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냄새

 

  냄새가 났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냄새부터 났다. 묵은 담배 진과 지하실의 곰팡이가 섞인 것 같은 냄새.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낮선 사람의 낡은 트렌치코드에서 냄새가 올라온다. 오른 손을 올려 입을 가리려다가 그것이 신사적인 행동이 아님을 번뜩 깨닫고는 고개만 아래로 숙였다. 그가 신은 스키니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한 방향으로만 닳은 밑창에, 급히 수선한 듯 신발 옆구리는 실밥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코털처럼 밖으로 쭉 삐져나와 있다. 
  그가 먼저 탄 나를 보고서는 인사하듯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내딛어 내 앞에 선다. 나는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띠우고 그의 인사에 답하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방향제부터 뿌려달라고 해야지. 이 냄새가 배기 전에. 

  며칠 전부터 이런 사람들의 방문이 늘었다. 이 빌딩은, 얼마 전만해도 이 회색의 빌딩에 달린 엘리베이터는, 자부심으로 무장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만 올랐다. 물론, 1층과 2층에 위치한 대형 카페와 한국식 레스토랑 때문에 길을 잘못든 손님들이 가끔 이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도 있었지만, 최소한 그들이 풍기는 냄새는 평범했다. 싸구려 데오드란트와 미처 털어내지 못한 그날 하루의 땀 냄새 - 거리를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가 났을 뿐, 오늘처럼 이렇게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의 역한 냄새는 아니었다.

  회사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임원인 변호사 한 명과 여비서의 횡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M&A를 진행하던 우리 쪽 기업의 비밀계획을 상대편에 팔고선 내부 금고에서 공금까지 털어서 그 둘이 해외로 튄 것이다. 꼼꼼히 계획한 그들은 약 5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들고 하루 만에 아시아로 내뺐다. (지금쯤이면 이 둘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동남아의 어느 해변에서 뒹굴고 있겠지) 법률회사로서, 이런 소문은 빠르게 다른 곳으로 확산된다. 회사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고, 그 많던 기업의 의뢰 수는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 쳤다. 회사의 돈줄이 되어주던 기업들이 한 번에 빠져나가자 주주들은 사장을 들볶기 시작했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사장은 얼굴을 붉히며 우리에게 소리쳐댔다.  

‘모아야 하네. 한 명이라도 더 모아야 해.’ 

 회사의 파트너이자 나의 상사인 드레이크는 그렇게 이야기 했다. 한 건이라도 더 가져와라. 뭐든 좋아. 돈 냄새가 난다 싶으면 일단 들고 와.
  더 이상 예전처럼 기업들이 돈다발을 들고 찾아오지는 않는다. 나가서 계약을 따내야 했다. 그게 누군가의 유언장이든 간단한 민사 소송이든 부동산 임대 계약이든 무엇이든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낚아야 했다 – 누구보다도 먼저 말이다.
  직원들은 예전이라면 이런 푼돈에 기웃거리는 자기 자신을 보면 한심하다고 여겼을, 그런 잡다한 일들을 하나 둘 씩 사무실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가죽 서류가방을 들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로 채워지던 회의실은 점차 운동화와, (몇 년은 같은 옷을 입어서) 소매가 검게 때가 뭍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들로 빠르게 교체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게 사무실에 흐르는 공기의 냄새도 달라졌다. 

  발 빠른 자들은 부동산 임대 관련 법률처리부터 잡았다. 일은 쉽고, 무엇보다도 계약금이 먼저 들어온다. 그러나 이쪽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푼돈의 임대료를 내면서 건물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사람이나, 건물 한켠에 한 자리 차지하고서는 농성에 가까운 점거로 건물주의 기운을 빼는 거렁뱅이들, 즉 '노숙자'들을 다뤄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회사는 이런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일들을 우리 같은 '양복'이 직접 처리하도록 하지 않는 선에서, 회사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직원들에게 보여 주었지만(회사는 이런 일에는 '어깨'들을 고용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것도 비용이 나가는 일이고, 직원 입장에서는 이런 노숙자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어야 하는, 불편한 만남을 몇 번은 반드시 가져야 했다. 




  가벼운 모터소리를 울리면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불편했던 생각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다만 이제는 예전처럼 서류철 가방에서 올라오던 가죽냄새나 고급 디올 향수냄새와 빳빳한 새 명함에서 풍겨오는 잉크냄새와 함께 일을 시작할 수 없다는 현실을 생각하니, 잠깐 짜증이 밀려왔을 뿐이다.
 그래, 냄새 때문이야. 이 냄새 때문에 하루의 시작이 엉망이 되었군. 이제 몇 층만 올라가면 된다. 문이 열리면 마담 드비어에게 부탁하는 거야. 방향제부터 뿌려달라고 하는 거야. 이 냄새가 내 몸에 배기 전에.

 

< Turning Into You - The Off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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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 욕망의 뿌리

 

  “환자분, 사망할 확률이 50%입니다. 너무 늦게 왔어요.”

