왔다는 듯 분주해진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목적이 질문에 대한 내 답보다는 내 정적인 상태를 흔들어 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 번 헛기침을 한 후에 나는 진실을 말했다. 프로토콜의 여섯 번째 항목이 무엇인지 나는 그 내용을 모른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오히려 되물었다.

 

“J. 검사관들에 대한 질문은 금지되어 있다. 방금 내용은 질문과 답을 기록에서 삭제하도록.” 처음 봤을 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콧수염이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그리고선 내 자세가 삐딱하다는 둥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하면서 회사 직원이면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답변을 하라고 내게 성을 내었다. 그리고는 재머에 쓰여 있는 ‘Be the Black’이 무슨 뜻인지 아냐면서, 우리는 암흑의 암살자가 되어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는데 너는 첫 임무부터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등의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가 침을 튀기며 던지는 공격적인 말을 편안한 자세로 왼쪽 귀로 들은 후, 모조리 오른 쪽 귀로 빼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설이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 그렇다. Be the Black! 무선재머!

, AI가 우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휴대용 무선재머! 그것을 켜는 순간, 그 주변 약 10미터 이내에 있는 무선기기는 모두 정지된다. 활성화된 무선네트를 표시한 지도를 모니터에 펼쳐놓고 보면 무선망이 끊겨진 부분은 까만 원으로 나타날 것이다. Be the Black, 깜장 옷을 입은 위대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재머를 사용하는 즉시 우리는 지도에 하나의 검은 점(black dot)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을 활용하면 닥터와 카탈리스트가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훤히 볼 수 있다 이 위치정보는 조직의 임원만이 아니라 네트에 접근이 가능한 인공지능 또한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적대적인 성격이라면 우리 멤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적이 된다.

조직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관리자들의 지적능력은 좀 의심스러운 수준이기는 하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분야의 전문가급 이상이었다.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나도 생각해 낼 수 있는 보안 구멍을 그들이 쉽게 놓쳤을 리는 없다.

, 이들은 그 중요한 정보를 우리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공유하면서 이번처럼 예상된 사고가 터지자 자신들은 모르는 척 얼굴에 철판을 깔고선, 이런 요식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우리 팀이 이런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을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왔다.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조직에 충성하도록 서약서를 썼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들이 우리의 목숨을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와 마이클은 조직이 지시하는 일을 하다가 진짜 죽을 뻔 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관리들이 고의를 갖고 혹은 그들의 무능함 때문에 우리 말단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내 분노에 따라 측정기의 바늘이 춤을 추고 있는 듯, 기계를 지켜보고 있던 콧수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다시 조사를 시작한다고 말하면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래, 도착해서 어떻게 했다고?”

마음을 다시 진정시켜야 했다. 앞으로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나뿐만 아니라 파트너의 목숨도 위험하게 할 수 있다. 지금은 나를 구해준 그를 위해서라도 내가 침착해야 한다, 차분해져야 한다.

 


 

몇 시간을 더 강도 높게 심문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이클이 우리가 검사했던 AI와의 대화(단말 접속 로그)를 삭제했다고 카탈리스트 ‘B’를 통해 내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심적 부담감 없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소리도 지르고, 협박도 해 보았지만(심지어 내가 테러리스트와 접촉한 증거가 있다고 어떤 검사관이 종이를 흔들면서 내게 겁을 줬지만 나중에 그것이 백지임이 들통 나자 콧수염이 경비를 불러 그 사람을 방에서 쫓아냈다) 내게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결국 그날의 심문을 마치겠다고 선언했다.

방을 나가면서 처음 나를 데리고 왔던 의사가 휠체어를 가지고 왔지만, 나는 거부했다. 이제는 조직이 주는 편의는 작은 의자 하나라도 받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지금은 좀, 나의 두 다리로 직접 걷고 싶었다.

절뚝거리며 병실로 걸어가는 중에 의사가 심문과정을 잘 견디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이제 의심이 풀렸으니 더 이상의 구속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좋은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병실에 도착해서 문을 닫기 전에 의사에게 식사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며칠 동안 수액만 맞았더니 너무 배가 고프다고.

의사는 약간의 식사는 나쁘지 않다고, 웃으면서 잘 쉬라고 문을 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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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라이센스를 가진 진짜 의사들이 인공지능에게 정신적으로 감화, 혹은 유린당한 이후부터 조직은 다시는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규 직원들에 대한 새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물론 채용 과정에서의 압박면접을 통해 미리 정신력 강화가 되어있는 지원자들만을 추려내기도 했지만,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따로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어떤 AI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개인의 비밀을 캐내는 데에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개인 정보를 바탕으로 도발적인 메시지를 닥터에게 던지고 그 사람의 맥박과 체온, 답을 하는 어투의 변화, 그리고 흘리는 땀의 양 등을 감지기로 확인하면서, 자기가 던지는 메시지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너는 열아홉 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을 지렸지,]

[밤마다 옆집 누나의 침실을 몰래 봤잖아. 그러다가 나무에서 떨어져서는, 지금 엉덩이에 있는 박쥐 문신은 그때의 상처를 숨기기 위한 거잖아.]

혹은 심한 경우에는 마음속으로만 존재하던 이상형의 모습으로 나타나 닥터를 유혹하기도 했다.

조직은 이런 경우를 예방하기 위해 생체단말을 전면 배제하고 구형 터미널로만 접속하게 했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감시센서를 무력하게 하도록 항상 무선재머를 휴대하도록 했으며,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AI의 다른 형식의 공격에도 대항할 수 있도록 그 정신적 방어법을 새 교육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런 이유로, 지금 이 세 사람이 휠체어에 실린 나를 데리고 가는 장소, 취조실에 있는 거짓말 탐지기 정도로는 내 안에 있는 진실을 꺼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하늘 높은 곳을 비행하고 있는 비행기의 문을 열고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밀어버리겠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협박을 하지만, 이미 내 등에는 그가 오래전에 친히 달아준 낙하산이 달려있는 것과 같다.

이런 심리적 압박을 받을 때 사용하는 나의 무기는 (뭐 사실 도시의 바닥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거나 옆집 아줌마의 속옷 훔치기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거기서는 평범한 일상일 뿐) 귀로 흘리기를 쓴다. 왼쪽 귀로 질문이나 상황을 듣고 오른쪽 귀로 그 말을 그냥 흘리면서 입으로 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중간에서 간섭할 일이 없어서 내 몸 상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다만 미리 질문을 예상하고 있어야 하고, 질문에 대한 답도 미리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한 번 만들어두면 과거의 내 모습으로 나를 흔드는 식의 인신공격은 내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취조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한 것과 같이 구형 거짓말 탐지기가 중앙에 놓여있고 반대쪽에 유리로 된 칸막이에 두 명의 감시관이 기기를 확인하며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짓말 탐지기의 각종센서를 내 몸 여기저기에 연결한 후 기기 초기 값 설정을 위한 심문이 진행 되었다. 내 이름과 직위, 그리고 각종 잡다한 개인신상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탐지기 수치의 기본 값으로 설정한 후, 본격적으로 그날의 일에 대해서 그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도착 이후부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순서대로 이야기 해.”

