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선택과 양자 지우개 실험의 다른 해석

 

  일전에 올렸던 [지연선택과 양자 지우개 실험]의 결론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있어서 오늘은 그것을 소개.
 
  먼저, 양자 지우개 실험을 짧게 정리하자면, 

  1. 빛 혹은 입자는 측정이 행해지기 전까지는 파동의 속성을 갖는다.
  2. 이중 슬릿을 통과한 입자들(혹은 빛)을 작은 크리스털을 사용하여 절반씩 쪼갠(얽힘 상태) 후, 얽힌 반쪽의 입자를 측정하면 (Delayed Choice) , 나머지 반쪽도 즉시 입자로서 행동하며, 
  3. 어느 슬릿을 통과하였는지 나중에 그 정보를 지울 수도 있도록(Quantum Eraser) 조작을 가하면 그 반쪽 입자는 다시 파동의 성질을 띤다는 것을 확인하는 실험. 

  실험의 간략한 개요는 아래와 같다.

자세한 내용은 일전에 올린 글(https://nofreelunch.tistory.com/113) 참고.

 

  위 실험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인과성 위배이다. 이전에 설명했던 것과 같이, 스크린(위의 사진에서 interference screen이라고 표시된 부분)과 감지기 C, D의 거리가 스크린보다 더 멀고, 이것은 스크린에 이미 도착하여 입자로서의 특성을 보인 빛이,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자신의 얽힌 입자에게 가해진 측정치가 사라짐을 느낀 후,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서 자신의 특성을 파동으로 다시 바꾸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현재의 측정이라는 행위를 통해 입자가 자신의 과거 사건을 바꾼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꺼려하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빛보다 빠른 입자의 존재가 자신의 이론에 나타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인과율 위배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빛보다 빠른 입자의 증명은 아인슈타인의 이론 - 특수 상대성 이론과 대결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지금까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그리고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와 미래로 흘러가며 인과율의 영향도 그 순서대로 진행된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미래나 현재의 일이 과거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앞으로 가고 있는 화살이 과거의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아는 인과율이 즉시 와해될 것이라는 이야기의 다름 아니다. 

 

  각설하고, 일단 다른 쪽에서는 양자 지우개 실험의 이 인과율 위배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들어보자. 

 

  영상에서는 두 가지 전제를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이중슬릿 실험에서 하나의 슬릿만 통과한 빛(입자의 성질을 띤)은 입자가 아니라 하나의 슬롯을 통과한 파동이라고 설명한다.

<측정 시 빛은 하나의 슬릿을 통과한 파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양자 지우개 실험의 스크린에 나타나는 빛의 모양은(측정당한 빛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그림과 같이, 이중 막대기 모양이 아니라 하나의 얼룩 (blob) 같은 덩어리 모양으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얽힌 입자에 대한 설명이다. 얽힌 입자는 각각의 정보(spin)를 공유하고 있지만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측정이라는 행위가 있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얽힌 입자의 스핀의 합은 제로이다. 즉, 한 쪽의 스핀값을 알게되면 다른 쪽 얽힌 입자의 스핀값은 측정하지 않아도 그 반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얽힌 입자간의 스핀의 합은 제로이다>

 

  영상은 양자 지우개 실험을 다시 재현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아는 이야기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다만 설명에 사용한 전체 실험의 다이어그램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직관적이니 아래 그림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양자 지우개 실험의 간단한 도식. 빔 스플릿이 감지기 D3와 D4사이에 있어서 빛이 어느 슬릿을 통과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감지기 D3나 D4를 켜면 아래와 같은 간섭 무늬(interference pattern)를 볼 수 있다. 

<각각의 감지기는 이중 슬릿을 통과한 것 처럼 간섭무늬를 만들어 내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의 무늬가 다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 D3와 D4의 패턴은 서로 조금씩 다르며 그 둘을 합하면, 아래 그림처럼 얼룩 (blob) 같은 덩어리가 나타난다

<D3와 D4를 합하면 결국 하나의 blob 패턴이 만들어진다>

  다시 실험을 감지기별로 하나하나 살펴보자. 

  위의 그림에서 감지기 D1나 D2를 켰을 때 생기는 무늬는 간섭이 없는 형태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스크린에서 만들어진 무늬의 부분집합일 뿐이다. 즉, D1과 D2의 패턴을 합하면 그것은 스크린에 나타난 무늬와 일치한다. 다만 D1과 D2에서는 간섭무늬가 아닌 하나의 덩어리 모양의 무늬가 나타났을 뿐이다. 

  감지기 D3나 D4를 켰을 경우에는 간섭 무늬가 나타난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두 개를 합하면 (즉, 두 개의 감지기를 모두 켜면) D1+D2 무늬와 동일하게 뿌연(blob) 덩어리 무늬가 나타난다 - 영상의 저자는 이것이 다른 유튜버들, 즉 양자 지우개를 설명하는 과학 유투버들의 영상에서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말 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헛갈리게 만들었다고...

<D3+D4는 D1+D2에서 나타난 무늬처럼 뿌옇게 나타날 뿐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영상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양자 지우개 실험은 첫 번째 스크린에 나타난 빛의 패턴의 부분집합(subset)을 나타내는 것일 뿐, 인과율 위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 과정이 복잡해서, 실험 자체가 너무 복잡해서 헛갈리기 쉽지만, 미래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을 변경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실험은, 처음 스크린에 나타난 blob패턴의 subset을 채취하는 복잡한 과정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위의 영상을 보게 된 것이 조금 오래되었는데, 글을 쓸까 말까 하다가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이전 글을 보고 있어서  (A/S는 해야 할 것 같아) 후속으로 이런 의견도 있다는 글을 준비하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이것저것 좀 찾아 보았는데, 예를 들어 영상에서 이야기하는 하나의 슬릿을 통과한 파동(책에서는 빛을 파동으로 설명하면서도 측정이라는 행위가 들어간 빛은 입자처럼 행동한다고 설명함)이라는 개념이, 사실 측정이라는 행위에 대한 결과의 여러가지 해석 중의 하나라는 것, 즉 현대 과학은 아직도 측정이라는 행위가 물리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해석도 각기 다르다는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위의 영상을 보면서도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감지기와 스크린의 거리, 즉 시간차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이다. 분명히 시간차(6ns, 다른 곳에서는 8ns)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간섭 무늬 혹은 간섭이 없는 무늬가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다. (물론 위의 영상에서는 그런 것을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이 실험의 인과율 위배에 대해 그것이 실제임을 설명하려는 과학자들도 있는 것 같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C%97%B0%EC%84%A0%ED%83%9D_%EC%96%91%EC%9E%90_%EC%A7%80%EC%9A%B0%EA%B0%9C)

 

  추가적으로, 이 실험에 대한 해석에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에 링크된 블로그 글과 또 다른 영상(실제 스크린에 어떠한 무늬가 어떤 순서로 나타나는지 자세히 설명. 추천함)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 블로그 글은 위의 영상 말미에 소개된 그 블로그이다.

Sean Carroll

https://www.preposterousuniverse.com/blog/2019/09/21/the-notorious-delayed-choice-quantum-eraser/

  이상으로 오늘의 잡담을 종료.

 

<그리고, 오늘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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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의 역설(Time Paradox)

    시간여행, 특히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이유 중 첫 번째로 꼽는 역설.

    타임머신을 발명한 어느 과학자가 과거로 거슬러가 자신의 조상, 혹은 어린시절의 자신을 만나게 되고 (우연한) 사고로 인해 어린시절의 자신을 해치게 되었다면, 타임머신을 발명하기 이전의 자신이 사라지게 되므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자신의 조상 혹은 발명자 자신을 해친 사건 자체가 사라지므로 그 후손, 즉 시간 여행자는 다시 태어나 타임머신을 발명하고 다시 과거로 가서 자신을 해치게 된다. 이렇게 시간차원의 오류가 무한히 반복되는 것을 타임 패러독스라고 한다.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이 역설은 시간과 사건 간의 무한 반복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만들어내는데, 비단 시간여행자가 조심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니다 - 혹시 오래된 영화 '더 플라이(The Fly)'를 보신 분이라면 아주 작은 파리 한 마리가 불러온 참사를 기억하실텐데,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은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 자체가 이런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서 우리의 과학적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시간여행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 인가? 정말?>

 

    간편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위의 동영상처럼, 시간여행 자체가 새로운 우주(이전 우주의 복사본)를 하나 만들어 낸다고 하면 된다. 과거로 가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다른 우주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시간여행 이전의 우주와 분리되므로 아무런 모순이 없다. 복잡한 논리적 모순을 해결해가며 이야기를 펼치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최근 SF 영화에서 많이 차용해 쓰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쉬운 해결책을 차용한 SF 소설이나 영화는 구조가 단순해지고 긴장감이 떨어져서 결말부분으로 갈수록 흥미도가 떨어지는데, 영상 작가들도 그런 부분을 잘 아는지 부족한 긴장감을 고어한 표현으로 땜빵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물론 글쓴이 본인은 위의 다중우주론 보다는,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이론을 더 좋아한다.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주가 그것을 허락하기 때문인데, 여행자가 무슨 짓을 하든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의 모순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이론이다. 과거로 간 여행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의 사건을 바꾸는 일, 즉 패러독스는 가능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는 행위들은 모두 예전에 이미 벌어졌던 일들이다 - 시간여행자만 모르고 있던 사건들이 이미 벌어진 셈이다. (혹은 우주의 구조를 파괴해 버릴지도 모를 이런 시간여행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방지하는 어떤 단체가 있다고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에 오래전에 단편 [시간 수리공] 을 써 보기도 했는데, 그 어느 누구도 그 글엔 방문을 하지 않는다. 흑.)