  의사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농담인줄로만 알았다. 부모님께 연결된 휴대전화로 50%라는, 그 이상한 사망확률을 똑같이 반복하는 의사를 보고서야, 이것이 심각한 일임을 알았다. 

  산책 중에 시작된 가슴의 통증이 집에 와서도 멈추질 않았다. 참아보려 했으나, 가슴의 고통은 그 한계를 이미 넘었다는 듯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앰뷸런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도, 가슴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무거운 해머로 내려치는 듯 고통스러웠으며, 숨은 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몸에서 난 식은땀은 구급차의 시트를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병원에서 조영제와 마약성 진통제를 맞아 몽롱한 상태에서도 가느다란 철사가 내 핏줄을 뚫고 지나가는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당장은 저 작은 스프링 하나에, 그것을 다루는 의사의 손길에 내 목숨이 달려 있다는 생각보다는, 내 심장이 이렇게 작았구나 하는 생각만, 그때는 그것만 떠올랐을 뿐이다.

  병원에서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운이 좋았다 - ‘환자분 운이 좋았어요.’

  며칠을 중환자실에서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똥도, 오줌도 내 스스로 일어나서 눌 수 있다 –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매일 행했던 이런 작은 일들도, 사람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이 병원이라는 곳이다.

  일반 병실에 누워 생각해 본다. 남은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렇게 거창한 것 보다는 내 삶의 버켓 리스트를 하나하나 짚어본다. 기타를 배우겠다는, 신나게 기타 줄을 댕겨보겠다는 바램. 글을 쓰고 소설을 쓰고 생각을 나누어 보고 싶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조용히 같이 늙어 가는 것.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를 무척 좋아한다. 그 소설에서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주인공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앞에 놓인 이상한 부조리에 맞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신분을 얻어서 부자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는 것 –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나라는 작은 존재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 작은 삶에서의 큰 의미를 깨닫고, 그 힘으로 세상에 맞선다.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태엽을 감으며, 작은 삶이지만 그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사는 것. 시련이 있으면 같이 사는 동반자와 함께 헤엄치며 넘으면 될 것이다 - 나는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가며 늙어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오카다 도루’와 그의 아내 ‘오카다 구미코’처럼.

 


 

  아내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그것도 꽤나 오래된 사이의 애인.

  아내는 조심스러웠다. 처음엔 친구를, 다음엔 동네 모임을, 이후엔 처가까지 핑계거리로 팔아넘겼다. 나중에는 핑계 대는 것도 귀찮아지자, 아내의 직장 근처에 애인과 둘만의 집까지 잡아서 저녁이나 주말이면 둘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슴 아픈 것은 아내와 그녀의 애인이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내 휴대전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혹시나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들킬까봐서 내 핸드폰을 조작하도록 도왔고, 그리하여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 지 남김없이 자신의 애인이 알게 만들었다. 우리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우리 집에는 한 명의 이상한 사람이 더 살고 있던 셈이다. 누군가가, 내가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안방에 똬리를 틀고선 집 안팎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셈이다 –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것부터 부부사이의 일들까지.

  나는 이것을 오래된 내 핸드폰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우더라도 흔적은 남는 법.

  20년이 넘은 이 둘의 은밀한 관계가 어떻게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아내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 20년 전 당시에는 내 사생활 전부를 제 3자에게 넘겨줄 정도로 우리가 모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협박을 받았고, 그로인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 하긴 그게 사실이더라도 남에게 까발려진 남편의 사생활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방식은 분명 잘못되었다.

 


 

  생각해 본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오게 한 욕망의 뿌리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천박함이라고. 남의 아내를 협박하여 남의 가정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남의 손으로 자신의 가정의 일상을 그대로 전달한 그 두 사람의 욕망의 뿌리는 불륜이라는 천박함 그 자체라고.

  결국 내가 살고 있던 가정이라는 세계는, 소설 [태엽감는 새] 속의 주인공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가 아닌, 오카타 도루와 와타야 노부루의 관계였던 것이다. 주인공이 그렇게나 싫어하던 와타야 노부루의 – 천박한 섬의 원숭이가 그들의 관계였던 것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순환하는 천박함의 사이클.

 

  「어딘가 아주 먼 곳에 천박한 섬이 있었어요. 이름을 붙일 만한 섬도 아니죠. 아주 천박한 모양의 천박한 섬으로, 그곳에는 천박한 모양을 한 야자나무가 잘 어울리죠. 
그 야자나무는 천박한 냄새를 풍기는 야자 열매를 만드는데, 마침 그곳에는 천박한 원숭이가 살고 있고, 그 천박한 냄새를 풍기는 야자 열매를 좋아해서 즐겨 먹죠.
그리고 천박한 배설을 하죠. 그 배설물은 땅바닥에 떨어져 천박한 토양을 더욱 천박하게 하고, 그 토양에서 자란 천박한 야자나무를 더욱 천박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한 순환이 계속 되는 거죠.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겁니다. 어떤 종류의 천박함, 어떤 종류의 물구덩이, 어떤 종류의 어두운 부분은 그 자체의 힘으로 그 자체의 사이클을 통해 점점 커지죠.
그리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 아무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게 되죠. 가령 당사자가 멈추고 싶어도 마찬가지예요.」 

 


 

  ‘환자분 운이 좋았어요.’