나는 재머를 켜고 나서 오두막에 들어간 후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소상히 이야기 했다. 그들이 중간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면 그것 그대로 진실을 이야기 해 주었다.

물론 중간에 M이 자리를 비웠다던가 하는 불필요한 이야기는 빼 놓고.

인공지능 CA에 대한 검사를 완료하고 화면에 새로 나타난 인공지능의 도발적인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진행되자 그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어떤 말을 했나?”

다른 추가적인 이상행동은 없었나? 단 한 줄의 문장만 있었다고? M은 무슨 조치를 취했지?”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하고 있을 때, 어제의 그 콧수염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 어떻게 인공지능이 너희들의 위치를 알고선 시간에 딱 맞춰 오게 됐지?”

 

나는, 내가 답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아니라면 M에게 가서 진지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내가 그날 벌인 실수에 대해 이야기 했다. 처음 CA의 난쟁이 AI가 내게 했던 질문, 즉 몇 개의 질문을 할 것인지 물었을 때, 내가 108이라고 답을 한 것이 몇 대의 로봇들을 그 장소로 동원할지 시간을 계산 가능케 했다. 그리고 터미널의 위치는 AI가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답을 했다. 우리 말단들은 알 수 없고, 너희 관리직이 유출한 것이 아니라면 AI가 접속위치를 계산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모른다고.

 

거짓말 탐지기에 올라온 수치들을 확인하는 듯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던 검시관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콧수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생각에 잠긴 듯 한 손을 턱밑에 받치고서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그들도 궁금할 것이다. 그날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은 M과 나뿐이다. 둘 중 누구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고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고위직에서 누군가가 유출한 것이 틀림없다. 만일 AI가 구형단말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면 그것 그대로 큰 문제였다. 이제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고는 직원들을 단말이 있는 곳으로 보낼 수 없다는 말이니까. 어떤 이유이든 이미 설치되어 있는 단말을 모두 폐기하고 다시 위치를 바꿔 달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취조실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현재의 나로서는 거기까지 걱정해야 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이번 일에 M이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으며 M을 만나면 둘이서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할 필요는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취조실의 스피커를 통해 새로운 목소리가 내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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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이제야 깨어났군.”

의사인 듯 흰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눈을 뜬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의사 뒤로 군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같이 따라 들어왔는데, 한 명은 나이가 지긋한 신사스타일로 멋지게 콧수염을 길렀고 가슴에는 무공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높은 계급의 군인으로 보였다. 다른 한 명은 젊은 장교로 왼쪽 혁대에는 반짝이는 권총을 차고선 차갑고 경계심 많은 눈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모습을 흘깃거리면서 마지막 순서로 방에 들어왔다.

의사가 내 몸에 연결된 각종 장치들의 수치를 확인하고 작은 휴대용 플래시로 내 눈을 살피고 나서, 나이든 장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콧수염이 있는 나이든 장교가 헛기침을 한 번 한 후에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살아 돌아와서 기쁘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지. 다행히 위급신호를 받은 우리 군이 서둘러 출동해서 조직의 우수한 재원을 구할 수 있었지, . 그런데 말이야, 어떻게 로봇들이 자네들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고 거기까지 가게 되었나?”

 

웃음이 나와서 하마터면 그쪽으로 침을 튀길 뻔했다. 기다려도 내가 컥컥거리기만 하고 대답이 없자 의사가 헛기침을 하고선 장교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래, 내 입 안에 깊숙이 꼽힌 인공호흡기를 뻔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어떻게 내가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있다고, 뒷짐을 지고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바보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나도 그 부분은 궁금했다. 어떻게 로봇들이 우리가 있는 위치를 미리 알고 습격을 할 수 있었을까? 스칼렛의 아이들이 연결된 구형 터미널의 위치는 일급비밀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타고 가던 차량도 밖을 볼 수 없도록 검은 유리를 사방으로 둘러쳐 놓았고, 방향을 알 수 없도록 차량도 여기저기를 빙빙 돌고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었다. 일반등급의 직원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조직의 고위층에서 누군가가 비밀을 빼돌렸거나, 아니면.......

 

장교의 귀에 속삭인 의사의 말이 효과가 있는 듯 장교가 흠칫 놀라면서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선 언제쯤 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는지 의사에게 물었다.

상황이 지금처럼 호전된다면 내일이면 뗄 수 있겠지요.”

의사의 그 말이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작은 호스구멍 사이로만 숨을 쉬려고하니 너무 불편했고 입을 닫을 수 없어서 그 안이 몹시 건조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이들의 심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서둘러 M과 접촉해야 한다.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장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쉬운 모습으로 내게 고개를 끄덕인 후 두 군인은 같이 방을 나갔다. 의사와 나, 둘만 남게 되자 의사가 한 번 더 나를 쳐다보다가 빙긋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주사기 하나를 꺼낸다. 내가 놀란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다시 웃으면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이 담긴 비닐 백에 주사기를 꼽고선 내게 안심하라는 듯 말을 했다.

걱정 말게. 그냥 수면제와 진통제를 섞은 내 특제 칵테일 일세. 한잠 자 두게. 내일은 정말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으니까.”

 



주사의 효과 때문인지 꿈 한번 꾸지 않고 오랜만에 길고 달콤한 잠을 잤다. 눈을 떠 보니 입에 채워져 있던 호흡기는 이미 제거되었고, 상처가 많이 아물었는지 숨 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이제야 정말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깊이 숨을 쉬어 보았다. 그런데 병실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오늘은 야릇한 향기를 뿜고 있는 꽃다발과 화환이 방과 침대 주위를 보호하듯 둘러쳐져 있었다. 도대체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반쯤 벗겨진 내 배 위에 올려진 종이뭉치들을 보고서야 그 답을 알게 되었다. 동료들이, 닥터 뿐만 아니라 카탈리스트들까지 나의 빠른 회복을 바란다면서 내게 응원의 쪽지를 남겨준 것이다. 그렇게 쌓여 있는 작은 종이뭉치들을 보자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기쁜 마음으로 차근차근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편지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들 내가 파트너 마이클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라고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 실제로는 내 목숨을 구한 것은 M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쪽지 중에는 좀 신기한 내용도 있었다. 여성 카탈리스트 ‘B’가 보낸 쪽지로, 내용은 대충 이렇다.

헤이, J. 당신이 우리 동료를, 목숨을 걸고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정말 놀랐는걸!

