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눈을 뜨자 광대 카르넷이 재빨리 다가왔다.


이봐, 괜찮은 거야? 너 말이야, 닷새나 잠들어 있었다고.” 그가 주는 물 잔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입술 가까이로 움직이려하는데 심장 언저리에서부터 통증이 몰려온다.

잠깐 기다리게, 내가 도와줄게.” 갑자기 친절해진 광대의 태도에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살짝 미소 짓는 표정으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나? 자네가 날 살렸어.”




던전 안에서 마녀와 마주친 이후로 어떻게 상황이 변해갔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맨 뒷자리에서 치료와 혼란의 주술을 부려야 할 역병의사가 갑자기 선두의 문둥이 앞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면서 내 뒤통수를 팔꿈치로 가격했고,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기 전에 아마도 내가,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옆구리를 단도로 찌르려 했다는 기억만 드문드문 날 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후인지 마녀도, 원정대도,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는 솥단지 안에서 간신히 나만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솥단지에서 나와 물컹하게 젖은 바닥을 기어가다가 옆에 심장이 터져 널브러져 있는 문둥이의 시체를 발견했다. 몸을 뒤졌지만 둘둘 말린 붕대 하나와 그가 쓰던 장검만 발견했을 뿐 그의 배낭 안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검을 지팡이삼아 자세를 바로잡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투를 벌인 현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주변이 깨끗했다. 단지 문둥이의 시체와 진동하는 피냄새만이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었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땀이 차오른 듯 얼굴이 간지러워 손바닥으로 문질렀다가 비명을 질렀다. 내 얼굴의 살점이 손바닥에 묻어 나왔다. 코와 볼, 입술이 젤리 덩어리처럼 하나로 뒤엉켜 벗겨지고 있었다 아마도 저 끓는 솥단지 안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왜 물 밖에 내놓은 얼굴만 이럴까 계속 손으로 만져 더 상하게 하지 않도록, 붕대를 얼굴에 칭칭 감고 장검에 의지해서 앞으로 한 발짝씩 걸어 나갔다. 서둘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거대한 생물의 내장 속 같은 동굴의 계단을 한 발짝씩 힘겹게 오르내리고 있을 때, 구석 모퉁이에서 사람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검을 든 손에 힘을 주고 살금살금 바위 뒤로 다가갔다. 광대였다. 광대가 관처럼 네모난 동굴 구석 모퉁이에서 혼자 훌쩍이고 있었다. 안도감에 그에게 다가가자 깜짝 놀란 듯 광대가 반 쯤 부러진 만돌린을 내게 휘둘렀다. 장검으로 살짝 밀어내고 그에게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지 물었다.

정말 너 그 애송이야?”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나 보다. 나는 내가 가진 단검 두 동강으로 부러진 을 그에게 내 보이고, 그의 이름과 한때는 심장이 뛰고 있던 문둥이 - 어윈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그가 홀로 남겨진 후에 겪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옥이 따로 없네. 돼지만한 크기의 바퀴벌레와 쥐새끼, 그리고 배에 녹색의 독무늬가 있는 거대한 거미와 싸워 살아남았지. 그런데, 길을 찾을 수 없었어. 며칠을 헤맨 것 같은데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네.”

의례 용병이라면, 이런 칠흑의 미로에서 전투를 벌일 예정이라면,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신만이 아는 표식을 남기는 법이다. 그래야 전투가 끝난 후 챙긴 전리품을 들고 미리 점찍어 두었던 여자를 만나러 술집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를 애송이라고 부르는, 이 길치 광대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지막이 한 숨을 내쉬며 내가 남긴 표식에 대해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눈가에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겉치레는 그 이후에 받겠다고 하자 그가 결연한 표정을 하고서는 내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자신의 어께를 들이민다. 그가 나를 부축하고, 우리는 표식을 좌표삼아 출구를 향해 조금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굴 내부가 약간씩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출구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부축하던 광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다시 동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뒤에서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곤충의 관절처럼 생긴 팔이 광대의 다리를 꿰어 낚고 있었다. 재빨리 장검으로 관절을 잘라내자 다른 쪽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그것이 나를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겨내었다.