  그렇다. 나는 운이 좋았다. 급성 신근경색에 결렸어도 절반의 확률에도 살아남았고, 이 이상한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기회가 생겼으니 어쩌면 의사의 말대로 50%의 행운이 함께 한 것인지도 모른다.

  병실의 천정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본다. 의사의 말처럼 죽다 살아난,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여행도 가고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저 버켓 리스트에 한두 가지 항목을 추가한 것 정도일 뿐이다. 사실 100% 깨끗하게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금의 모습을 만들고, 지금의 모습으로부터 미래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과거 없이 미래가 없는 것처럼, 내개 있었던 지난날의 과오나 슬픈 일들을 마냥 잊고 앞으로만 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 최소한 나는 그렇다.

  다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하루하루의 태엽을 감으며 살아가고, 그러다보면 언젠간 좋은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의 나, 50% 확률이라면 이런 믿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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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왜 우리는 잔인한 컴퓨터 게임을 하는가?

 

  이 글은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Dead by Daylight)’라는 게임의 플레이 영상(Youtube 풍월량 )을 재미있게 본 후 쓴 소설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각종 과학적 기술 등은 모두 현실과는 관계없으며, 글쓴이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또한 게임 내용 자체가 다소 잔인하며 이 글에서도 그러한 읽기에 불쾌한 내용이 표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잔인함의 표현 수위는 대충…….

 

<이 이미지에 표현된 내용보다 더 잔인할 수 있어요>

 

 

 

1. 식인종(The Cannibal) 살인마의 시점

  입술에 묻은 붉은 액체를 혀로 핥아 본다. 따뜻하다. , 이 얼마만의 희열인가! 오랫동안 갈구해 왔으나 채울 수 없었던 내 욕망들이, 욕구가 꿈틀대며 오늘의 이 축제(Carnival)를 즐기듯 춤춘다. 발밑에는 모락모락, 내 발밑에는 두 조각난 남자의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차가운 새벽하늘의 별빛을 흐트러뜨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검붉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생각난다. , 이제야 생각난다.

 

  나는 엄마와 둘이 살았다. 작고 허름한 창고 같은 집에 엄마와 둘이 살았다. 낮에는 강아지, 염소와 놀았고 저녁이면 나는 집 바닥을 배회하는 쥐들을 사냥했다. 허름하고 벌레도 많은 창고 같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밤이면 엄마는, 엄마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고 그윽한 목소리로 자장가도 불러 주었다. 어떤 날에는 재미난 이야기도 해 주었는데, 엄마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창녀이거나 창녀의 자식이라고 했다. 그들이 어떻게 악마의 구멍을 통해 세상에 왔으며,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지도 알려 주었고, 그리고 조만간 신이 그들을 두 조각으로 만드는 벌을 내릴 거라면서, 가장 먼저 그 처벌을 받을 사람은 나의 아빠라고 했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예뻐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아들이라며 늘 나를 아꼈지만,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게 하였다. 한 번은 잃어버린 개를 찾기 위해 집 앞 늪지대에 혼자 나섰는데 홀로 집 밖으로 나온 나를 발견한 엄마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선 곧장 나를 집으로 끌고 갔다.

  나를 향한 매질이 끝난 후면 엄마는 늘 기도를 드린다. 작은 유리조각이 하늘의 은하수처럼 무수히 박힌 방석에 두 무릎을 꿇고 엄마와 나는, 신에게 용서의 기도를 드린다. 오랜 기도가 끝나면 엄마는 내게 자장가를 불러 주었고 나는 상처에 흐르는 피를 핥았다. (그런 행위는 상처를 빠르게 아물게 해 주었다.)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내가 누군가의 얼굴 가죽과 한 쪽 팔목을 뜯어 집으로 왔을 때, 그날만은, 엄마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그냥 멍한 얼굴로 조용히 집 한 쪽에 쭈그리고 않아 천장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사실 나는 그날 화가 나 있었다. 왜 엄마는 내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인가? 나는 사람들은 다들 나처럼 생긴 줄 알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들과 같은 모습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곧고 바른 두 개의 눈동자와 얇고 붉은 입술, 선명하고 진한 눈썹을 지녔다. 게다가 손가락 개수도 달랐다. 왜 우리는 세 개의 손가락만 있는 것인가? 말로는 믿지 못할 것 같아 나는 그것들을 뜯어 가져갔다.(물론 이후 상처는 빨리 낫도록 잘 핥아 주었다) 그리고 엄마 앞에서 당당히 이야기 했다, 왜 나는 이것과 같지 않나?

 

  또렷한 기억. 어렸을 때의 삶이 이렇게나 분명한 모습으로 기억나다니. 보통 나는 내 이름도 기억을 못 하는데. 어라,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이 뭐지?