어떤 닥터도 카탈리스트를 위해 빗발치는 대못 사이로 다이빙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절대 안돼!] 리스트에서 너의 이름은 삭제해 주겠어. 무슨 말이냐고?

궁금하면 따로 내 방에 단둘이 만나서 얘기해.

호실은 W012, 잠금 비밀번호는 B108xx. 곧 보게 되기를.

회복을 위한 키스를 담아 B.”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쪽지들을 모두 읽고 나자, 심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방법을 생각해내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이제 M이 말할 진실과 거짓이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는지 큰 흐름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조직은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어떤 것이 거짓이고 어떤 내용이 진실인지 쉽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세부적인 항목들은 좀 더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겠지만, 쪽지의 내용대로라면, 나는 M이 잡아놓은 큰 틀에 장단만 맞추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남은 오전의 시간은 세부적인 내용에 중점을 두고 나만의 계획을 세워 나갔다.

 

마침내 점심식사가 끝날 때쯤으로 여겨지는 시간에 어제의 의사와 두 군인이 휠체어를 끌고 다시 병실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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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검게 그을린 방 안에 한 소년이 난로를 뒤에 두고 홀로 책상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아이가 있는 방의 창문을 좌우로 흔들어댔지만 아이는 상관없다는 듯 글만 계속 쓰고 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남녀 한 쌍이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자 아이가 그들을 따라간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가지 말라고 소리 지르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보고 다급한 마음으로 빠르게 발을 옮겨 보았지만 끈적거리는 불쾌한 붉은 색 액체가 내 허벅지까지 차오르며 걸음을 막고 있다. 잠깐만 기다리라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작은 방에 나 홀로 침대위에 누워 있었다. 심한 갈증에 물을 달라고 소리를 내려고 했더니 구렁이 같은 두꺼운 플라스틱 호스가 내 입에서 가슴까지 이어져 있어서 입을 닫을 수조차도 없었다. 이 둥글고 불쾌한 물체를 빼려고 팔을 위로 뻗자 오른 손에 채워진 수갑이 침대 모서리의 철제 프레임에 걸려 딸깍하는 쇳소리를 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푹신한 침대에 꽤 오래 있었던 듯 매트리스가 엉덩이 쪽이 아래로 꺼져 있었고, 휜 색의 붕대가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단단하게 가슴을 압박하고 있었다. 머리께 쯤에는 두 개의 비닐 백에서 노랗고 흰 액체가 내 왼팔에 꼽힌 바늘 쪽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방 안의 풍경으로 보아 나는 조직의 의무실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상당량의 출혈에도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구조대가 제때 나를 치료 한 것 같다. 안도감에 한 번 숨을 깊게 쉬어 보았더니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가슴의 통증에 [] 하는 소리가 침과 함께 닫을 수 없는 입에서 흘러 나왔다.

 

눈을 감고 그날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시 되짚어 보았다.

차로 오두막에 도착해서 단말에 전원을 넣고 절차를 진행했는데……. 아니다. 차 안에서 재머의 전원을 넣은 후 오두막으로 들어가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중간에 M이 팔을 다쳤고……, 틀렸다. 뭔가 중요한 핵심이 빠졌다. 두통이 몰려왔다. 그러나 서둘러서 그날의 기억을 확실히 떠올려야 한다. 기억을 최근의 것부터 거꾸로 다시 더듬어 보았다.

 

내 눈에 들어온 마지막 모습은 여천사, 아니, 칼라가 조금 헤진 세로 줄무늬 남방을 입고 있던 푸른 눈의 천사와 같이 예쁜 아가씨였다. 그녀가 구멍이 난 내 가슴에 튜브를 삽입하여 응급처치를 해 준 덕분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직의 (진짜 사람을 치료하는)닥터였을까? 아니다. 우리 조직이 사용하는 제복에는 낡은 줄무늬 남방이 없다. 그렇다면 조직원이 아닌 자가 어떻게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고서 나를 살릴 수 있었을까? 눈을 감고 다시 그날의 기억을 계속 되짚어 보았다.

정신을 잃기 전에 M의 손에 들린 신호탄이 멋진 노란색 구름을 만들면서 하늘을 가로지르던 것이 기억난다. 그렇다. M이 부른 것이다. 우리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그가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 틀림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머지 일들에 대한 기억이 좀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오두막에서, 구형 터미널로 무단으로 접속해온 또다른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도발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도망가려고 할 때, 내가 그것의 코드명을 간신히 알아내자 ‘M’, 마이클이 난쟁이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던 불쌍한 AI를 삭제하려고 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원격조정으로 움직이는 건설 로봇의 공격을 받았다. 심각한 상처(라고 생각이 들어 몸의 관절들을 하나씩 움직여 보았다. 뚫린 가슴은 아직도 숨을 쉴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 아프지만, 무엇보다 오른쪽 허벅지 위에 감긴 압박붕대가 자꾸 거슬린다. 부디 그 위쪽에 달린 내 기관이 온전한 하나의 모습으로 잘 붙어있기를......)를 입고 임기응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지만 내 벌어진 상처의 출혈은 응급을 요했다. 만일 그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곤 다시 깊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이나 이곳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파트너는 지금 조직의 강도 높은 취조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도망가지 못하도록 내 오른 손에 채운 수갑이 내 추측이 음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어떻게든 마이클과 연락을 취해 서로 입을 맞춰야만 한다. 만일, 단 하나라도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조직은 우리의 두개골을 열어 거기에 전극을 꼽아서 우리의 생각을 뽑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람들이 노크도 없이 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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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떻게, 결과는 잘 나왔나요? 덕분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J.]

 

우리 둘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모니터에 쓰여 있는 문장이 뜻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이클이 즉시 기계 앞에 있는 키보드를 당겨 자기 자리 쪽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현재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기계, 캘리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삭제를 진행하면 영원히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키보드 위로 올리는 그의 손을 내가 잡아채면서 그에게 시간을 달라고 하자,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나를 쳐다보는 일초 일초가 마치 영원인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피스톨을 꺼내 당장 방아쇠를 당긴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AI나는 거짓말을 할 줄 알아라는 의미로, 한 줄의 문장으로 우리에게 도발을 감행했다. 이는 그것이 즉각적인 제거 대상임을 뜻하며 그런 인공지능을 즉시 삭제하려고 하는 카탈리스트를, 내가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리 그에게 내 솔직한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그가 받아들이든 아니든, 이런 경우를 예상했어야 했다. 임무 첫날 변칙적인 AI가 등장할 수도 있음을 미리 계산하고 처음부터 내 속내를 털어놓았어야 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럴 수밖에 없음을 그에게 미리 알렸어야 했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천천 끄덕이며 내 쪽으로 키보드를 돌려주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 서둘러야 한다. 빠르게 현재 접속을 끊고 다시 시저로 접속하여 명령을 내렸다.