 


 

   어쨌든,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과 그 패러독스를 잘 해결한 넷플릭스 드라마 두 편을 소개하는 것이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1)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 사무소  (Dirk Gently's Holistic Detective Agency)

       '더글라스 애덤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 원작의 작가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 드라마, 이야기가 짜임새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Everything is connected)'는 단순한 명제를 주제로하여, 아주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연결고리가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안면에 미소를 띄게 만드는 유머스러운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즌 1은 시간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초반 1~2화 까지 진행되는 등장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만 잘 참고 넘어가면, 3화부터는 재미있어진다.  '두 명의 우주론적 존재' - 더크 젠틀리와 (암살자)바트는 각자의 방법으로 동료를 만나며 각자의 방법으로 '꼬인 우주의 사건'들을 풀어나간다.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일들을 벌이는 이 드라마는, 세상은 좀 엉뚱한 방식으로 돌아가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며, 세상은 그 엉뚱한 방식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단순히 길을 걸어가고 있는 당신 또한 (우주론적 입장에서는)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시즌 2는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물론 시즌1을 재미있게 보셨다면,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시즌 2까지 단박에 정주행 하실 것이다. 약간 사족을 달자면 시즌1보다 재미는 조금 덜하긴 한데, 그래도 더크 젠틀리를 만들어낸 작가 '더를라스 애덤스'의 입심은 어디 가지 않는다 - 즉 이 시즌도 재미있다. 정말 아쉬운 것은 시즌 3는 계획되었다가 취소되어 이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없게되었다는 것.

 

 

2) 다크 (Dark)

 

       시간 여행에 대한 SF드라마. 독일에서 만들었고, 그래서 그런지 등장인물 사람 이름이 많이 헛갈린다. 19세 이상만 시청 가능. 

       핵발전소가 있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아이의 실종과 그와 관계된 시간여행, 그리고 그로 인해 아포칼립스가 펼쳐진 세상에서 진실을 찾는 한 청년의 이야기 - 이렇게 줄여서 설명해도 될 듯. 

       영화 '백 투더 퓨처'에서 과거로 간 아들 '마티'와 그의 엄마 '로레인' 간에 썸씽이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물음을 갖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영화에서 답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즉, 이 드라마는 시간여행과 그와 관련된 '근친'을 다루고 있다(고 봐도 될 듯). 등장인물의 이름이 독일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드라마의 이야기 흐름을 쫓기가 조금 까다롭다는 단점이 있다 -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가계도'라도 그려놓아야 할지도.... 

      어쨌든, 시즌 3까지 있으며, 등장인물간의 관계도만 헛갈리지 않는다면, 넷플릭스의 그 많고많은 이상한 시간여행 관련 드라마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두고 볼 만한 드라마로 추천한다. 주말이나 연휴에 몰아서 보기를 추천. 

 


 

    고전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즉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물리학 법칙은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그것과 하등 다를바 없다. 예를 들어 달로 쏘아지는 로켓의 궤적을 설명하는 수학은 그 반대로 움직이는 경우에도 완벽히 옳은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지만 미래를 기억하지는 못하며 이것을 시간의 화살로, 엔트로피로 설명하지만, 작디 작은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현재가 과거의 사건을 바꾸는 어떤 작용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이(양자 지우개 실험) 과학적으로 증명 되기도 하였으니, 어쩌면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이 정녕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스토리 - 이야기의 짜임새가 있는 넷플릭스 SF 드라마 두 편을 소개해 보았다.

    혹시 위의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SF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제게도 알려주심 감사하겠다는 문장과 함께 오늘의 잡담을 종료. 

 

 

 

재미 없는 글을 꾹 참고 여기까지 봐 주신 분들을 위한 오늘의 선곡 - Sum41의 In Too D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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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선택과 양자 지우개 

 

    1999년 초에, 물리학자 "Yoon-Ho Kim, R. Yu, S. P. Kulik, Y. H. Shih and Marlan O. Scully"들이 <Delayed Choice Quantum Eraser>라는 이름의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이중슬릿을 통과한 입자는 파동처럼 행동할 것인데, 만일 이중슬릿을 통과한 이후에라도 이 입자가 이중 슬릿 중 어느 슬릿을 통과했는지 확인하는 측정을 거친다면, 이 입자는 비록 이중슬릿을 모두 통과했다 하더라도 단일 슬롯을 통과한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한, 존 휠러(John Archibald Wheeler)의 지연선택 사고실험(delayed-choice experiment) 이 실제 참인지를 실험을 통해 증명하였다. 

 

   이 이론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알아야 할 내용이 있다.  

 

    1. 이중 슬릿 실험

         양자역학의 그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 아래의 그림과 같이 빛 혹은 입자는 우리가 어떠한 실험을 하는가에 따라 어떨때는 파동으로, 어떤 경우에는 입자로서 존재한다. 

 

<이중슬릿에 빛을 통과시키면 그 패턴은 파동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입자가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 감지기를 앞에 두면, 입자의 간섭패턴은 사라지고 하나의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중 슬릿을 통과하는 빛의 모습을 가상으로 담은 영상 

         (https://en.wikipedia.org/wiki/File:Double_slit_experiment.webm)

 

 

    2. 지연 선택 실험(Delayed-Choice)

       위의 이중슬롯 실험에서, 존 휠러는 '입자(혹은 빛은) 언제 실험장치를 '감지'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다시 말해 입자는 자신의 속성을 입자로 할지 혹은 파동으로 할지 언제 선택을 하는가?  

      답을 얻기 위해 그는 하나의 사고실험을 고안하였다. 

 

<10억 광년 떨어진 어느 별(퀘이사)에서 날아온 빛이 중력렌즈를 통과하여 간섭무늬를 만들어 지구에 도착한다>

 

     아주 먼 거리에 있는 퀘이사에서 출발한 빛이 은하들의 중력렌즈 효과에 의해 휘어져 우리 지구의 망원경에 도착한다고 가정해 보자. 위의 그림과 같이, 빛은 중력렌즈를 통과할 때, 이중 슬롯을 통과하는 것 처럼, 간섭무늬를 만들어 우리에게 도착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감지기를 두어 퀘이사의 빛이 위 아래중 어느 쪽 방향을 거쳤는지 알게되면 이 빛은 입자로서의 성질을 가질 것인가? 10억 광년에 걸쳐 파동의 속성을 가진 빛은 입자 감지기를 통과하면 하나의 입자로서 행동하게 되는가? 

     휠러는 빛 혹은 입자가 파동과 입자의 속성이 언제 선택되는지 궁금해 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중슬롯의 양 슬롯을 모두 통과한 빛은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만든다. 그렇다면 양 슬롯을 동시에 통과하여 파동의 성질을 띄고 있는 이 빛에 특별한 감지기를 두어 슬롯의 두 경로 중 하나로만 통과했다는 정보를 알게되면, 이 빛은 파동의 성격을 그대로 갖고 있는가? 아니면 단일 슬롯을 통과한 것처럼 하나의 입자로서만 행동하는가? 

     만일 단일 슬롯을 통과한 것처럼 하나의 입자로서 행동한다면, 이것은 이중슬릿을 모두 통과했던 파동으로서의 빛의  과거는 지워지고, 단 한개의 슬롯만 통과한 입자로서의 과거를 새로 만들어낸, 입자가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과거 사건을 변경했다는 의미도 된다. 

 

3. 지연 선택의 양자 지우개

     존 휠러의 사고실험은 빛 혹은 입자는 최종 측정행위에 의해 그 속성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측정이라고 하는 행위는 측정당한 입자의 과거의 상태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혹시, 우리는 입자의 과거 모습을 지금의 측정행위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양자 지우개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맷(Dr. Matt O'dowd) 아저씨>

     

     그림만 봐도 머리가 아플려고 한다. 실제 이 실험은 복잡하면서도 매우 미묘해서 동영상 없이 글로만 설명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 

<이중슬릿 실험부터 설명함>

   그래도 짧게 글로 설명하자면,

    1)이중 슬릿을 통과한 빛이 다시 프리즘을 통과하도록 하여 각각의 빛(위의 그림에서 하나는 초록색, 또하나는 보라색으로 표현했다)을 얽혀 있는 상태로 만든다.(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나의 빛을 슬릿을 통해 두 개로 나누고 그 나뉜 빛을 다시 각각 복사하여 쌍둥이들을 만든 상태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 상태에서는 스크린에는 간섭무늬가 나타날텐데, 빛은 자신이 어느쪽 슬릿을 통과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 감지기 A, B를 켜면 스크린에는 간섭무늬가 사라진다. 빛이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 A혹은 B감지기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으로 달려가는 광자쪽에 감지기가 없는데도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이 광자들의 쌍둥이 형제, 즉 얽힌 빛 입자들이 감지기에 감지되기 때문이다)

    3) 여기서 감지기 C,D를 켜면(이것이 양자 지우개 역할을 하는 장비이다), 스크린에는 다시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감지기 C,D가 하는 역할은 A, B감지기에서 나온 빛이 어느 감지기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도록 그 경로를 지우도록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C,D중간에 자리잡은 저 앏은 유리(?) 때문인데, 직진과 반사의 확률이 반반이되어 어느쪽 감지기에서 나온 광자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즉 확률을 사용하여 실제 슬롯 통과 위치를 지워버렸다.