괴물의 얼굴은 흡사 사람과 곤충을 섞어 놓은 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 돌 같은 딱지만 크게 붙어 있었고, 네 개의 다리가 동그란 몸통에 붙어 있었으며, 채찍처럼 마음대로 휘둘러대는 날카로운 꼬리 끝에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초록색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괴물이 네 개의 다리로 나를 휘감아 조여 오자 내 입에서는 비명이, 가슴에서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노래가, 희미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동굴 안에 울리고 있었다. 광대의 노래다. ‘천상의 휴식’,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부여잡고서, 새벽녘 같은 희미한 빛만이 들어오는 동굴 바닥에 상체만 간신히 세우고선, 광대가,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리깃털로 만든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기분이 드는 노래 중간 즈음에 괴물의 조임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품속에 두었던 부러진 단검을 꺼내 그 괴물의 가슴에 깊이 박아 넣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더니, 광대가 넌지시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대로 한 방 먹였더구먼. 일격에 갔어, 그 괴물 말이야. 단검이 네게 소중한 물건인 것 같아 빼내가려고 했는데, 어찌나 단단히 박혀 있던지. 아쉽겠지만, 그 물건은 포기하게.”

정신을 잃은 너를 업고서 출구 쪽으로 향했지. 출구는 그리 멀지 않았어. 하지만 나도 상처가 깊었는지 결국 동굴 입구에서 기절하고 말았네.”

그러고는 양 손을 높이 휘저으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런 우리를 발견한 것이 바로 여기 집주인, 장의사 양반일세.”

그러면서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장의사 양반이 말이야,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염을 하려고 했단 말이야. 소독약을 내 발에 붓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내가 깨어나자 그, 흐흐, 장의사 표정을 자네가 봤어야 하는데 말이지. 분위기 장난 아니었다네.”




광대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꿈속에서는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굴에 피범벅이 된 시체들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죽여도 시체들은 다시 살아났다. 철퇴에 머리통이 깨지고 작살에 심장이 관통된 시체들은 다시 일어나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분전하던 한 사람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다가 허우적대며 잠에서 깨어났다

내 옆에는 아직도 그 광대 카르넷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자네에게 줄 것이 있어.”

그가 주섬주섬 자기 배낭에 있던 물건을 꺼내어 침대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꽤 많은 양의 편지와 문서들과 한 권의 책, 그리고 열다섯 개의 금화와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보석이 든 주머니가 있었다.

모두 우리의 절반이 죽었지만 원정 결과물일세. 보석과 금화는 거의 같은 가치이니 둘 중 자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게. 그리고……. 무엇보다 이 편지 말인데, 자네가 좀 읽어주었으면 하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니까 읽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편지는 문둥이 어윈이 자신의 가족이나 지역 친지에게 보내는 유언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가 다시 내게 설명했다.

장의사가 자네를 살짝 알아보더군. 이 지역 출신이라고 말이야. 자네 얼굴은 이미 못쓰게 되었지만 내 설명을 듣자 어렴풋이 알아채더라고. 그리고 어윈의 가족은 모두 죽었어. 내가 아는 한 어윈과 가까운 사람은 자네밖에 없으니, 상관없지 않은가. 한 번 찬찬히 읽어보게.”