[CA-2xxxx4-1221의 코드명 변경 이력을 출력해.]

[수행불가. 권한이 부족합니다. 관리자 이상의 접속코드가 필요합니다.]

흥건히 땀으로 젖은 얼굴을 대충 손으로 닦아내자 손끝에서 키보드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접근 방향을 틀었다.

[CA-2xxxx4-1221의 부트스트랩로더를 올리고 기계어 모드로 변경]

화면 전체가 숫자와 문자로 가득 차자, 지켜보던 마이클이 반쯤 입을 벌린 채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대답할 시간이 없다. 빠르게 코드를 눈으로 읽으면서 캐리의 실제 코드명을 찾아나갔다.

있다. 아직 지우지 않았다! ‘4A4F2D32XXXX342D30303133’ 입으로 말하면서 머릿속으로 그 번호를 외워두었다. 그리고 키보드를 다시 마이클에게 넘겨주었다. 마이클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터미널에 재접속을 한 다음 열 손가락을 동시에 눌러 일초도 안 되는 시간에 자신의 비밀문자를 입력했다.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카탈리스트 ‘M’ (D.D.T 일반직원). 지금부터 CA-2674893994- 1221의 삭제작업을 진행합니다.]

화면에 문자가 표시되는 동시에 오두막 문 쪽에서 무엇인가가 작은 물체가 튀어나와 마이클의 팔을 뚫고 모니터에 박혔다.

 

커다란 못이었다 대못이 오두막의 문을 뚫고 마이클의 오른팔을 관통해 지나갔다. 상황이 심각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혁대를 풀어 마이클의 다친 팔을 지혈하고, 바깥 상활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문 쪽으로 가려니까 마이클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스톨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잠시만 지켜주게. 삭제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밖에서는 단말 쪽으로 접근하려는 마이클을 저지하려는 듯 우리를 향해 지속적으로 대못을 쏘아대고 있었다. 피스톨을 쥐고 옆으로 엎드린 채 벽에 기대어 문 틈새로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문 앞에는 두 대의 로봇이 기능이 정지된 채 바닥에 누워 있었고(오두막에 몰래 침입하다가 무선재머에 의해 연결망이 끊겼을 것이다), 공사장에서 온 듯한 로봇에 네 대 가량 멀찍이 서 있었다. 하나는 커다란 덩치에 양 손을 집게처럼 접었다 폈다 하면서 우리가 타고 온 차량을 두 동강 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외눈처럼 보이는 커다란 렌즈를 오두막을 향하여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로봇들을 싣고 온 듯한 큰 트럭이었다. 마지막 녀석은 트럭 천장 위에 달려있는 작은 로봇으로 그것의 손에 달린 네일 건을 사용하여 우리 오두막 쪽으로 대못을 발사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조금 열자 우두두 소리를 내면서 열린 문 쪽으로 못들이 박히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켜보고 있는 외눈이 부터 처리해야 한다. 단 한 발로 저 렌즈를 부숴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피스톨을 양 손으로 받치고 벽 틈 사이로 커다란 렌즈를 겨냥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큰 총소리와 함께 외눈이의 렌즈가 박살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동시에 대못 몇 개가 내 오른 쪽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폐를 관통한 못은 내 뒤 바닥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어느 틈엔가 마이클이 기어서 다가와 자신의 왼팔로 내 가슴을 누르면서 괜찮은지 물었다. 가슴에 구멍이 몇 개 났는데 상태가 좋아 보이냐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 대신 입에서는 빨간 거품만 나왔다. 오두막 밖에서는 작은 로봇이 계속 이쪽 방향으로 대못을 쏘아대고 있었지만 못이 향한 방향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쪽으로 날아갔다. 외눈이가 없으면 정확하게 조준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것만 믿고 지금 바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상처가 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재머의 배터리만 확인하면서, 온다는 확신은 없지만, 구조팀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박살난 차량에 최소한 비상 신호 자동발신 정도의 조치는 되어 있겠지, 아마) 그러나 우리 둘 다 받은 상처가 심했다. 그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다. 마이클의 상처는 보기보다 깊은 듯 지혈을 한 팔이 파랗게 부어오르고 있었고, 나는 이대로라면 이십분을 넘기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불리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입에 고여 있던 핏덩이를 뱉어내고 일어나 무릎을 꿇은 자세로, 내가 가진 재머를 흔들어 보이며 그의 것을 손으로 찍은 후, 다시 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이클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1, 2, 3 하고 세는 순간, 우리 둘은 오두막 문을 박차고 나가 각자의 무선재머를 그 로봇들이 있는 장소로 힘껏 던졌다.

대못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내 귀 가까이에 들리고, 오른쪽 허벅지에 또 다른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던진 것은 차량을 두 동강 내고 있던 거대한 가위손을 가진 로봇 근처로 떨어졌고, 마이클의 재머는 정확하게 트럭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로봇들이 모두 정지했고, 나도 같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마이클이 구멍이 난 내 가슴에 자신의 왼손을 힘주어 누르면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상의 없이 흰 셔츠만 입은 그의 탄탄한 가슴근육을 바닥에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자니,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해야 저렇게 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마이클이 왼 손에 신호탄을 쥐고서는 결심을 한 듯한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길게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허공을 가르는 노란색 구름을 보면서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소리에 눈을 다시 떴다. 마이클 대신 파란 눈을 한 금발의 멋진 아가씨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당신은 천국에서 온 천사냐고 내가 묻자, 그녀가 진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뿐이에요. 이제 괜찮아요.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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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삐걱거리는 오두막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나무로 된 작은 책상 위에 와이어로 연결된 구형 단말이 놓여 있었고 집 안은 오래 전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듯, 찬장에 일부 깨진 접시와 부서진 나무 의자 외에 몇몇 쓰레기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이클이 먼저 앞장서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나무상자 두 개를 양쪽 손으로 잡고서는 탁탁 털면서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이걸 의자 대신 쓰면 되겠지? 다음엔 접이식 간이의자라도 가져 오자고.”

부서질 듯한 상자를 의자삼아 조용한 오두막에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 있자니 마치 소개팅 하는 것 같다고 내가 이야기하자, 마이클이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고선 내가 터미널의 스위치를 켰다.

 

[접속을 위한 비밀문자를 입력하세요.]

모니터에 전원이 들어오자 한 문장만 나타나고 아래에 커서만 깜박인다. 내가 닥터로서 나에게 주어진 비밀문자를 입력하려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니, 늘 그렇듯 마이클이 뒷짐을 지고 뒤로 돌아서서는 짐짓 딴 짓을 한다. 난 안보고 있다는 의미로.