 

   위의 내용으로만 봐서는 뭐가 문제가 되는지 알기가 힘들다. 이중 슬릿을 통과한 빛이 스크린에 간섭 무늬를 띄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이므로 당연한 것이다. 얽힌 입자를 써서 어느 슬롯을 통과했는지 확인한 방법은 좀 복잡해 보이기는 하지만, 일단 측정이 가해졌으므로 당연히 스크린의 간섭무늬는 사라지는 것이 맞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C,D의 감지기와 유리판을 사용하여 위치정보를 지우는 방법은, 매우 똑똑한 방법으로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경로가 지워졌으니 스크린에 다시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것은 합리적이다. 

   

   사실 위의 사진에서 이야기 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스크린과 감지기 C,D의 거리이다. 감지기 C, D의 거리가 스크린보다 더 멀다. 시간으로 따지면 약 6ns정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이것은 스크린에 이미 도착하여 입자로서의 특성을 보인 빛이, 6ns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자신의 쌍입자(얽힌 입자)에게 가해진 측정치가 사라짐을 느낀 후,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서 자신의 특성을 파동으로 다시 바꾸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현재의 측정이라는 행동이 입자의 과거 사건을 바꾼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다시 휠러의 사고실험으로 돌아가자. 그는 10억광년에 걸쳐 여행하면서 (이중슬롯 역할을 하는 은하의 중력렌즈를 통과하여) 도착한 빛을 우리가 지금 입자로 측정하면, 그것은 10억광년 동안 자신이 파동으로 행동하였던 과거를 지우고, 입자로서의 과거(그림에서 중력렌즈 역할을 한 은하를 통과할 때 한 방향으로만 통과)를 10억년의 시간을 단숨에 거슬러올라가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앞서 글에서, 얽힌 입자간의 상호작용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즉시 이루어진다고 했었는데, 이 이론은 거기에 더해 입자의 상호작용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이전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것과 동일한 결과를 보여준다. 얽힌 입자간의 이러한 상호작용이 진짜 시간을 거슬러 이루어진 것인지, 혹은 아직 우리가 모르는 파동의 어떤 속성 때문인지는 (지금까지도) 아무도 모르지만, 다만 실험결과는 이것이 실제로 벌어지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즉, 이 세상은 관측이라는 측정행위가 실체를 만들며, 어떤 특수한 경우에는 그것들, 입자들은 시간을 거슬러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때도 있다.   

 


 

   글이 쓸데없이 길어진 듯. 

    "과학의 좋은 점은 당신이 그것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라고 말한 '닐 타이슨'의 명언을 새기며 오늘의 잡담을 종료. 

 

     

PS. 혹시 양자 지우개로 과거의 사건, 즉 지난 주 로또 1등 번호를 바꿀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 아래 영상을 참고하시고, 문제의 정답은 또다른 영상(Is There a Fifth Fundamental Force? + Quantum Eraser Answer - YouTube)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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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이야기 - EPR Paradox

 

    입자와 같은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학문, 양자역학에서 이해하기 가장 난해한 내용 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입자의 이중성(duality)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입자라고 하는 아주 작은 미시세계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관찰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파동으로서, 어떤 경우에는 입자로서 존재함을 보여준다.(전문가들은 물질의 이러한 이중성을 Superposition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게다가 입자의 이러한 이중적 속성은 마치 그것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불쌍한 물리학자들의 실험을 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입자의 물리량들을 알 수 있는 한계치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과학기술의 발전이 미진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 측정장비의 정확도가 개선된다고 해도 절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미시세계의 입자는 원래 그렇게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 이 논리는 독일의 젊은 학자, 하이젠베르크가 발표한 한 편의 논문 - 불확정성 원리에서 수학적으로 입증이 되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만물의 근원인 입자는 확률이라는 모호한 값에 의지해야만 그 입자의 속성을 일부나마, 상대적인 근사치를 통하여 추려 볼 수 있을 뿐이다. 작디 작은 미시세계에 살고 있는 입자는 우리가 그것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려 할수록 그것의 다른 물리량은 우리가 아는 정보의 정확도만큼 큰 오차가 벌어져 그 에너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것은 우리가 어떠한 과학적/기술적 방법을 써도 극복할 수 없는, 물리학의 한계점이 되었다. 

 

    고전 물리학으로 명성을 쌓았던 학자들은 당연히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는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우주라는 것이, 기껏 근삿값(즉 확률)으로만 기술된다는 것은 그 이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우주 자체가 그렇게 모호한 상태를 지닌다고는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 특히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확률론에 기반한 양자역학의 법칙을 마땅치 않아했다. 물론 과학자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잘 정리된 논문으로서만 반박할 수 있을 뿐이었으니, 양자역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불확정성 원리에서 표현된 그 아름다운 수학 공식을 무너뜨리는 것은, 비록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1. EPR 역설

    나중에,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3인의 물리학자 - 알버트 아인슈타인(E), 보리스 포돌스키(P), 네이선 로젠(R)은 양자역학 이론을 부술 수 있는 하나의 사고 실험을 제안하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EPR역설이다. 

 

<Youtube Clip : Ted-ED의 EPR설명 영상에서 캡쳐함>

    그들의 논문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이 완전하다고 여길 수 있는가?>에서 제시된 가설은, 양자역학의 기본 가설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입자들의 관계에 대한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강력한 레이저 광선에서 나온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빛, 즉 광자가 둘로 나뉘는데(정확하게는 한 개의 광자가 쪼개져 두 개로 나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두 개의 광자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 얽힘(entanglement) 상태를 가진다. 서로 얽힌 두 광자는 하나인 A의 상태가 바뀌면 나머지 광자 B도 그와 동시에 자신의 상태가 변경된다 - 얽힌 입자간의 이러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상태변환은 그 당시 이미 실험으로 참임이 증명된 사실이었다. 여기서 A와 B라는 입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 예를 들어 A는 지구에, B는 안드로메다 성운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고 하더라도, A가 측정되면, B도 그 즉시 측정된 속성이 반영된다. 

 

    양자역학의 얽힌 입자간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유령이 손을 대는 것(spooky action)같다며 (약간)비아냥 댔다. 그의 이론, 특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빛 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입자(혹은 전달될 수 있는 정보)는 없다. 다시 말해, 얽힌 입자의 거리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이러한 정보전달 현상은 자신이 주장하고 증명한 특수 상대성 원리에 위배되는 사건임에 틀림 없었다. 특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전달되는 정보는 불가능하므로, 위의 얽힌 입자들의 이러한 시간과 거리를 초월한 상호관계는 분명 그 이론 깊숙히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는 이것의 해답을 얽힌 입자가 생성되는 초기 과정에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얽힌 입자들이 만들어 질 때, 그 입자가 가지는 정보가 입자 내에 이미 존재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기술력이 부족하여 그것들 사이에 존재해 있는 숨어있는 변수(hidden variable)를 검출하지 못했을 뿐, 정보는 이미 각 입자에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유령현상처럼 보이는 이 두 얽힌 입자들간의 작용은 빛보다 빨리 전달되는 상호작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입자가 그렇게 움직이도록, 입자들이 생성될 때, 그 정보가 이미 그들 입자에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이 주장한 이 사고실험이 맞는다면, 양자역학은 우주를 기술하기에는 부족한 이론이 된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 그리고 우주를 설명하는 그저그런 근사치 이론일 뿐이며, 실제 우주는 양자역학이 밝히지 못한 보다 더 심오한 법칙(숨겨진 변수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학에서 어떤 새로운 논리가 주장되면, 이 논리가 참인지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제 실험을 하여 증명하면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 사고실험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미시세계에 존재하는 입자들의 위치조차도 명확히 하지 못하는 마당에, 그 안에 숨어있다는 변수값들이 있다는 주장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 3인이 주장한 논리 EPR역설을 실험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좀 더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2.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 하기 

    당신과 우주가 야바위 게임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각기 다른 색을 가진 두 개의 구슬을 하나씩 바닥에 두고 두 개의 구슬이 같은 색을 가지는지 각기 다른 색을 가지는지, 내기를 한다. 

    

    먼저, 당신은 두 구슬이 같은 색일것임에 내기 판돈을 걸었다. 그러자 우주가 내 놓은 답은... 