말 많은 광대가 문 밖으로 나가자 한껏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쌓여있는 문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밤늦은 시각에서야 문서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피곤이 산처럼 밀려 왔으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직도 내 심장 옆에서 꿈틀대고 있는 녹색의 독극물이 주는 고통 때문도 아니고,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얼굴의 상처 때문만도 아니었다. 불쌍한 나의 아버지, 불쌍한 가족, 불쌍한 사람들, 그리고 불쌍한 카르넷…….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어렴풋하게 태양 빛이 창밖으로 올라올 때 쯤, 카르넷이 긴장한 표정으로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나는 조용히 문둥이의 필체가 담긴 편지들을 순서대로 그에게 보여 주었다. 광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편지에 의하면 광대와 문둥이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문둥이의 발작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광대의 노래가 반드시 필요했다. 두 형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름 없는 기사와 문둥이 는 지역 주민을 매수하여 카르넷을 죽기 직전까지 매질하도록 하였고, 마치 자신이 구해준 것처럼 위장했다. 광대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사람이 되자,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주민들이 이 사실을 퍼뜨릴까 염려되어 모조리 도륙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조용히 편지를 끝까지 읽은 카르넷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내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 진정으로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것과 진실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해.

나는 별 것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문을 반 쯤 열고 나가면서 그는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여기서 장의사 일을 도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자신을 찾으려면 수도원으로 오라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입술이 잠시 씰룩거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마도 그는 문 밖에서, 소리 내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닫고서는, 울고 있을 것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을 위해 살았다. 생명의 은인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그 문둥이는 철저히 이용해 왔었다.

 

그리고 나의 가족 - 아버지, 어머니 과 이웃들. 이제 그 때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영주가 죽은 자신의 부인을 살리겠다고 부활의 주문을 사용한 순간, 우리 마을에는 저주가 내렸다. 어떤 사람은 쓰고 있는 갑옷을 평생 벗을 수 없어 갑옷 안에서 살이 썩어가는 상태로, 어떤 사람은 문둥병 환자가 되어 밤마다 두통에 시달리는 저주를, 어떤 사람은 보름달이 뜨면 괴물로 변하고, 어떤 소녀는 기억과 목소리를 잃게 되며, 어떤 여인 나의 어머니는 - 살아서는 자식을 안아 볼 수 없는 저주를, 그리고 어떤 남자 나의 아버지 - 는 평생 의혹의 씨앗을 마음에 품고 살게 되고, 그리고 어떤 아이는 아비의 원수와 똑같이 생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는 저주를…….


오랜 전 내 부모님은 이 지역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금실 좋은 부부였다. 새로 부임한 영주가 자신의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서 활기차고 부유한 곳이었다. 탐욕스러운 영주가 자신의 카르마에 의해 부인을 잃고 나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동굴을 파기 시작했다.

마녀의 저주가 터졌을 때, 만삭의 몸으로 그 현장에 끌려간 어머니만이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나를 낳은 후 어머니가 사망하자, 주변에서는 난리 통에 살아남았던 어머니가 저주의 원흉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나와 함께 몰래 이 마을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전혀 아버지를 닮지 않자, 그의 마음에 심어진 의혹의 씨앗이 싹을 틔우면서 그를 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이 녀석은 내 아들이 아닐지도 몰라.’ 검은 의혹이 승리할 때면 아버지는 나를 모질게 매질했었다. 문둥이 같은 자식, 지어미를 잡아먹은 놈. 그리고 창녀의 자식이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그날, 비바람이 치던 날, 높은 보수를 받아 신나하던 날, 내 아버지는 자신의 심장에 푸른 단도를 꼽고선 나를 끌어안으며 울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사과라고 하면서 그는 울고 있었다.


창밖으로 완전히 해가 뜨자 밖으로 나가고 싶어져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느껴진다. 내 안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저 동굴의 썩은 공기를 몰아내고자 크게 심호흡을 하고 오른 쪽 손에 목발을 짚고서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갔다. 집 앞 개울에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붕대로 감긴 얼굴은 사람의 형상으로서 갖춰야 할 살가죽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이젠 상관없다라고 작게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아니 내게 내려진 저주가 이제야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온 몸이 망가져 정상적인 삶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아직, 나는 살아있다. 그렇게 한 번 더 목소리를 내어 말해 보았다.