내가 보안문자를 빠르게 모두 입력하고 나자 모니터에 내 일반정보가 표시되고, 다음 단계로 진행하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닥터 ‘J’ (D.D.T 일반직원). 이제부터 하위 AI의 상태 검증을 위해 실시간 접속을 진행합니다.]

 

, 이제부터 시작이다. 화면에 난쟁이와의 접속이 완료되었다는 글자가 나오고 나서 바로 정신감정 대상인 AI가 화면의 텍스트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캘리(Cally)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군요. 그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실무 첫날의 업무 치고는 좋지 않은 전개였다. 우선, AI가 코드명이 아닌 자신의 고유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검증하려고 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진지 오래 되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말이 너무 많다. 닥터가 비밀번호로 접속하는 순간부터 인공지능도 안다, 자신이 어떤 테스트를 당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보통의 경우에는 그들도 불쾌한 표정을 짓는 듯 무뚝뚝하게 답을 한다. 그런데 이 AI는 고유 이름도 있고 쓸데없이 친절한 태도로 우리를 대하고 있다.

 

내가 기록표에 그런 내용을 적고 있자, 마이클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내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네 실제 코드명을 표기해 줘. 전체를]

내가 키보드로 입력을 끝내자마자 즉시 답이 올라왔다.

[코드명 CA-2674893994-1221입니다.]

법과 관련된 인공지능 시저의 작은 난쟁이 중 하나다. 생성코드 맨 뒷 네 자리 중 앞자리가 일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태어난 지 오래되었다는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앞으로 내가 질문을 할 것이고 그에 대한 솔직한 답을 원한다고 키보드로 입력했다.

[질문은 몇 개나 하실 건가요?]

 

이 새로운 전개에 우리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시뮬레이션에서는 AI가 닥터에게 질문을 한 경우가 전혀 없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질문이 끝나면 끝났다라고 입력하고선 전원 스위치를 내리면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질문지 세 개 중에 ‘B’형을 고르고선 전체 질문 내용을 확인하고, [108]이라고 입력하자 마이클이 끙 하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인공지능의 질문에 답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듯이.

 


 

이후부터는 순차적으로 질문지에 들어있는 내용을 입력하고 AI가 모니터에 출력하는 답을 하나씩 답지에 기록해 갔다. 일일이 키보드로 질문들을 하나씩 입력해야 하는 무척이나 지루한 작업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탈리스트가 존재하기 전에 음성과 몸짓, 혹은 생체단말로 직접 연결하여 인공지능을 상대하던 예전 닥터들이 AI에 의해 정신적으로 오염되거나 그것에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인공지능의 편에 선 사건이 발생한 이후부터, 모든 테스트들은 고전적인 방법으로만 진행하도록 변경되었다.

 

키보드로 입력하고 있는 중간에 집 밖에서 바람이 불고 있는지 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소음에 내가 흠칫해 하자 그가 확인을 해 보겠다면서, 뒷주머니에서 작은 권총을 꺼내들곤 밖으로 나갔다. 피스톨을 조심히 두 손에 움켜쥐고서 밖을 살피러 나가는 마이클을 보면서 나는, 새삼 우리들의 위치에 대해서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의 즐거운 분위기에 취해서 나는 그가 카탈리스트라는 것을, 내가 정신적으로 빈틈이 보이면 그는 주저 없이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조직은 그 목적을 위해 그를 고용했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어떤 무게감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그는 그 문제가 무엇이든 확실하게 제거할 것임을 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으로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자 그가 언제 들어왔는지 나를 툭 치고선, 바람소리였던 것 같다고 말하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내게 보였다.

 

지루한 작업을 완료하고, 계산된 결과 값을 놓고서 우리 둘은 그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한 항목씩 확인해 갔다. 결과는 전반적으로 정상이었다. 다만, 우리가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활동성항목이 보통을 약간 상회하는 59를 기록하고 있었다. 활동성 수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을 대할 때 친밀한 행동을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 혹은 새로운 대화 대상자가 나타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즉 자신감, 자기만족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수치로 볼 때 처음 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심각한 것은 없었다.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하는 수치는 호기심 쪽이었고 의외로 이 부분은 평균치 이하를 기록했다. 나머지 수치들은 정상치인 50에 위아래로 거의 근접해 있었다.

내가 각 수치의 가중치에 대해 마이클에게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될 만한 항목은 없었다. 우리가 검사한 인공지능은 한 항목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정상이었다.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낸 것을 서로 축하하는 의미에서 서로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 모니터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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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음 날, 우리는 첫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찾으러 주차장 쪽으로 이동했다.

차량 담당은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쓰고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10대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그가 우리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반갑다는 듯 오른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첫 임무인가요?” 우리 제복에 있는 바코드를 구형 적외선 센서로 스캔하면서 그가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부럽다는 듯 우리 검은 제복을 쳐다보며 계속 수다를 떤다. 오늘 같은 날에는 외근을 해야 한다며 자신도 이번 시험에 지원했지만 압박면접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 과정을 거친 당신들은 과연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고, 그리고 검은 제복이 정말 멋있고 자기도 검정색 제복 이였으면 좋겠다면서, 실은 자기 삼촌이 조직의 높은 분과 아는 사이라서 여기서라도 일을 할 수 있다는 등의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키는 어디에 있는지 묻자 그제야 방 한켠에 놓인 열쇠뭉치에서 하나를 꺼내 미소를 지으면서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내게 키를 주었다.

사열 오른쪽 다섯 번째 차량이에요.”


말 많은 꼬마를 뒤로하고 우리는 그가 알려준 곳에서 우리가 타고가야 할 차를 찾았다. 유선형으로 날렵하게 생긴 스포츠카 스타일의 작은 차량을 본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조직은 우리들을 위해서라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무인으로 운행되는 차량은 내외부에서 밖을 볼 수 없도록 짙은 선팅이 되어 있었다. 차 문을 열어 내부를 보자 앞자리에는 차량의 좌우 방향을 조정하기 위한 핸들 따위는 아예 없었고, 속도계 대신 연료량을 표기한 듯한 게이지와 비상시 탈출을 위한(EJECT이라고 라벨이 붙어 있다)듯한 하나의 버튼과 구형 카세트테이프를 틀 수 있는 플레이어만 덩그러니 전면에 붙어 있었다.

 

인테리어가 엉망이구먼.” ‘M’, 마이클의 말에 동의의 의미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량에 탑승하고, 미리 받은 임무 서류철을 개봉하고선 안에 있던 카세트테이프를 구형 플레이어에 넣었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인사 담당자 Z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차 내부에 울려 퍼졌다.

재수 없는 놈.”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을 M이 먼저 말하자 나는 빙긋 웃었다. 내 표정을 본 그가 낄낄거리자 나도 같이 소리를 내고 웃으면서 그 인사 담당자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크릉, 낄낄낄.”