<구슬을 바닥에 까는 파란색 손이 바로 도박꾼 주인인 우주. 이번엔 우주의 승리>

 

    위의 선택으로 수십번의 판돈을 잃은 후, 이번엔 당신은 두 구슬의 색이 다를 것임에 판돈을 건다. 

<이번에도 우주의 승리>

  아무리 많은 횟수로 도전을 하더라도, 결코 당신은 우주라는 위대한 도박꾼을 이길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떤 색의 구슬이 바닥에 깔릴것인지 당신이 먼저 선택한 상태에서는, 나중에 구슬을 까는 저 파란 손은 당신의 선택을 확인하고나서 그와 다른 색의 구슬을 바닥에 깔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파란색 손이 당신에게 사기치고 있다는 생각밖에는 안들것이다. 도박을 하면 100% 내가 지는데, 이건 도박판을 열고 있는 저 점주(여기서는 파란 색의 우주)가 내게 사기를 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심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이 EPR의 핵심 내용이다.  즉, 우주는 당신이 선택하는 구슬의 색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얽힌 입자간의 정보가 이미 그 안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이유 때문에 당신은 결코 우주와의 내기에서 이길 수 없다. 즉 얽힌 입자의 특성은 이미 그것이 만들어질 때 이미 들어 있는 것으로 유령효과 같은 것은 없다 - 즉, 우주가 물주인 당신을 속이는 야바위 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진짜 사기꾼일까? 확인을 위해서 위의 도박 규칙을 좀 바꿔보자. 이번엔 파란색 손에게 먼저 구슬을 바닥에 깔라고 해 놓는다. 물론 바닥에 깔린 그 구슬 위를 천으로 덮어 내기에 판돈을 거는 내가 그 구슬의 상태를 모르도록 한다.  구슬이 먼저 깔린 상태이므로 이런 규칙에서의 내기 도박의 결과는 오로지 내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그렇담 어떻게 우주에게 먼저 구슬을 깔고 그것을 볼 수 없도록 천으로 덮으라고 할 수 있을까? 말은 쉽지만 물리 실험을 구성하는 것은 야바위 도박과는 별개로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된다. 


   실제 세계로 돌아와서, 물리학자 데이비드 보옴(David Bohm)은 위의 EPR문제를 좀 더 쉬운 다른 질문으로 변경해 보았다. 

   [입자는 임의의 축에 대하여 명확한 스핀값을 가지고 있는가?] 

   보옴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에 대한 측정 문제를 입자의 스핀값으로 변경하여도 같은 결과를 도출한다고 증명하였다. 이것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같은, 측정하기 까다로운 문제를 스핀값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실험을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보옴은 실제 실험을 제안하지는 못하였지만, 관측하고자 하는 특성을 조금 바꾸어도 그 의도는 입자와 속도의 위치에 초점을 맞추었던 EPR 역설의 내용과 동일한 것이었음을 증명하였다. 보옴의 제안 덕분에 우리는 위치와 속도를 스핀으로 바꿔 불러도 동일한 양자역학적 질문에 답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자의 스핀과 양자적 얽힘 현상에 대한 설명 / 아쉽게도 한글자막 없음>

 

 

3. 스핀과 확률, 우리는 실체 자체를 실험할 수 있는가?  

    아일랜드 물리학자인 존 벨(John Stewart Bell)은 위의 물리학자 벨이 증명한 문제, 즉 스핀축만을 측정하여 얽힌 입자간의 상호작용 역설(EPR 역설)을 실험실에서도 증명 가능함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이것은 위에서  '파란 색 손을 가진 야바위 사기꾼 우주'의 예를 들자면, 우주와의 도박에서 천으로 가리고 우주와 도박이 가능하도록 그 실험적 이론의 기반을 만든 셈이다.

 

    이 논문이 대단한 것은, 우리가 측정이라는 행위(도박에서 판돈을 미리 거는 행위)를 하기 이전에 그것을 예측 및 그 확률값을 비교하여 이것, 즉 얽힌 입자의 거리를 초월한 상호작용이 실체인지(즉, 이 우주가 도박판에서 항상 이기는 이유가 우주가 사기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주 자체가 원래 그러한지)를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벨의 부등식 해설 중 / 첫 번째 유튜브 영상에서 발췌>

 

   벨은 자신의 부등식을 통해 얽힌 입자, 즉 두 전자의 스핀값이 확률적으로 일정 수치(50%)를 넘기게되면, 아인슈타인이 주장했던 것처럼, 어떤 정보가 입자 안에 이미 존재한다고 보았다.(부등식과 관련한 내용은 처음 링크한 유튜브 영상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얽힌 입자의 그 순간적인 정보전달 같은 현상, 즉 양자역학이 잘 설명하지 못하는 스푸키 액션은 하나의 환상이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정보가 이미 입자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실험의 결과는 EPR 역설은 틀린 이론으로 판명되었다. 즉 얽힌 입자간의 상호작용은 입자가 탄생할 때 우리가 모르는 어떤 숨은 변수가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두 입자간의 상호작용은 시간과 거리에 상관 없이 그 즉시 이루어지는 현상이었다. 양자역학이 옳았다 - 우주는 도박의 사기꾼이 아니었다. 야바위 게임에서 우주가 먼저 바닥에 구슬을 깔아놓아도, 어떠한 방식의 규칙으로 바꾸더라도 우리는 늘 잘못된 배팅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우주의 본질이었다. 우주는 월화수요일에는 파동으로, 목금토요일에는 입자로서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다(일요일은 우주도 쉽니다). 우리는 확률이라는 근사치를 통해서만 그것들의 물리량을 기술할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우주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초월 지성체들에도 동일한 한계값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빛의 속도를 넘어 작용하는 어떤 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은 파기되어야 마땅한가? 그렇지 않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빛을 포함한, 이 우주의 정보 전달 속도가 한계를 가진다고 정의한다. 비록 얽힌 입자 사이의 어떤 힘(?)이 빛의 속도를 넘어 전달된다고해서 이것이 상대성이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얽힌 입자의 스핀값은 측정할 때마다 무작위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 측정시 우리는 스핀값을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 0과 1의 값은 그때그때의 우주의 기분에따라 임의로 결정되므로 우리는 이것을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이래서 양자역학적 얽힌 입자를 사용하여 범우주간 통신기를 사용하는 SF소설은 모두 망한것 같다) 그래서 양자역학이 옳다고 하더라도 특수상대성 이론을 폐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결국 양자역학은 옳은 이론으로 판명났다. 우리는 우주가 확률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으며 이것을 통해서만 그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 게다가 물질이라는 것이 파동으로 존재하면서도 관찰이라는, 모호하기만한 작용을 통하여 실체를 가진다는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세상, 이 우주적 실체가 일종의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사상이다 - 실제 양자역학 이론을 자신의 종교사상에 억지로 끼워넣어 마치 합리적인듯 꾸미는 종교단체가 있기도 했다. 

   과학이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학은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출발한다는 것이다. 틀린 것으로 판명된 이론이 오히려 과학에는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번과 같은 EPR역설이 가장 큰 예이다. 비록 잘못된 이론으로 판명이 되었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큰 한 걸음을 띄게 만들었으며, 또한 재미난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는 이처럼 <광속을 초월하는듯이 보이는 얽힌 입자들 간의 작용>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을 바꾸는 기이한 현상>도 존재한다. 다음 주제는 이 "양자 지우개"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는 말과 함께 오늘의 잡담을 종료.   

    

 

매닉 먼데이 - 빌리 조 암스트롱(그린데이) / 뱅글스의 수잔 호프 출연 (누님 멋저요!)

  Manic Monday - Billie Joe Armstrong & Susanna Hof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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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이야기 - 빛

 

   책,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이야기'를 다시 읽다.

   최신의 물리학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을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책 - 제목부터 <일반인>이 맨 앞에 들어가 있다 - 이라고는 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파인만이 이야기하는 '일반인'의 범주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책 내용에 고등수학이 등장하는 등의 복잡한 수식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물리학 상식을 깨는 내용이  많아서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첫 장에서부터 설명하는 빛(Light)에 대해서, 우리가 배운 상식은,

  1. 빛은 직진한다.
  2. 거울에 반사된 빛의 입사각과 반사각은 같다.

  라고 배웠지만, 이 책의 저자 파인만은 빛에 관하여 위의 상식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 빛의 반사 

  먼저 거울에 반사된 빛의 입사각과 반사각에 대한 설명에서,

<파인만 왈, 거울에 반사된 빛은 거울의 모든 지점에서 반사될 수 있다>

 

  이 책에서 파인만은 빛은 거울의 모든 지점에서 반사될 수 있다고 말한다(말도 안 돼!).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 맞다고 하면서, 그는 자신이 만든 그 이상한 화살표를 가져와서는 왜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는 지 설명한다. 