  뭐 차차 생각나겠지. 지금은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부차적이라... 내가 이런 단어도 쓸 줄 알았던가?) 어쨌든 지금은 신이 주신 이 능력으로 신이 주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될 뿐. 뼈를 썰다 보면, 이 따뜻하고 붉은 것의 맛을 보다보면 차차 알게 되겠지. 다만 조금 걸리는 것은 아까부터 누군가가 자꾸만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든다. 설마 신께서 직접 강림하시는 것일까? 이런, 서둘러야겠다.

  그래그래. 내 서두름을 아는 것 마냥, 왼쪽 손에 끼워진 체인 소(chain saw)가 울부짖으며 그릉그릉 거린다. 그래, 늦기 전에 어서 남은 사람들을 처리 해야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원래의 장소로 보내야해 이 일이 바로 신이 원하는 바이고, 내가 반드시 마쳐야 할 임무니까.

 

 


 

 

2. 어느 연구원의 시점

19:13 08/07/20xx 기록함

 

  갑작스럽게 에크모(ECMO)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시험체에 진정제 10mg을 투여했다. 투약 조치가 늦지는 않았지만, 이것으로 인해 실험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큰일인데......

일단 약물 투여한 내용은 보고서에서 빼야겠다.

 

  물리학(11차원이라니!)을 전공하고 졸업 후 취업이 되지 않아 인간의 의식에 관해 연구하고자 나는 다시 심리학을 배웠다. 심리학 공부가 의외로 재미있어서 내친김에 학위까지 받았다. 학위 논문으로는 물리학과 심리학을 섞은 [꿈을 이용한 가상세계의 시간 역행에 관한 연구]를 썼는데, 이것저것 다른 논문을 짬뽕 짜깁기한 내용이 전부라서, 여러 번 수정한 다음에나 간신히 심사에 통과,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같은 년도 졸업생보다는 나이가 많아서 연구소 따위에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곳 고연봉 첨단 연구소에서 내게 오퍼를 주었다. 물리학과 생명공학의 결합이라며 침을 튀기던 채용 담당 선임연구원의 반쯤 맛이 간 모습에 도대체 연구원 잠은 재우는지 그 근무환경이 의심스러웠지만, 이 나이에 갈 데가 별로 없었고, 보수는 의외로 나 같 늙다리에게 주는 것 치고는 꽤나 높았기 때문에 배부른 고민을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선택지가 없을 때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다고 쓰는 편이 더 뽄대난다 낫겠다.)

  어쨌든, 나는 이곳 연구소에서 양자암호를 연구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자 암호화된 기밀을 풀 수 있는 만능열쇠를 구현하고 있다.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일반적인 암호화 방식과는 다르게 양자암호는 도감청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양자화된 정보를 탈취하기 위한 시도, 그러니까 정보를 담은 광자(혹은 전자)를 관찰(복제)하는 순간 그 정보가 바로 의미 없는 내용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쓴 논문에 달린 주석 중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독약이 든 상자 안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편 참고)

  그래서 양자암호를 도청하고 풀기 위해서는 양자상태를 저장할 수 있는 용기(container)와 암호를 풀어내는 도구(method)가 꼭 필요하다. 내가 있는 이 연구소에서는 정보가 담긴 양자를 저장(중첩상태를 복사할 수 있는 기술이라니!) 할 수 있는 컨테이너는 어떻게든 만들어 낸 것 같다. 다만 문제는 이것이 일회용이라는 것인데, , 정보가 복사된 양자는 재복사가 불가능하며 단 한 번의 해독 시도만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해독된 정보가 진짜 정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여기서 그들은 내 가짜 짜깁기한 논문에서 해결책을 찾았다고 한다. 내 논문에 따르면 꿈속에 만들어진 가상세계에서는 정보를 언제나 뒤로 돌릴 수 있어서 처음 상태로 초기화를 하더라도 이전의 정보 내용 그대로 100% 되돌릴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복사한 암호화된 정보를 꿈에 심어서 꿈속에서 그 정보를 해독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들은 내 논문에 있는 것을 허락 없이 베껴서 꿈속에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곳에 양자화된(암호화된) 파동을 심었다. 해독을 위해서 꿈속에 약간의 규칙과 단순한 미로를 만들고 그 미로를 빠져나오는 방법(method)으로 암호를 풀도록 시뮬레이션을 만들었다. 그리고 만일 답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꿈을 리셋하도록 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오류가 가득한 가상세계를 만들어 시험체들을 가사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전도유망한 어느 포닥(postDoc)이 손들고 첫 번째 시험체가 되었는데, 실험 도중 뇌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연구소는 비용의 이유로 뇌만 절제하여 투명한 어항 속에 공기를 주입하여 연구용으로 보관 중이다.)