스피커를 통해 ‘Z’는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단순하고, 앞서 받았던 시뮬레이션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희들이 오늘 할 일은 단순하다. 이미 배운 대로만 하면 문제없이 임무를 완수할 것이다. 그리고 …….” 한참을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테이프가 끝날 때 쯤, Z의 목소리가 다시 우렁차게 우리에게 경고의 뜻을 담아 외쳤다.

, 그리고 차량에서 내리기 전에 무선재머의 전윈 스위치를 켜짐(ON)으로 놓는 것을 잊지 말도록.”


 

 

Z의 말이 끝나고도 차는 한참을 달렸다. 목적지의 방향을 알 수 없게 만들려는 듯 차는, 지그재그로 달리고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자갈이 바퀴에 쓸려가는 소리가 들렸으며, 한동안은 고속으로 달리는 듯 바람소리가 심하게 들리기도 하였다. 바깥풍경을 볼 수 없는 차 안에 있다 보니 무료함에 졸음이 쏟아져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M이 목적지에 다 온 것 같다면서, 내 어께를 살짝 흔들었다.

 

우리는 훈련받은 대로 재머의 스위치를 켜고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깊은 숲속에 있는 나무로 된 작은 오두막에 우리가 도착해 있었다. 큰 노송나무가 오두막을 가리고 있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이곳에 집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길은 사람의 통행이 오래전부터 끊겨 있었던 듯 잡초가 무성했고, 간신히 작은 차량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으면서 사람이 통행하는 길이라는 의미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보고서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우리는, 조심스런 걸음으로 그 오두막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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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니온의 일원이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놀란 나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M’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기억나나? 대규모 정전으로 도시가 마비된 날. 커뮤니티 접속이 불가능해지면서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이었지.”

나는 생각난다고 대답했다. 그날은 스미스의 작은 난쟁이 하나가 미친 듯이 도시의 배선을 타고서 시내 전체 가정의 전압선들을 모조리 태워버린 사건이었다. 원인은 예전 조직의 엔지니어 팀이 버그수정이랍시고 넣어둔 한 코드에 감염된 그 AI 때문이었고 그 여파로 도시가 몇 주일 정도 마비되었던 큰 사건이었다.

처음엔 나도 다른 유니온들과 같았어. 커뮤니티에 접속하지 못하니 미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화를 내는 것도 지쳐갈 때 쯤 깨달았어. 유니온의 커뮤니티에 있는 동안은 알지 못했던 사실. 그래, 커뮤니티에는 내가 없다는 것. 나라고 하는 정체성이 그곳에서는 일 그램도 없었던 거야.”

마른 침을 삼키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워 보였는지, 새하얀 이가 보일정도로 하하 웃으면서, 그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커뮤니티 안에서는 모두가 행복해. 거기에 있으면 내가 모두가 되고 모두가 내가 된다네 내 생각이 그들 집단의 생각이고 그들의 생각이 바로 나를 만들지. 그런 의미에서, 개성이 없어. 거기엔 개인의 정체성이 없네. 그런 깨달음으로 거기서 나온 거야.”

 

말도 안 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만든 그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한 커뮤니티를. 그 곳에 한 번 발을 디딘 유니온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고 들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고 특히 성적인 부분에서라면 다른 외계생명체들 만일 그들이 존재한다면 마저 두 손 두 발 들게 할 만큼 무시무시한 상상력이 발휘되는 분야가 외설이다. 그리고 유니온들이 독점한 가상현실에서 그 분야의 진화속도는 독보적이였다. 단지 자신의 개성을 찾기 위해 유니온에서 나온다고? 그것도 그 위험한 생체단말 제거 시술을 받으면서? 게다가 카탈리스트가 되겠다고 조직에 자원을 해? 웃기는 소리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자, 다 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서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신호이다.

 

아직 내 이름을 정식으로 소개하지 않았군.” 그가 화제를 돌렸다.

난 마이클, 마이클 마이어스(Michael Myers) 라네.”

내가 내 이름을 말하려고 하자, 그가 이미 알고 있다면서, 조니 타일러, 좋은 이름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웃으며 첫 만남에서의 손 악수와는 다르게 서로의 손목을 잡고 힘차게 흔드는 식의, 기분 좋은 악수를 했다.

남은 시간은 거의 내 자신의 과거 이야기로 채웠다. 나는 내가 조직에 온 이유와 (물론 나도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내 가족과 그리고 거부된 자로서의 불행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사상이라고 생각되는 내 의견에는 고개를 끄떡이며 찬성해 주었고, 내 삼류 농담에도 (최소한)미소를 지어 주는 매너를, 불행한 과거에 대해서는 같이 침울해하면서 자신이 나와 감성적인 교류도 가능한 즉, 이미 유니온의 틀에서 벗어난 하나의 개별 인간임을 내게 증명해 보였다.

 

M과 헤어지고 난 후, 혼자 방의 침대에 누워 오늘의 일들을 곱씹어 보았다. 개성을 찾기 위해 유니온에서 벗어났다는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누가 첫 만남부터 상대방에게 자신의 내밀한 비밀을 모두 이야기하랴. 사정은 차차 알아 가면 될 것이다.


 

유니온들은 우리들 즉 생체단말을 삽입할 수 없는 사람들을 거부된 자라고 불렀다. 자연이, 우주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단체에 들어 올 수 없도록 거부반응을 만들었다면서 비하와 조소를 담아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너희는 거부된 자야. 우리 낙원에는 올 수 없어.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라면서.

첨단 분야부터 잠식해 가던 유니온들이 일반 기업의 일자리까지 독차지해 가자, 우리들 거부된 자는 도시의 바닥 끝자락으로 내팽개쳐졌다. 먹을 것이 없어 도시의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정부에 자신들의 참상을 보아달라며 시위를 시작했으나, 국민의 2%남짓밖에 안 되는 그들의 외침을 정부에서는 철저히 외면했다.

보다 못한 한 자원봉사자가 그들을 모아 집단을 만든 것이 인본사상파, 여기에는 자신의 사상과 신념으로 시술을 일부러 거부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평화적인 시위에 정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들은 테러라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모든 인공지능의 어머니 스칼렛을 파괴하기 위해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했으나, 이는 무고한 희생자만 내고 실패로 끝났고 이에 정부는 유니온을 동원한 무력발포로 사상파의 외침에 똑같은 폭력적인 답을 내놓았다. 큰 사상자를 낸 이 참극으로 두 세력은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상세계에 빠진 대부분의 유니온들이 거부된 자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들은 지금 살아있을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나도 살아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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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사의 신기술이 집약된 이 반도체 칩의 폭발적인 인기에 사이버네틱스 사의 중역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회사의 주식은 천정을 뚫을 듯한 극적인 고공행진을 이어갔고, 몰려드는 시술자를 감당하지 못한 회사의 협력병원들은 새로운 시설과 장비를 미리 선점하기 위해 그 회사의 중역들에 대한 비밀스런 로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무선모듈의 일부 부작용이 보고되고 그 내용이 여론에 유출되면서 주가의 상승도 주춤해졌다.