 

<유명한 파인만의 화살표. 일단 그림은 확률과 그 합만 표시함>

   위의 그림에서 화살표 길이는 확률을, 화살표의 방향은 시간(시작점에서 목적지까지 빛이 여행한 시간을 초시계로 재었을 때 초침의 방향. 즉 화살표 방향이 위로 향할수록 빛이 여행한 시간이 짧다)을 나타낸다. 그래서 위 첫 번째 그림 - 거울에 반사된 빛의 경로 그림을 파인만 식으로 다시 설명하자면, 아래 그림처럼 된다.

 

  빛의 각각의 경로는 모두 동일한 확률을 가진다 하였으니, 모든 경로의 화살표 길이는 동일하다. 다만 다른 것은 화살표의 방향인데, 이것은 경로에 따라 빛이 도착한 시간이 각각 다름을 표현한다. 이렇게 다양한 경로의 화살표들을 붙여보면, 하나의 긴 화살표가 나타나는데, 위의 그림에서 C에서 M사이에 있는 긴 화살표가 그것이다. 앞서 화살표의 길이가 확률이라 하였으니, 이 기다란 화살표가 빛이 거울에 반사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경로가 된다. 이 긴 화살표의 기울기(즉, 시간)와 비슷한 경로는, 그림에서 E, F, G, H, I 지점이다. 결국 이 지점(특히 G)들은 거울의 중앙에 근접한 지역이다. 그래서 빛이 거울의 중앙에서 반사되어 입사각과 반사각이 같다고, 양자역학 식 설명을 이용해서도 일반 물리학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론을 얻게 된다.  

 

  사실, 위의 내용으로만 보면, 뭐 일반 물리학이나 양자역학이나 결과에 차이가 없네, 괜히 복잡하기나 하네, 하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같은 결론을 도출하기는 했지만, 둘 사이의 전제는 확연히 다르다. 양자역학에서는 '빛은 거울의 모든 면에서 반사가 이루어질 수 있고 그 확률은 같다'라는 이상한 전제에서 출발하였음을 잊지 말자.

  파인만 아저씨도 사람들이 그럴 것을 예상한 듯, 이번에는 양자역학을 이용하면 아주 쉽게 설명이 가능한 현상 '빛의 회절격자' 에 대해 설명한다. 

 

    만일 일반적인 물리학으로 회절격자를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로운데, 왜냐하면 일반 물리학으로는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빛의 입사각과 반사각이 다를 수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추가적으로 언급하자면, 파인만은 빛을 광자, 즉 입자로만 보자고 책 서두에서 언급하였다. 그래서 이 글의 내용은 파동으로서의 빛이 아닌 입자로서의 빛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 파인만은 자신의 확률과 시간의 화살표만 써서, 양자역학적으로 회절격자가 어떻게 그러한 현상을 보이는지 쉽게 설명한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빛이 거울(물체)의 모든 지점에서 반사될 수 있으며 그 확률은 동일하다는, 양자역학의 명제를 사용하여도 회절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2. 빛의 직진성

  빛에 대한 가장 이상현 현상은 굴절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직진하는 빛이 물속에서 굽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들 그냥 빛의 기본 성질일 뿐이라고만 답할 뿐, 왜 그러한가?라는 질문에는, 글쓴이가 제대로 된 답을 선생님들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이유 때문일 것이다.

 

    파인만은 이것또한 자신의 화살표 이론을 가지고 설명한다. 빛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리는 경로로 이동한다. 그래서 물속을 이동하는 시간이 가장 짧은 경로를 따라간다.  (위의 그림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책에서는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빛의 경로들 - 화살표를 사용하여 그 확률을 구한다)

 

   이 책에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사용하여, 확률과 시간 사이에서의 빛의 특성을 설명한다. 양자역학에서의 확률에 대한 모호함은 일단 제쳐두고, 시간에 대한 부분을 먼저 생각해 보자.

   앞의 설명에서 빛은 최단 시간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빛은 어떻게 자신이 이동하려고 하는 경로가 최소 시간 경로라는 것을 알고 움직이는가? 

 

 

3. 재밌는 상상 해보기

   차에 장착된 네비에 있는 그 <최소 시간 경로>가 운전자에게 제공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빛의 시간에 따른 경로 선택은 매우 이상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최소 시간 경로를 알기 위해서는 그 경로들을 실제로 거쳐서 갔다 와야 하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이 최소 시간 경로를 당신에게 안내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가 이미 그 경로의 부분집합을 거쳐 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빛은 모든 경로들에 대해 직접 방문한 정보를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인가?  

  혹은 빛이라는 것이 나루토 처럼 자신을 무한히 복제해 사방팔방으로 질주하는 것인가?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이번에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1.지름길을 찾아가는 광자

       최소 시간 경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빛은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위에 설명한 굴절 그림을 보면, 빛은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방향에 '물'이라는 매질이 앞에 있음을 미리 알고 있어야 이것을 통과하는 최소 시간 경로를 거칠 수 있다. 이것은 질주하는 빛이, 마치 의식이 있는 존재처럼, 자신이 진행할 경로 앞에 어떤 난관(?)이 있는지 미리 알고 있어서 그 경로를 가장 적은 노력(시간)만을 거쳐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빛에 따로 눈이 달려 있거나 (아마도) 의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런 빛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광자와 시간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개념과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빛의 속도로 달리는 것, 즉 빛은 시간이 정지한다는 이론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단시간 경로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것은 달리 말하면 빛은 시간을 거꾸로 거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 있으면서도 우리 눈앞에서는 마치 제한적인 시간을 달리는(약 초속 30만 킬로미터) 것처럼 꾸미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 번식하는 광자

       또 하나의 상상은, 빛이 자가 증식한다는 것이다. 빛을 나루토라고 생각해 보자. 처음 생성된 빛은 나루토가 분신술을 펼치는 것처럼, 사방팔방에 자신의 무한 분신을 만들어 내고, 이들은 하나같이 빛의 속도로 공간을 질주한다. 이 분신 중 하나가 공간의 여기저기에 부딪히다가 당신의 눈에(감지기에) 들어오면, 나머지 분신들은 모두 사라지고 당신의 눈에 먼저 들어온 나루토만이 실체를 갖는다. (이렇게 되면 광자가 최소 시간 경로를 거쳐 도착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도착한 녀셕만 우리 눈에서 실체를 가지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시간을 역행하여 지름길을 찾아가는 광자보다도 더 황당해 보인다. 무한 자가 증식하는 광자라니! 

      실제로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의 이중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이것과 비슷한 이론을 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이렇게 두루뭉실한 단어로 문장을 끝맺음하는 이유는 이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 본인도 양자역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관측되지 않은 물질은 파동으로 우주 전역에 펼쳐저 있으며 관찰자가 관찰하는 즉시 파동은 하나의 물질이 되어 그 형체를 나타낸다. 즉, 투명한 나루토의 무한 분신들은 우주 전역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으며, 그중 하나가 당신의 눈에 들어오면 즉시 나머지 투명 분신들은 사라지고 하나의 실제 나루토만 남아 당신은 나루토가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이론의 황당함을 (이론)물리학자들도 알고 있는지, 그들은 여기에 더 이상한 이론을 끼워 넣기도 했다. 무한한 나루토란 없으며 다만 무한한 우주에 각각의 한 명의 나루토만 있어서 그 무한 우주 중 하나의 우주에서 한 명의 나루토를 보는 한 명의 당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 - 바로 멀티버스이다. 

     개인적으로 멀티버스 이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이론을 증명할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중우주 간의 정보전달은 지금으로서는 중력 밖에는 없다는데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고, 이론 자체가 우주 전체에 펼쳐진 파동이라는 것이 머리 아프니까 그냥 무한 우주가 있어서 그중 하나가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끼워 맞추기식의 설명으로 보인다. - 글쓴이 본인은 전문가들의 이러한 두루뭉술실 식 설명 듣기를 싫어하는데(물론 듣기는 싫어하지만 본인은 이런 두루뭉술실 식 설명을 즐겨 쓰는 편이다), 차후 본인의 호기심을 채워 주기에는 이 이론의 전망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망할 이론일 공산이 크다는 이야기.

 

   3. 거기에 광자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빛의 경로는 그것이 태어날 때 부터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이론. 즉 굽은 경로이든 회절이든 그런 현상의 광자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하여, 그 하나의 광자가 지나갈 경로는 그것이 생겨날 때부터 원래 그런 경로로만 움직이도록, 태초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논리이다. 언뜻 보기에 말 같지 않은 소리로 들릴 수 있으나, 이 생각을 좀 더 깔끔하게 다듬으면, 의외로 귀가 솔깃해질만한 논리를 가져다 준다. 즉, 빛이든 물체든 이 우주의 모든 것은 태초의 빛, 즉 빅뱅이라는 사건이 발생할 때 각 입자들의 전체 과정들이, 우주의 정보가 이미 담겨져있다는 것이다. 확률이라는 요소는 환상이며, 태초에 모든 사건들은 정해져 있어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여기에 양자역학적 조미료를 좀 쳐서, 빛의 경로이든 무엇이든 인간이라는 지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에 - 그리고 그 존재 또한 태초에 예견되어 있어야 한다 - 관찰자가 있기 때문에 우주는 존재하게 된다는, 보기에 좀 엉뚱해 보이는 논리를 펼치는 학자들도 있다. 물론 이것으로 도출되는 결과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광자의 경로나 우리 인간들의 존재)을 재확인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뻔한 결과만 가져올 뿐,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반인들을 위한 파인만의 QED강의> 책에 나와 있는 빛에 대한 짧막한 설명과 부가적으로 글쓴이의 몇 가지 상상을 적어 보았다. 오늘 글에 나와 있는 빛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앞부분에서 약 100쪽 분량의 이야기이고,  빛 이외의, 200쪽 이상의,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책에 남아 있다. 이 글을 보시고 약간의 관심이라도 생기었다면 꼭 이 책을 구매하여 보시기를 추천드린다.