사실, 실험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한데, 첫째, 만들어진 가상세계의 미로가 너무 인위적이라는데 있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미로는 미로 자체가 파동 입자에 간섭하여 붕괴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가상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영화 인셉션에서 림보에 빠진 주인공처럼 된다) 둘째, 해석을 위해 투입한 실험체가 미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 출구를 찾는 과정(method)은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출구라는 결과물을 갖기 위해 행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관찰자의 행위가 파동입자의 빠른 붕괴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 경우 미로를 빠져나오더라도 그 결과 값이 옳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는,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였다.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자 스스로 미로를 만들게 하고 가상의 세계 크기를 제한(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제한)했다. 그리고 실험체가 림보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 30분의 시간이 되면 가상세계가 처음상태로 다시 돌아가도록 리셋기능을 넣었다. 두 번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조금 번거롭지만, 실험체가 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파동입자를 쫓아가도록 만들었다. 미로의 탈출이 문제가 아니라 입자의 붕괴를 일으키는 사건 자체가 핵심이므로 실험체 자신이 파동입자가 만든 미로에서 그것과 접촉을 일으키는 사건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제한된 공간에 네 개의 임의의 희생자(암호화된 입자)라는 존재를 심어두고 그것을 쫓아가는 살인자(시험체)라는 세계를 제안했다. 네 명의 희생자 모두가 살인자에 의해 갈기갈기 분해되고 찢겨지면 가상공간은 스스로 무너지면서 복호화된 파동함수가 모니터에 나타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당하게도 이 엉뚱하고 괴기스러운 내 제안은 세미나실에 있던 모든 임원들의 만장일치로 단칼에 승인되었다. 아니 이게 뭔일이여!

 

  그런 결과로 나는, 이곳 습기 가득한 지하 연구소에서 암울한 표정으로 실험체가 된 사람들을 모니터링 하고 있다. 내가 제안하고 내가 설계한 이 이상하고도 말도 안 되는 실험에 잡혀온참여한 실험자들이 희생자들을 잘 사냥하고 있는지 모니터로 감시하면서, 때로는 기억을 임의로 조작하여 살인자가 된 이유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그들의 뇌에 심어 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몇몇 실험은 결과가 좋아서 방금 전의 실험체는 첫 번째 희생자를 마무리했다 일반인에게까지 실험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시뮬레이션을 컴퓨터 게임으로 만들어서 게이머라는 남는 자원을 일반인들을 이용할 계획이다. 게임은 은근한 사냥 본능을 자극하도록 만들고,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심리적 함정을 몰래 심어놓을 것이다. 높지 않은 가격표를 붙이고(무료로 뿌리면 오히려 사람들이 안 한다), 유명 스트리머들을 동원하여 대중에게 방송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게이머들이 이 연구소에 알아서 자원하고자 몰려들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작게 이 글을 남겨 놓는다. 경고를 하기 위해, 이 게임에서 멀어지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혹시 나는 무서운 것을 싫어하는데 이상하게도 잔인하고 고통 받는 이 게임이 재미있고 자꾸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다. 당신은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 기괴하고 끝없는 실험의 예비 숙주로, 결코 깨어나지 못하는 영원히 반복되는 림보 지옥에 들어가는 준비를, 당신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 어서 이곳에서 탈출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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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의 요정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옅은 담배 내 나는 내 행운의 자리를 찾아

의자 위에 자켓을 올려 두고 책상 위 둥근 전원을 누르면,

그 버튼을 살짝 누르면,

냉각팬은 시시식 거리며 나를 반기고,

명량한 스피커는 타다! - 쇳소리로 나를

20층 아파트 옥상에서부터 지하까지

외줄에 묶여 흔들리던 내 하루를,

위로하는 그 기계음

타다

! 이 순간만큼은 행복해.

 

채널 19에 살고 있는

나의 요정 그녀는 나의 평일의 요정

그녀는 오늘도 내게 미소 짓지.

그녀는 오늘도 내 이름을 부르지. 적립금이 있는 한, 별풍선이 충전되어 있는 한,

그녀는 내 이름을 불러주며 춤추네.

 

정해진 선불의 시간이 모니터에서 삼십분

삼십분 남았다고 지껄이면

뒤져보자.

주머니 속에 꾸깃꾸깃 오천 원. 아쉽지만

담배는 피워야해 아쉽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여기까지.

 

삐걱거리는 철문,

붉은 녹물이 눈물모양처럼 박힌 문을 조용히 열고선

컵라면 국물 자국이 담배빵처럼 노랗게 번진 이불에 쏙 들어가

잠들기 전,

두 손을 비비며 생각의 나래를 펼쳐본다.

그녀는 어떤 향기가 날까

어쩌면 헤드앤숄더’. 첫사랑 그녀가 쓰던 샴푸. 그래,

그녀도 그 쿨한 향이 날거야.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냄새가 날 거야.

 

 

회색의 바다 깊숙이 들어가듯 의식이 잠들 때, 그녀는 다시 나타나네

 

네모난 상자에서

살며시 다가와 내게 미소 지으며

은빛의 환상 심어주는 그녀는 나의 요정

그녀만 있으면 난 외롭지 않아

그녀만 보면 난 외롭지 않아

 

 

<샴푸의 요정, 빛과 소금,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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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몇 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 큰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오른 손에 단추를 든 채 자기 앞에 서있는 작은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마법처럼 사라졌어. 리암. 그는 어디에 있죠?”