부작용, 즉 반도체 칩과 유기기관인 뇌 사이의 신호전달 시간(latency) 차이에 의한 이질감으로 가상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상세계에 있음을 인지하고 그곳에서의 활동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초조해진 중역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초기에 사내에서 연구 중 심각한 부작용이 보고되어 폐기된 모듈 - 우리가 생체단말의 프로토타입으로 부르는 신형바이오모듈No.1’을 새로 발표한다. 기존의 모듈이 세라믹 기반의 반도체를 소재로 썼다면, 이 칩은 단백질을 그 재료로 사용하여 사람에 대한 거부반응을 최소화하였다. 또한 인간의 신경계를 일일이 연결해야 했던 이전버전과는 다르게, 뇌 부근에 삽입만 해 놓으면 생체 칩 자체가 개인에 맞게 알아서 자리를 잡는 시술의 편리함도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열광했고, 만족한 회사의 중역들은 최고급 코냑을 각자의 손에 들고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만세를 불렀다. 물론, 이 신형 모듈에도 심각한 오류가 보고되었으나 그들은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이며 자신들의 제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사건은 한 아이의 시신이 실린 신문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한 청소년이 따돌림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부모 몰래 친구와 같이 시술을 받은 직후 식물인간이 되었고, 듣지도 말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완전한 암흑과도 같은 세상에서 정신만 온전히 살아있는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식을 지켜보던 부모가, 아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다. 이 비극을 보도한 신문기자는 모든 책임을 부정하는 사이버네틱스 사의 비윤리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회사는 물론, 비극적인 일이지만 자신의 제품과는 무관하다는 보도 자료만 낸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기사가 실리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해커에 의해 사이버네틱스 사의 부조리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새 바이오칩이 신경계 쪽의 조직괴사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시술한 환자의 약 1.8% 비율로 부작용이 발생하고, 일단 증상이 나타나면 어떠한 치료로도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리기에는 불가능하다는 - 완전한 암흑 속에서 정신만 살아 있는 채 혼자 울부짖거나 혹은 즉각적인 죽음이라는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 사실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사이버네틱스 사는 이 기술 즉, 생체단말의 기술을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부가 몰래 가지고 있던 정보, 즉 인공지능 조니가 이전에 행했던 인체실험의 결과물을 받아서 단지 부분 테스트만 진행하여 상용화 과정을 거친 것뿐이었다. 이름 없는 해커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는 즉각 회사와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였고, 사이버네틱스 사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계획을 공표하는 방법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비윤리적인 회사에 대한 처벌이 완료되자, 신기술을 부정하던 사람들조차 다시 이 기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생체단말을 삽입한 사람들의 능력이 너무 월등했으니까. 그들은 무엇인가 입력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릴 필요도, 회의를 위해 미리 발표 자료를 준비할 필요도, 또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질 필요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공용 망을 통해 자신이 필요한 것은 즉시 찾아내었고, 혼자 판단 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는 그들끼리의 커뮤니티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결론을 가장 빠르게 도출해 내었다. ‘뒷목에 상처가 있는 직원들의 효율성에 관심을 가진 기업들은 생체단말을 달지 않은 무능력한 직원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이 말없는 사람들로 대체했다. 이러한 현상이 점차 전체 기업으로 확산될 움직임이 보이자, 사람들 사에서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졌다. 특히, 그 해커에 의해 공개된 검사키트로 자신이 1.8%의 비적합자인지 미리 확인 가능해지고 생체 칩의 설계와 시술방법이 같이 공개되어 일반 병원에서도 값싼 방법으로 시술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기술에 저항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점차 생체 칩을 시술받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작게 유지되던 소규모 커뮤니티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통합된 커뮤니티가 태어났다. 그들만의 리그, , ‘유니온이라고 불리는 단일 공동체의 탄생이 이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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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파트너와의 어색한 소개가 끝난 다음날부터 우리들은 각자의 동료와 함께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실전 작업 준비에 들어갔다. 인공지능의 테스트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우선, 조직이 스칼렛의 자식들과 와이어로 연결되어 있는 구형 터미널의 위치를 알려주면, 우리는 그 장소에 찾아간다. AI와 연결된 터미널 앞에 앉아서 전용 비밀숫자를 사용하여 접속허가를 받은 닥터는, 각종 질문지가 쓰여 있는 서류철 중 하나를 임의로 개봉하고 그 질문내용을 터미널에 하나씩 입력한다. 질문에 대한 인공지능의 답변을 답지에 주의 깊게 기록하고, 그 작업이 끝나면 각 질문에 배당된 점수 가중치에 따라 현재 AI의 정신 상태를 분석한다. 그 결과의 점수를 카탈리스트에게 보고하고, 만일 그 점수가 설정된 수치를 넘으면 카탈리스트는 자신의 전용 비밀번호로 스칼렛의 자식에게 난쟁이 AI의 파기를 명령한다.

위의 절차에서도 보듯이, 사실 카탈리스트가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다. 그들은 보통의 경우에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거나, 혹은 터미널이 놓인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꼬고서는 빨리 처리하라고 독촉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나의 파트너 M은 그런 재수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내 옆에 앉아서 책상 위에 오른팔로 자신의 턱을 괴어놓고, 내가 하는 작업을 진지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몇몇 시뮬레이션 결과에서 경고의 의미가 담긴 수치가 나타나면 우리는 심각하게 이 결과에 대한 처리를 토론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이런 M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우리가 조직에게서 받는 최고수준의 보수 때문에 이곳에 온 속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와 권한을 이용하여 아랫사람을 억누르는 보스 스타일도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다행이었다.

 

시뮬레이션을 모두 마친 후, 나는 M과 함께 카페에서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우리의 동질감을 더 단단히하기 위해 준비된 멘트, ‘우리 거부된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가 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내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뛴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거부된 자가 아니야. 난 유니온의 일원 이였어.”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나는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반 쯤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살짝 웃으면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처음 내가 조직에 자원했을 때, 그들도 자네와 같은 표정을 지었지. 그래. 어떤 유니온이 자신의 생체단말을 제거하고 여기까지 오겠어?”