   책은 생각보다 어렵고 (파인만 아저씨의 농담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재미가 없으나, 서재 한 켠에 꼽아두면 꽤 멋지다. 가끔 방문한 지인들이 당신이 이런 책들도 보느냐면서, 경외에 찬 눈빛을 당신에게 보낼 때도 있으니, 사놓고 안 보더라도 괜찮은 장식품이 되므로 이 책, 추천드린다. 

 


 

    광자나 전자 같은 미시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 이론들은 정말 이상하고 - 그래서 재미있는 상상력을 덧붙이는데 안성맞춤이다 -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론이라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면서, 늘 가지는 질문, 근원에 대한 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면 다음엔 EPR역설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아마도 대부분의 내용은 유튜브 링크로 대치될 것이다) 할 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생각과 함께 오늘의 잡담을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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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clip - How To Avoid Embarrassing Yourself In An Argument - Jordan Peterson

 

유튜브를 보다가 재미난 영상이 있어서 소개.

 

<영상의 부제목이 무려 How To xxxx Down Conversational Bullies!>

 

흥미롭다.

살면서, 거친 말싸움 같은 언쟁을 한 번쯤은 해 보셨을 것이다. 언쟁을 하다보면 가장 짜증나는 부류가 바로 우기기기술을 쓰는 사람인데, 당신이 뭐라고 하든지 내 말이 우선이고 진리라는 사람 앞에서는 사실,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 - 물론 영상의 남자(피터슨) 반대편에서 이야기하는 여성앵커가 말싸움에서 무턱대고 우기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꽤나 공격적으로 상대의 말을 끊으면서 타자의 말을 이용한 함정을 기막히게 펼쳐놓는, 언쟁의 고단수라는 느낌이다 -

그런 상대 앞에서 조리 있게, 조목조목 상대방의 부실한 논리를 깨어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심지어 저 상황에서 흥분조차 하지 않고 조리 있게 대답하다니!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영상을 다 보고, 이 인터뷰에 나온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구글링을 해보았다. 하버드 대학 교수였, 전공이 임상 심리학이라고(clinical psychologist). 그래서 말도 잘 하나 보다. 올해 출판된 그의 저서 12 Rules for Life: An Antidote to Chaos로 서양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의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만으로 감히(쉽게) 평가해 본다면, [진실이 담긴 말의 힘][착한 사람으로만 살지 말라(Why nice guys finish last)] 많이 들어본 문장 아닌가? 그렇다. 펑크 락밴드 Greenday의 노래 재목과 동일하다 에서 추론하자면, 진실이 실린 말의 힘과 그것을 말로 내뱉었을 때 깨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것으로 요약해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부당한 대우에 대해 착한 사람으로만 있는 것, No라고 말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면, 결국 남는 것은 시간이 남긴 찌꺼기 - 회한밖에는 없다고...

 

국내에서는 위의 영상을 [하버드대 교수 vs 페미니스트 앵커]의 대결구도로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주 소개되었나 보다.

 

<한글 자막이 달린 인터뷰 영상>

 

개인적으로는 남녀의 대결구도보다는 말싸움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가 하는 기술(?) 쪽이 더 관심이 간다. 성질날 정도로 내 말을 끊으면서 몰아치는 상대방에 대해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고, 나중에는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장면에서는 혼자 헐헐거리며 약간 웃었다. 

저렇게 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건설적인 토론을 했을지, 그리고 젊었을 때 얼마나 많이 말싸움에서 깨졌을 지를 상상해 보며 오늘의 잡담을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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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Detroit: Become Human)




    [소니 인터렉티브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든 PS4전용 게임. 20185월에 공개되었다. 게임은 영화처럼 화면에 장면(cut scenes)이 지나가고,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사용자의 키 입력을 통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줄거리가 달라지는 형식의 게임이다. 이렇게 영화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형식을 채용하여 성공한 게임으로는 텔테일 게임즈의 워킹데드’, ‘울프 어몽 어스시리즈가 있고, 좀 올드한 게이머라면 드래곤즈 레어(Dragon's lair)’같은 게임이 생각나실 수도 있겠다.

 

<Dragon's lair, 키 한번 잘못 누르면 바로 사망이다. 결국 엔딩은 못 본 게임.>


1.

   게임은 세 명의 안드로이드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가사도우미로 개발된 카라와 개인 집사마커스그리고 전문 협상가역으로 경찰 임무를 돕는 코너로서, 이들 안드로이드는 어떤 이유로 각각의 개연성이 있는 사건들로 인해 그들은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자유의지를 갖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과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치되 된다는 내용이다.


   영상을 보면 (사실 게임을 구매하지는 않았고, 어떤 유투버(풍월량)의 유튜브 클립을 통해 보았다.) 흥미로운 장면이 몇 군대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방송 초반에 나오는 안드로이드와 인간 간의 갈등이 표현된 부분으로 안드로이드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대부분 단순 노동과 관련된 하나씩 차지해 가자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데모를 하는 장면이다.

사실 이 모습은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하기 보다는 현재 진행형이고, 그리고 위협받는 일자리의 내용도 영상에서 말하는 단순 노무직과는 좀 다르지 않나 생각한다. 인공지능 혹은 안드로이드와 같은 소형화되고 전문화된 인공지능들이 차지할 일자리는 아마도, 단순 반복적인 직업 외에도 전문직종도 해당될 터인데, 기업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의 힘과 정밀도가 필요한 분야는 이미 기계가 차지하고 있으며(자동차 공장에 설치된 그 수많은 조립로봇들을 생각해 보자), 이제 남은 분야, 즉 지금 기업에서 고용을 위해 꽤 많은 비용을 들이고 있는 쪽은 바로 이 전문직일 가능성이 높다.


<크루쯔케작트(Kurzgesagt) – 왜 현대의 자동화는 과거의 그것과 다른가?>


위의 영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전처럼 거대기업이 새로 생겨났을 때 철강과 철도왕으로 유명한 카네기가 고용한 그 많은 피고용인 수와는 다르게, 지금의 거대기업 구글의 래리 페이지가 고용한 인원수를 비교해 보면, 기술의 발전은 어쩌면 사람들의 일자리를 점점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피고용인 수를 줄여서 만들어낸 그 거대한 자본은 어디로, 누구에게 갔을까? . (여담으로, 이 유투버의 영상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약간 논란이 될 만한 문제(예를 들어, GMO를 대표로 하는 유전공학의 실험적인 기술을 빨리 적용하자고 하는, 약간은 선동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정치적인 논란에는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는데 이 부분은 좀 불만이다.)

 

 2.

다시 게임의 내용으로 돌아가자면, 게임이 진행될수록 게임은 본격적으로 게이머에게 묻기 시작한다. 안드로이드, 즉 감정을 가진 기계에게 인권은 있는가? 당신이 안드로이드가 된다면, 자유 혹은 그에 해당하는 권리를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가? 케케묵은, 하도 많이 거론되어 이제는 고전이 된 SF영화 장르에서만 간간히 볼 수 있는, 로봇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게임은 일관되고 진지하게 이 물음을 플레이어에게 던지고,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방향에 따라 게임의 결말도 다르게 다가온다.

 

생각하는 기계, A.I에게 인간과 같은 영혼, 소위 기계에 Ghost는 정말 존재할 수 있는가? 만일 그것들이 사람과 같은 사고 혹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하는 토스트 기계는 빵 굽는 자신의 일을 정말 좋아하는가?

<생각하는 토스트 머신 문제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 토스트의 전원코드를 뽑는 행위는 살인과 같은가?>


 

<로봇의 권리에 대한 볼 만한 영상, 이번에도 Kurzgesagt에서 제작>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그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가 인간과 같으며, 인간과 같은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서는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해야 할지도 모른다.  – 그것을 거부한 그 댓가가 너무나 클 것이기에.  

철학적인 물음으로 질문을 바꾸어 본다면,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라고 하는 것, 인간을 정의하는데 꼭 생물학적인 몸을 가져야만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많이들 그렇지 않다고 답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인간의 겉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짧은 생각으로는, 반드시 생물학적인 몸을 가져야만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생각한다는 것, 의식이 가지는 의미와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철학적, 도덕적 충돌들은 별개로 해 두고 나서의 이야기이지만......  


3. 