키 작은 사내가 굳은 몸을 곧게 펴듯이 크게 몸을 뒤로 한 번 젖힌 후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아직 저기 그 자리에 있네, 자신이 소비한 여분의 시간만큼 몸이 극도로 작아졌지만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야.”

그게 가능해요? 그리고 눈에 안 보일정도로 작아졌다면 오히려 해를 끼칠 가능성이 더 늘어난 것 아닌가요?”

조나스, 그는 이제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해. 아주 작고 반복적인 공간속에 갇혀있거든.” 리암이 키 큰 남자를 한 번 처다 보고선 말을 계속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방이 거울로 덮인 작은 집에 홀로 갇혀 있는 것과 같은 상태지.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문을 열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 풍경이 보인다네. 창문을 열면 창문을 열고 있는 자기 뒤통수가 보이는, 여러 장의 거울 속에 자신이 비춰진 것과 같이 작고 반복적인 공간, 그곳에 그가 있는 것이지 홀트씨는 이제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어.”

조나스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크고 둥그런 눈을 반짝이면서 그를 쳐다보자 리암이 빙긋 웃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거기에 영원히 갇힌 거야. 그가 가진 무한의 시간이 지나도 그자는 이제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내리는 눈발이 짙어지고 차가운 바람이 작은 소용돌이가 되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가자 리암이 반쯤 잘려나간 자신의 코트 옷깃을 손으로 당기면서 조나스에게 이제 그만 움직이자는 눈빛을 보냈다.

조나스가 리암의 곁에 바짝 붙어 걸으면서 다시 그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왜 시간 여행자들은 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죠?”

 

리암이 우울한 얼굴로 브리지 아래를 보면서 걸어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았어. 역사적인 국가의 생성과 종말에서 최초의 인간들이 탄생하는 순간. 지구의 탄생과 파괴, 그리고 생명의 시작과 끝. 심지어 시간이 시작된 순간과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게. 홀트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반복적으로 보고 느끼고 경험했네. 그런 일들을 직접 겪게 되면 아마도, 깨달음 같은 게 오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마지막으로 남은 호기심 하나.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시간 여행자가 되기 전인 자신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그래서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없애러 오는군요?” 조나스가 추운 듯 연신 손에 입김을 불어 넣고 양 손을 비비면서 말을 했다.

그래, 자기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부모의 결혼을 방해하거나 아직 어린 자기 자신을 죽이러 오는 거야. 그렇게 하면 시간 여행자의 역설이 어떻게 해결될 지 궁금해 하면서. 그런데, 홀트 씨는 호기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아마도 말이야, 그 사람은......”

다리 위로 계속 쌓여가는 눈을 밟고 걸어가면서 리암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어쨌든, 그런 시도는 용납할 수 없네. 시간 여행을 하는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우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만일 누군가가 성공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리암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조나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이 사라져.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역사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일순간에 모두 지워지는 거야.”

그래서 오늘처럼 눈이 섞인 찬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우리가 일을 하는 거죠? 여행자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잘 아는군. 이제 좀 적응이 되나? 그건 그렇고, 시계 확인은 했나, 조나스?”

리암의 말에 조나스가 당황한 모습으로 주머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 . 32520, 시계가 멈춘 시간이에요, 선배.”

잊기 전에 기록해 두게, 지금 당장.”

.” 짧은 대답을 한 후 조나스는 자신의 두꺼운 책을 펼쳐 방금 자신이 말한 시간과 일어난 사건을 그 책의 한 여백에 조심스럽게 기록했다.

“182714, 새벽 32520. 런던 브리지 다리 위 세 번째 가스등에서 리암니슨이 니콜라스 홀트씨의 오른쪽 소매 단추를 눌러 칼날을 멈추게 함. 이후 그것을 돌려 떼어냄. 홀트씨는 점차 작어저서 결국 소멸.”

조나스가 자신이 쓴 내용을 확인하라는 듯 여백에 쓴 글을 리암에게 보여주자 리암은 그가 쓴 내용은 확인하지 않고 조나스와 똑같이 생긴 자신의 책을 꺼내어 한 페이지를 펼쳐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 보게. 자네가 방금 쓴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지? 정자로 글씨체도 괜찮군, 잘 썼네.”

, 이럴 수가. 정말 그렇군요.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었는데. 정말 제가 쓴 그대로 똑같이 써져 있어요.”

그래, 그럼 이제 이것도 이해가 가지? 두 책은 원래 하나다. 다만 존재하던 시간만 다를 뿐이라는 것.”