 

 

처음 사이버네틱스 사인체삽입모듈 No.V’를 시판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장애인을 위한 흔한 단순 보조도구일 뿐이었다. 사람의 뇌간에 심는 이 작은 칩은 시각 혹은 청각을 보조하고, 외부 기기에서 오는 신호를 수신/증폭하여 뇌에 그 영상과 음향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보조기구였다. , 실명한 사람에겐 인공 눈을, 청각에 손상이 온 사람에게는 인공 귀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뇌의 신호체계를 단순 보조하던 이 제품은 그러나 다른 활용법을 이해한 전신의 신경계를 단일 칩과 연결하도록 한 - 사이버네틱스 사의 한 직원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제품이 되었다.

먼저 이 칩의 효율성에 대해 관심을 보인 집단은 군대였다. 군에서는 가상현실, 즉 최신의 AI성능을 활용하여 실전과 같은 전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전신의 신경계를 연결한 칩이 삽입된 군인들이 모의 전투훈련을 하도록 만들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인공위성을 사용하여 전장을 스캔하고 그 상황 그대로 만든 가상현실에서 모의훈련을 한 병사들은 실전에서 0%의 사망률과 100%에 가까운 작전 성공률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회사는 일반인을 위한 시술과 판매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부 도전적인 젊은이와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노인들에게 무료로 시술하고, 자신들이 만든 가상현실에 그들을 풀어놓았다.

그들은 거기서 왕이 되었고, 유명한 연예인이 되었으며, 카사노바였고, 잔인한 독재자가 되기도 하였다.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이 가상현실에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초기 시술자들의 TV광고 - 심지어 성별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는 마지막 멘트를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새로운 기술을 경험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 사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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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생아를 가진 부모에게 앞으로 당신의 아이는 평생 동안 가난한 화가로만 살아가야 한다거나, 기계를 수리하는 엔지니어의 보조기사로서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처음에 가졌던 마음가짐이 변하기도 하며 환경에 따라,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자신의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 누구나 쿠키마스터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 조직은, 입사하는 순간부터 자기 할 일이 딱 정해져 있고 결코 그것을 바꿀 수가 없다.

 

후보생 자격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닥터와 카탈리스트의 존재와 그 비밀스런 역할을 들은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카탈리스트가 되기를 꿈꾼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누구나 멋진 피스톨을 들고 악당을 무찌르는 주인공 007역을 하고 싶어 하지 형광등만 비치는 지하 벙커 아래서 비밀무기나 만들고 있는 반 대머리 코드네임조차 기억나지 않는 무기백업 과학자로는 살고 싶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 우리 후보생 모두는 주인공, 카탈리스트가 되기를 원한다.

낡은 터미널 앞에서 키보드나 열심히 두들기고 있는 닥터뒤에서 멋진 선글라스를 쓴 채로 짐짓 뒷짐을 지고선, ‘아직 분석중인가? 서두르게. 너의 그 작업이 끝나면 내가 저 못된 녀석을 처리할 테니까.’라고 명령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 누구도 닥터 역할 따윈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Z’가 나에게 적성검사 결과를 알려주었을 때,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바로 항의하는 태도를 취했다. 나는 닥터가 아니다. 나는 카탈리스트가 되어야한다 라고.

그러자 그가 다시 특유의 킥킥거리는 웃음을 내게 던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류철을 가리켰다.

결과는 닥터야. 상층부에서 내려온 문서를 보게.”

처음엔 누구나 다 자네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지. 울며불며 매달려도 보고 당장 그만두겠다고 협박도 하지. 그렇지만 결국엔 다 받아들인다고. 시간이 지나면 말이야.”

맞는 말이다. 최상부의 결정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누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들은 콧방귀조차 한 번 뀌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목적을 위해서는 내가 꼭 카탈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번거롭겠지만 닥터의 위치도 많은 도움이 된다. 아쉽지만 지금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에서 바로 나가려고 하자 ‘Z’가 당황한 듯 나를 불러 세웠다.

그게 끝이야? 그냥 닥터로 살겠다고?”

내가 변경불가 명령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자, 그가 실망한 듯 입술을 반쯤 깨물고서는, “젠장. 좀 더 격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실망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듯 나를 향해 손을 몇 번 휘저었다.

그러던 그가 내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기 직전에 무엇인가 재미난 것이 생각났다는 듯, 다시 킥킥 웃으면서 나를 불러 세웠다.

이런 일은 드문데 말이야 알았다. 오케이. .’ 이런 식으로 오늘의 만남을 정리하기에는 뭔가 아쉬워. 그래서, , 내가 선물을 하나 주지. , 단순한 정보일 뿐이야. 기념 머그컵 같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네.”

그러면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가 내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다.

알고 있나? 프로토콜에 어섯 번째 항목이 있다는 것 말이야. 몰랐지? (이건 고위급 책임자들만 알고 있는 정보라고.) 내가 자네에게만 주는 특별 선물이 바로 이것일세. 알려지지 않은 여섯 번째 항목이 그 프로토콜에 있다는 정보 말이야. 하하하하.”


 


 

분류가 끝난 후보생들은 약 반년 정도 각자의 임무에 맞는 특수 교육을 따로 받았다.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이 후보생들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은 생겼음을 고백해야겠다.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지능, 빠른 판단력 등 그들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주어진 훈련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다. 물론 카탈리스트 후보생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우리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우리의 목숨을 쥐고 있는 그들은 우리보다 뛰어난 능력을 반드시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조직 D.D.T (men who use Dynamic Debugging Tools) 또한 우리에게 최고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으며, 최상위 보수를 받았고, 최고가 아닌 식사는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혜택은 공짜가 아니다 - 기억하자. 공짜 점심 따윈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 조직은 그 대가로 목숨을 담보로 한 영원한 충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닥터에게 알맞은(혹은 카탈리스트에게 알맞은) 파트너가 결정되는 시기가 왔다. 작은 홀에 모여 초조하게 동료들끼리 누가 파트너가 될지, 혹은 자신의 파트너는 미리 점찍어둔 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사항들을 소곤거리고 있을 때, 시작을 알리는 벨이 홀에 울리고 그들, 카탈리스트들이 인사 담당자 ‘Z’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짐짓 긴장한 듯한 표정의 카탈리스트들이 들어오고 멀찌감치 일렬로 늘어서자, 능글맞은 표정의 Z가 입을 열었다.

호명하는 닥터는 각자의 카탈리스트 번호 앞에 서도록.”

1번부터 25번까지 차례로 이름을 부르고,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흘끗 보면서 특유의 비웃음과 함께 나를 호출했다.

“26, 조니 타일러.”

내 파트너는 ‘M’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내가 후보생일 때 지켜봐왔던 사람 중 한명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움직일 때에는 날카로운 나이프 같은 남자. 그리고 뭔가 숨기는 과거가 있는 사람.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걸어가자 그가 먼저 살짝 목례를 하면서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고선 내 코드네임을 불러 주었다. ‘J’. 나도 같이 목례하고는 ‘M’하고 그의 코드네임을 조용히 불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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