      이 게임이 던지는 메시지는 '로봇의 권리' 까지 이지만, 좀 더 이후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조화로운 세상이 가능이나 할까? 첫 인공지능이 탄생한 순간부터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닌가? - 이미 스티븐 호킹이 경고한 것과 같은 세상이 펼쳐지지는 않을까? 
      혹은 우리는 그들 인공지능이 우리를 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전긍긍하며 사는 펫의 위치로 전략할 지도 모른다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우주적 진화의 큰 흐름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이런 기계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의식이 비약적으로 전진할 기회와 불멸에 대한 큰 벽을 허물고 전우주적인 존재로 그 우주의 끝을 확인할 기회를 스스로 늦추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상상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어서(하!) 계속 쓰고 싶지만 밤이 늦은 관계로...... 내일(아니 오늘이구나) 투표도 있고..... 사실 쓰고 있던 소설 - 나는 A.I 전문 어쩌고 저쩌고 - 를 언급하면서 자기 소설 광고를 마지막에 좀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된다.  

마지막으로 음악 한 곡 - 레너드 스키너드의 스윗 홈 알라바마 - 올리고, 내일을 위해 저는 자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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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 The Fable of the Dragon-Tyrant

 

‘Why Die?’ 라는 영상으로 소개했던, 338만의 구독자 수를 가진 유투버 [CGP Grey]가 새로운 비디오 클립을 그의 유투브 채널에 올렸다. 이번엔 폭군 용(Dragon)과 관련된 동화라고...

 

 <아쉽게도 한글 자막은 아직(4/30/2018) 없다>


의외로 기존에 그가 만들어 올렸던 영상들 뼈다귀 모양의 사람들과 깡통을 이어붙인 듯한 모습의 로봇들과는 다르게, 이번 작은 화려함과 역동적인 색상이 먼저 눈에 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표정도 다양하다. 맨날 동그란 얼굴에 작대기 두 개만 그려진 얼굴만 붙이고서 사람이라고 우기곤 했었는데(그래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메시지는 정말 충실하게 영상에 담겨 있다. 그래서 인기도 많은 듯), 이번엔 영상 제작에 꽤나 정성과 시간을 투자한 것이 느껴진다.

깨끗한 2K 품질로 감상하니 정말 한 편의 잘 그린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다. 비록 한글 자막은 아직 달려있지 않으나, 크게 어려운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아서 영어 자막과 함께 보시면 좋을 듯.

 

영상이 끝나고 난 후,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번에도 죽음이라고, 용과 같은 폭군인 죽음을 과학으로 극복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 예전 클립처럼 직설적으로 죽음 자체를 부정하라고 외치지 않는 대신 화려한 영상으로 부드럽게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었다고 생각했는데, 영상 밑에 달린 comment를 보니 정답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질병. 의학저널에 실린 글이 원작이라고 하니 이 영상에서 이야기하는 용은 질병이 맞을 것이다. , 영상속의 용이 치유 불가한질병이냐 혹은 죽음 그 자체인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는 하다.


다만, 진작 이런 방식으로 했었어야 했다는 생각은 든다. 예전의 <Why Die?>에서처럼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오지는 말았어야 했다. 사실 그들은 이 동화에 나온 그대로, 죽음의 기차에 어쩔 수 없이 올라탄, 가족과 마을을 위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위대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영상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영상은 이전의 <Why Die?>멋진 영상으로 색칠된다른 버전이다. 같은 내용의 순화된 버전. 쩝.

 

어쨌든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멋진 동화. 오늘의 영상으로 [CGP Grey]‘The Fable of the Dragon-Tyrant’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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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실에서 빌린 책을 잃어버렸다고, 막내가 울상이다. 도서실에 분명 반납을 했는데 아마도 반납 기록이 빠지고 책은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다. 새 책을 사서 도서관에 주자고 했더니 빌린 책이 절판되어 온라인 서점에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다고.

학교 도서실 반납 테이블 위에 분명히 올려두고 왔다면서, 절판소식을 듣자 발을 동동 구른다. - 잃어버린 책을 다시 구할 수 없을지도 몰라 - 절판이라, 걱정 될 만 하다.

 

이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찾았는지 중고 서점에서 그 책을 팔고 있다고, 밝은 얼굴로 핸드폰으로 그 매장을 보여주면서 이야기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온라인으로는 구매가 불가능. 방문 판매만 한다고. 토요일에 같이 가서 사기로 약속을 했다가....... 잊었다, 우리 두 사람 다.

 

결국, 점심시간에 맞춰 그 서점, 알라딘 중고서점 대학로에 혼자 서둘러 갔다.

 


의례히 중고서점이라고 하면 노란색으로 물든 책들이 먼지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한켠에 잔뜩 쌓여있는 풍경 - 동대문 헌책방만 생각나는데, 여긴 예전의 동네 책방보다도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놀랐다. 지하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공간을 비워도 가계세가 나오는가? 중고서점인데, 흠흠.

어쨌든, 핸드폰으로 원하는 책이 있는 위치를 미리 찾아놓은 덕분에 찾던 책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시간이 남아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평일이라서 그런지 내부의 손님은 별로 없고 한산한 편.

이왕 온 김에 내가 읽을거리도 좀 찾아보자. 매장을 빠른 걸음으로 한 바퀴 돌다 보니 역시 눈에 띄는 책은 바로 최저가. 2-3천원으로 가격이 매겨진 물론 그만큼 세월의 냄새도 좀 나는, 그런 책들만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책 한 권 발견 - 존 그리셤(John Grisham)의 소설, ‘파트너 2.’ 주변을 뒤지니 ‘1도 나온다. 게다가 이젠 절판된 문학수첩에서 출판된 고백도 발견! 가격도 적당하고, 얼른 집어서 계산대에 올려두었다. 이만 원이 넘으면 내년 달력을 이천 원에 드려요 라는 점원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젓고 서둘러 계산.

 


보통은 소설은 한 번 읽고 마는 편인데, 어떤 작가들이 쓴 소설은 다시 읽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 소설가가 쓴 책도 그런 쪽.

아마도 소설 내에서 그가 사용하는 빠른 사건 전개와 독특한 인물 표현 방식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평범한 소설에서는 그냥 얼굴이 붉어진다는 등의 단편적이고 짧은 표현으로 지나간다면, 이 작가는 그 사람의 행동을 기술하면서 읽는 사람에게 그가 화가 나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는 것. 쉽게 이야기하자면, 문장이 좋다. 그래서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어도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새로운 맛이 느껴진다는 것. (그래서 이 사람의 책은 일인칭 시점에서 쓴 글들이 재미있다.)

 

어쨌든, 혹시라도 이곳을 방문하실 분들을 위해 책 방 내부 지도를 아래에 첨부

50m내에 CGV영화관이 있어서(지하철, 혹은 버스에서 내려서, 영화관 쪽으로 죽 올라가서, 영화관 지나고 약 50m 근처에 간판이 보임) 영화 예약해 놓고 시간이 남는 분들은 이곳을 한 번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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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인생을 최고의 불행으로 이끄는 일곱가지 방법에 대한, <CGP Grey>의 고찰 영상. 



다 보고나니,

1. 약점 부위를 직격 당한 느낌 (뜨끔)

2. 직설적이지만 재미있다. 아이들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다.

3. 흠. 중요한게 빠졌네. 돈(Money) - 길게 일곱가지 방법까지 갈  필요 없지. 요거 하나가 없으면 바로 맥시멈 미저리. 흠.


< 슬픔의 바다로 항해해 보아요. - by CGP Gre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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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으로 먹을 피자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딸아이가 창문 밖을 보더니 달이 빨갛다고 좋아한다. 창문 가까이 가 보니, 정말 붉은 달이 지평선 근처에 떠 있었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사전 월식 항목>


왜 빨간 달이 뜨는지 아느냐고 딸에게 물어 보았다.

월식 때문이야. 개기월식 때는 붉은 달이 뜨거든.”

 

. 아닌 것 같은데. 달이 붉게 뜨는 것은 빛의 산란과 굴절 때문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새벽 일찍 해 뜰 무렵이나 저녁에 노을이 붉은 색을 띄는 것처럼, 저 달도 지평선 근처에 있어서 붉은 색으로 보인다고.......

개기월식 아니야? 학교에서 배웠다니깐.......”

난 개기월식은 처음 듣는데. 아이에게 확실한 정보 전달을 하기 위해 인터넷 아니 구글신을 통해 붉은 달의 과학적인 원인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어라. 검색 결과의 대부분이 개기월식과 관련된 내용이다. 우리 딸이 맞았잖아? 적잖이 긴장된다. 내가 틀렸나?

 

일단 붉은 달과 관련하여 가장 잘 설명되어 있는 노컷뉴스의 기사 일부를 발췌해 본다(기사 원문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달이 지구에 의해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 때는 달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달의 모습은 보이지만 평소와 달리 선명한 붉은색을 띨 뿐이다.

달이 붉은 색으로 보이는 것은 지구 대기를 통과하면서 붉은 색으로 변한 햇빛이 달 표면에 반사되기 때문이다. 개기월식 때 달 표면은 지구에 가려져 햇빛이 직사광선 형태로 달 표면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햇빛이 지구 대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빛이 꺾어지는 굴절현상을 일으켜 햇빛의 일부가 달에 도달한다.