잘 모르겠다는 듯이 조나스가 멋쩍은 미소로 머리를 긁적거리자 리암이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이 책은 태초의 여행자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네. 시간의 역설이 발생하는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하기에 시간여행자들이 원형 고리로 만들어버린 자신의 시간을 깨뜨리려고 하는 위치와 시간이 기록되도록 만들었지. 같은 모양의 책이 두 권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은 한 권만 존재해. 다만 기록하는 자와 보는 자가 다를 뿐이야. 지금은 나, 리암이 읽는 자. , 조나스는 쓰는 자. 내가 미리 사건을 보고 준비하고, 불량한 여행자에 대한 처리가 완료되면 네가 기록하는 거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조나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분명히 이렇게.......” 그가 자신의 책과 리암이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을 겹쳐보면서 그에게 항의하는 투로 말을 했다.

분명히 이렇게 두 권이 있는데 어떻게 이게 하나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분명히 한 권의 책일세. 존재하던 시간대가 다를 뿐이야.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긴 하지. 하지만 방금 보았지? 자네가 오늘 사건을 기록하자마자 여기에......” 리암이 그가 가지고 있는 책을 다시 조나스에게 보여주었다.

자네가 쓴 내용이 나오지 않았나? 네가 쓰면 나는 보고, 내가 본 대로 행동하면 다시 네가 쓰는 거야.”

바닥에 쌓인 눈이 길고 날카로운 바람에 쓸려 하늘로 올라가면서 그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자 조나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회전하는 시간의 고리에 엮인 이상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불가능하거나 금지된 것은 아니지.”

 

혼란스럽다는 듯 계속 인상을 쓰고 있는 그를 처다 보던 리암이 다시 앞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눈발과 바람이 점점 매서워지는군. 이제 좀 따뜻한 곳으로 가지 않겠나? 여기서 계속 서서 이야기만 하다가는 몸이 완전히 얼어붙겠네.”

조나스가 자신의 책을 얼른 품에 넣고 리암의 왼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두 사람은 다리 위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에 하다 만 이야기 계속 해 주세요.” 조나스가 리암의 얼굴을 보고 걸어가면서 다시 이야기를 재촉했다.

, 그 오 분 전 과거로 반복해서 이동해서 자신을 계속 복제하던 시간여행자 말인가?”

조나스가 바로 그거라는 의미로 입가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분신이 계속 나타나자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서 있을 공간조차 없어질 정도로 수가 늘어나자 자기들 끼리 싸움이 붙었지. 모두가 내가 진짜 본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야. 그러다가.........”

 

브리지 위에 걸려 있는 마지막 가스등이 모자를 푹 눌러 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다리 끝까지 길게 늘이려는 듯이 한 점으로 밝게 타올랐지만, 뿌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쌓인 눈길을 바쁘게 걸어가는 그 두 사람은 가스등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 작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걸어가기만 했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발자국들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는 눈과 바람에 점차 지워지고 해가 지평선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 때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리위에는 쌓여있는 눈 이외에 그 세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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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런던 브리지 위 어둑한 가스등 불빛아래에 검은 그림자 세 개가 바람에 흔들린다. 짙은 안개와 흩날리는 눈발이 다리위의 그림자에 무게를 더하듯이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두꺼운 코드와 모자를 푹 눌러 쓴 세 남자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미동도 없이 어두운 다리 위에 꼿꼿이 서 있기만 했다.

양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작은 여행용 가방을 왼 손에 쥐고 있던 남자가 이윽고 자기 앞 길을 가로막고 있는 두 남자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 재미있군.”

고운 양털로 만들어진 그의 코트 소매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털실 한 가닥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살랑거리자 그에 박자를 맞추듯 가스등 불빛이 깜박거리면서 세 남자의 그림자를 좌우로 흔들었다.

가방을 든 남자의 맞은편에 있는 두 남자 중에 키가 작은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홀트씨, 우리는 당신을 돕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홀트라고 불린 남자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팔짱을 끼면서 말을 했다.

내가 여기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거지? , 정말 재미있어.”

두 남자는 말없이 그 남자를 계속 보고만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도 여행자?”

작은 키의 남자가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어떻게 내가 여기로 올 줄 알고 있었지? 어떻게 안거야?”

선생님. 지금 하려는 일을 그만둔다면 말해 드릴 수 있어요. 이건 옳지 않아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중절모를 쓴 키가 큰 남자가 그를 설득하려는 듯 오른손을 내밀었지만 홀트가 그의 손을 매섭게 처냈다.

,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라고?” 홀트가 당황한 듯 그를 쳐다보면서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당신들은 내가 여기에 온 이유도 알고 있다고?”

키 작은 쪽이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냐고. 내가 올 줄 어떻게 알았냐고!” 홀트가 화가 난 듯 주먹을 쥔 손을 두 사람을 향해 휘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봐, 난 지쳤어. 이 일에 신물이 난다고. 당신들은 알고 있지? - 여기까지 올 정도라면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왜 이러는지. 난 여기까지야. 오늘 여기서 이 모든 것을 끝낼 거야.”

잠깐만요, 선생님. 잠시만 제 말을 들어 주세요.” 큰 키의 남자가 한 발짝 다가서서 그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홀트가 뒤로 물러섰다.

홀트씨. 당신은 달라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모 쪽이었지만 당신은……. 이봐요. 우린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생각? 내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보는 거야? 시간은 충분했어, 그놈의 망할 시간,,,,,,. 그 시간을 여기서 끝내겠다고. 여기에 올 정도면 내가 누군지 알겠지? 그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얼마나.......”