그런데 지구 대기를 통과한 햇빛은 저녁 하늘의 노을과 같은 붉은색을 띠게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순서로 빛의 파장이 짧다. 일몰, 일출 시간에 수평선이나 지평선 너머에서 오는 햇빛은 붉은색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기의 산란 작용에 의해 파장이 짧은 광선은 소멸하고 파장이 가장 긴 붉은색만 살아남은 결과다. 즉 햇빛은 지구 대기를 통과하면 공기의 산란작용에 의해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지구 대기를 무사히 통과한 긴 파장의 붉은색 빛은 지구 대기의 굴절작용으로 각도가 꺾이면서 달 표면에 도달한 뒤 다시 반사되면서 달을 붉은색으로 보이게 한다.

......>


 

어쨌든 달이 붉은 색으로 띄는 이유는, '파장이 짧은 푸른빛은 산란되어 버리고 상대적으로 긴 파장인 붉은 색이 쉽게 우리 눈에 들어와서' 그렇다고. 특히 오늘은 개기월식도 없는 날이니 이게 원인 맞다.


봐, 내 말이 옳잖아. (으쓱)

딸에게 방금 확인한 내용을 알려 주었다.


, 내 말이 맞잖아. 개기월식 때문이라니깐.”

아니 그게 아니라, 파장에 따른 빛의 굴절 때문이라니깐. 거 지평선에 지는 해로 아빠가 설명한 것 기억 안나?

 

아참. 알았다니까안~. 왜 그런거얼 일부러 알아보고 그으래? 아 저엉말....”


그냥 나도 틀릴까봐 일부러 알아보고 알려주는 건데. , 까칠하기는.......


(참고로, 대기 중에 미세먼지나 황사가 많아도 붉은 달이 뜬다고 합니다. 오늘은 아마 미세먼지가 많은 이유 때문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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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투브에 재미난 영상이 있어서 소개.


<고맙게도, 어떤 분이 한글 자막도 달아 주셨다>

 

제목만 보면 사람이 죽는 열 가지 이유에 대한 내용인가 했는데 오히려 왜 죽음을 곱게 받아들이려고 해?’라는 반문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영상을 보면서 죽음을 콜레라와 같은 질병에 비유하는 표현에는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들다가도 영상이 말미로 가면서, 제작자의 훈계가 섞인 말들에 불편함이 생긴다. 이것은 마치 신병훈련소에서 40km 행군을 하는 중에 누군가가 체력고갈로 쓰러지자, 조교가 그 사람에게 네 정신상태가 글러먹어서 그래하면서 큰소리만 치고 있는, 체력이 고갈된 사람에게 정신력 운운하는 그런 장면이 연상된다.

 

사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영상에서 이야기 하듯,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에 대한 잘못된 보상이 덧붙여졌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학 용어에 있는 것 같은데, 좋아하지는 않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때 의미를 부여하는 것 보상심리 어쩌고 라고 들은 것 같은데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꼭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가 죽음에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Dignity. 고귀한 죽음이 지금 당장 죽는 자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 그렇다. 이미 죽은 자에게 고귀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지만 산 사람,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그 의미가 존재하기도 한다. Dignity가 죽은 자 자신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지라도 남은 사람에게는 소중한 유산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 죽음으로 고귀함을, 산 사람이 자신이 가진 의지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고 자신이 가진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영상은 <Death is a part of life>라는 말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하여 곡해하고 있다. 또한 자연이 살아있는 것들에게 던지는 일종의 공정성,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시무시한 자정작용의 하나가 죽음이라는 것도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이 우리 사회에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를 줄 거라는 무한 긍정식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과학에는 방향성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예를 들면, 원자에 대한 깊은 지식이 우리에게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자핵을 사용하게도 해 주었지만 지구를 두 쪽으로 쪼갤만한 가공할 폭탄을 만드는 기반으로서의 역할도 했으며, 인터넷의 발전이 만인이 참여하는 커뮤니티에 불을 밝혀 역사적인 무혈의 독재 정권교체의 토대로서의 기능도 했지만 전 세계의 가상포르노 사업에 허브역할을(아 이건 좋은 건가.......) 하는 것처럼, 과학은 그것만으로 하나의 방향성 -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술은 얼마나 빨리 발전시키느냐 보다는 이 초강력한 힘을 누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한 구성원간의 이해와 합의가 먼저 진행되어야 하는 것도 있다 특히나 생명과 관련된 기술은 더욱이 말이다.


<영원한 삶을 살게 되면 정말 우리가 사진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될까?>

 

여기까지 읽은 분이라면 어쩌면, 글쓴이가 죽음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네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나는, 이 영상에서 <CGP Gery>, 이 유튜브 영상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죽음은 질병이고 우리가 언젠가는(스스로 하든 혹은 다른 존재에 의해 주어지는 방식이든) 이것을 언젠가는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 결과를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런 기술이 우리 손에 쥐어진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는 것뿐이다. - 그렇다. 나도 길고 긴 삶을 갖고 이 세상의 끝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인해 어느 한 작가가 쓴 소설의 주인공(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이 되는 식으로의 영원한 시간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CGP Grey>라면, 최소한 <CGP Grey>정도의 유투버라면 이처럼 단순히 이슈만 훌쩍 던지고선 손 놓고 있지는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냐고. 임모털(immortal)을 갖기에는 우리의 의식수준과 사회제도가 너무 미개한 것은 아닌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끌고 왔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


마지막으로 글쓴이가 좋아하는 드라마 <House M.D.>에서 주인공 하우스의 일갈을 소개하며 오늘의 잡담을 종료.

 

Our bodies break down,

sometimes when we're ninety.

Sometimes before we're even born,

but it always happens and

there's never any dignity in it.

I don't care if you can walk, see,

wipe your own ass,

it’s always ugly.

Always!

 

You can live with dignity,

you can't die with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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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만 잔뜩 먹어서 종이가 아주 노랗게 익은 책 한 권을 꺼냈다. 몇 페이지 훑어보니 먼지만 먹고 있는 이유가 있다. 내용이 너무 어렵고 번역도 좀 그렇네.......

 

책의 맨 마지막 쪽에 있는 출판일로 대충 이 책을 언제 샀는지, 언제 읽었었는지 기억을 뒤로뒤로 되짚어 보았다. 아마도 그때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현실에 퐁당 몸을 담그는 것보다는 지나간 과거의 지식 겉핥기나 할까하고 이 책을 골랐던 것 같다.

어쨌든, <, , >를 다 읽지는 못했지만 작자가 말하려는 의미는 그때 대충은 알았었던 것 같다 저자가 뉴기니에서 만난 한 흑인이 던진 질문 - “왜 우리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라는 직설적인 물음에 저자는 진지한 답을 구하려고 한다. 방대한 양의 자료와 현지답사를 거쳐 그는 결론적으로 세 가지 중요한 핵심을 발견한다. - , 책 제목으로 나와 있는 세 가지 무기와 그것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지리적 원인이든 이유여하 막론다고) 끼리의 차이를 만들고, 먼저 무기를 선점한 자가 세상의 화물을 거의 독차지 했다고 - 그래, 최소한 당신네 종족이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반쯤 읽다만 책의 일부를 접어놓은 채 책을 바닥에 던져놓고, 이렇게 다시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 지금은, 앞으로는 어떻게?

사실 앞으로 어떻게 라는 질문을 저자에게 던져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 세상을 그가 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같은 시간대를 야금야금 물어가면서 살고 있고, 의식하든 못 하든 어떤 방향을 가지고 다 같이 몰려가고 있으니, 어느 한 사람만 쳐다본다고 진리가 딱 하고 나타나지는 않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사실 해도 잘 안 되는 이유는, 해도 잘 안 되는 세상에 당신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 TV에서 영재가 나오는 방송을 보고 있다가 책장에 꼽혀 먼지만 잔뜩 먹고 있는 책 제목을 읽다가 잠깐 센티멘털.

 






일주일에 한 번, 영재 나오는 방송할 시간이 차라리 위 영상 재방이나 줄창 틀어줬으면. 그리고 초등학생때 부터 학교에서 알려주었으면.

 


갑자기 급 우울모드에 빠져 뻘글 쓰고 자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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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게 된 글. 저음 든 생각은 멋지다, 간결하지만 단단한 문장이다. 누가 쓴 글이지? 


찾아보니,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유명한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다 - 작가 이름은 잘 생각이 안 나더라도,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그가 쓴 작품은 모두들 생각 나실 듯. 사실, 고도가 높은 하늘 위를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고도(Godot)는 사람 이름이었다. 즉,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에 일어난 이야기를 희곡으로 쓴 글이라고 여기서 알려주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살면서 레지스탕스 일도 좀 했다고 한다.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얼굴도 글 잘 쓰게 생기셨다. 역시 미남형 아저씨.


 

"늘 시도했고,

언제나 실패했지.

그렇더라도,

다시 도전한다,

다시 실패하더라도., 

실패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드니까."



간단히 발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나저나 비가 많이 와서인지 오늘은 기분이 좀 처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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