 

홀트가 위협적인 몸짓으로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을 양 손으로 밀어내고 자신의 왼쪽 손목에 달려 있는 단추를 문질렀다. 그를 덮고 있던 코트가 조각으로 바로 찢겨져 나가면서 몸 안을 감싸고 있는 얇은 옷이 드러났다. 관절을 제외한 온 몸에서 형광색 불빛이 얇은 천 사이에서 새어나오듯 반짝거리고 그곳에서 간신히 보일 정도의 작은 실이 나타났다.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실이 길어지더니 칼날처럼 둥근 춤을 추면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 방법 밖에 없어. 죽기 싫으면 물러나.” 홀트가 위협을 하면서 한 발짝씩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실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위협적인 바람소리를 냈지만 키 작은 사람은 오히려 그가 서 있는 방형으로 한 발 앞으로 뻗었다. 그 모습을 본 홀트가 잠시 주춤하다가 찡그린 얼굴로 그가 있는 방향으로 오른팔을 들였다. 홀트의 팔에서 튀어나온 실들이 키작은 사람의 코트를 스치듯 지나가고, 잘려나간 작은 천 조각들이 발 아래로 떨어졌지만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채찍처럼 휘둘러대는 실 사이로 홀트의 오른팔을 낚아채서 그의 팔에 아직도 달려있는 양복 단추(Cuffs)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와 동시에 공기를 가르던 실들이 모두 멈추면서 힘없이 아래로 쳐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홀트의 오른팔에 달린 단추를 그가 다시 비틀어 떼어내자 홀트의 몸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느낀 홀트가 긴 비명을 질렀다. 그렇지만 그의 울부짖는 절규소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듯 그의 몸은 계속 줄어들어가고 점차 작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몸 또한 작은 점이되어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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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울적한 기분에 이 편지를 그대에게 보내오. ‘로이스나의 사랑이여. 

당신이 나만의 영웅으로 남을 수는 없겠느냐고 내게 물었을 때, 나는 바로 답할 수 없었소. 전 세계에서 울부짖으면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도 아니고, 내가 평범한 사람이 되어 아침마다 정해진 시각이면 꼬박꼬박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 되기 싫었던 것도 아니고 - 혹은 당신이 슬픈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던 렉스 루터의 그 비서(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와의 잠깐의 불장난에 아직 내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도 절대 아니오.

사실은, 내가 이제 슈퍼맨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고, 나의 아버지 의 정신이 깃든 AI에게 물었을 때, 그는 절대 그렇게는 안 된다고 내게 단단히 못을 박았었소. 너는 인류를 구원할 영웅이며 너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며, 그로 인해 자신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은 영웅으로서의 상장과 같은 표식이라면서, 슬픈 표정으로 내게 안 된다고 말을 했었다오. 그런 아버지의 영상 앞에서 내가 그래도 난 로이스가 좋아요라고 하자 그는 더욱 슬픈 표정을 하고서는 이렇게 춥고 외로운 북극의 기지에 이 아비만 남겨둘 거냐.’ 라면서 울고 있었소.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도 자기 좋은 일만 하겠다는 자식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당신도 이 상황을 이해하리라 생각하오.

 

어제는 높은 빌딩에서 작업 실수로 추락중인 한 인부를 구해주었는데, 글쎄 그를 바닥에 내려놓자 그 자식이 자기 지갑이 어디 있느냐고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오. 구해줬더니 보따리 찾는다고, 내 평생 그런 인간은 처음이었지.

또한 물놀이 중에 파도에 휩쓸린 한 커플을 구해 주었는데, 잠시 셀카를 한 장 찍자는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자 내게 마구 화를 냈었다오. 일 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돌 정도로 빠른 당신이 단지 사진 한 장 찍을 시간도 없냐면서, 내가 생색을 낸다고……. 게다가 그들은 나중에 [거들먹거리는 슈퍼맨]이란 제목으로 내가 날아가는 뒷모습(엉덩이만 크게 찍힌)SNS에 올리고, 좋아요 100개를 받았을 때는 내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대 생각이 더 간절하오. 그런데 이 스판. 내가 입고 있는 스판 100% 바지가, ........ 간지럽소. 특히 그 위에 빨간 바지를 겹쳐 입으면 그쪽, 거 있잖소, 거기에 좀, 땀이 차서, 간지럽소, 많이.

어쨌든, 오늘따라 그대가 더 보고 싶어서 이렇게 처량하게 빌딩 꼭대기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소. 내 사랑 로이스, 저 완고한 아버지의 AI도 언젠가는 내 진실한 마음을 보고 결국 당신과의 결합을 찬성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때까지 배트맨 같은 사이코가 접근해 오더라도 절대 맘을 주지 마시오. - . 그는 사이코가 맞소, 내가 그 녀석을 좀 알지.......

 

그대를 사랑하는 클라크 캔트, A.K.A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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