내게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지 지금은 알 수가 없지만, 여기에 남아, 나는 장의사의 일을 돕기로 했다. 내게 떨림을 남겨준 여급 스베틀리나가 언젠가는 날 찾아올 지도 모르고,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든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여기서 빌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결심을 굳히듯 하늘에 떠 있는 해를 향해 한 번 더 입술을 움직여 말해 보았다.

나는 아직 살아있으며,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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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의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이 편지를 네게 쓴다. 어쩌면 이번이 내 마지막 여행일지도. 녹슨 갑옷 안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몸의 관절이 삐걱거리고 썩어가는 살 냄새가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내 후각기관을 통해 이제 죽음이, 영원한 휴식이 내게 닥쳐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형제여.

 그러나 슬퍼하지 말라. 우리의 임무, 아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냈다. 지금 나는 그 물건을 이 마차에 태워 영주의 땅으로 데리고 가고 있다. 그렇다. 저주를 풀 수 있는 세 가지 물건 중 아무도 찾지 못했던 영주의 피가 섞인 가족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붉은 촛불 아래서도 검푸른 빛을 뿜어내는 단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 영주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고자 마지막에 내게 전달하고자 했던 단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우리가 찾던, 우리에게 덧씌워진 이 망할 저주를 풀 마지막 퍼즐 조각임이 틀림없다.

 아쉽게도, 이 젊은이를 포섭하기 위해 내가 가진 생명의 부름을 그에게 주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알아주게 - 어쩌면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네. 마녀 앞에서 그대로 그녀석의 심장을 조각내면 알아서 그 돌에 피가 스며들게 될 것이고, 네가 가진 부활의 두루마리에 그 루비를 박아 넣기만 하면 나머지는 마녀가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기 때문이지.

 형제여.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비록 너의 피부가 뭉개지고 물집이 터져 짓물러진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진다면, 우리 둘이 함께한 무수한 사냥과, 수천 개의 빛나는 별밤 아래서 보낸 우리의 시간들을 기억하거라. - 네가 끝까지 이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너를 다독여 줄 것이다.

 오래 전 마을에 내려진 저주를 풀 수 있는 것은 이제 우리뿐일지도 모른다. - 아니, 이 편지를 네가 보고 있다면 이미 나는 죽었을 것이므로, 이제 모든 일은 네게 달린 것이다. 부디 비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이 저주를 풀고, 대가도 없이 공짜 점심을 처먹고 있는 듯 희희덕거리고 있는 저 영주의 자식을 고통의 비명을 지르게 하며 우리의 원한을 풀어 달라, 형제여!

 이것이 네게 주는 마지막 임무이다. 부디 꼭 완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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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가 멈추질 않는다. 단도에 옆구리를 살짝 베인 것뿐인데, 한 방울씩 떨어지던 피가 이제는 꿀렁거리는 뱀의 혓바닥처럼 맥박 치듯 흘러내리고 있다. ,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게다. ‘비정의 형제도 여기서 끝이다. -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애송이 도굴꾼 자식 때문이다. 젠장, 젠장, 젠장!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나던 더러운 여관에서 그 애송이가 원정 제안서를 내밀었을 때, 나는 내 동료이자 친구인 문둥이 어윈이라고 내가 이름 지어준 에게 그 자식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난 그자식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랄까, 분명 행복한 감정에 젖어 있어서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눈빛이긴 한데 용병으로서의 날카로운 맛이 떨어졌다. 의례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용병이라면, 만취한 상태에서라도 상대방이 적의를 품으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초짜 용병은 내가 신발에 숨겨둔 작은 칼날을 그의 사타구니에 슬쩍 들이 밀었을 때에도 마냥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은 신호야.’ 내가 나지막이 어윈에게 속삭였을 때 의외로 문둥이 녀석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미 그 애송이 도굴꾼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 용병이 각자의 손목을 잡는 행위는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하며 서로 얼굴에 침을 뱉어 계약을 파기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내 파트너가 그런 애송이와 계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봐, 나는 빠질 거야.” 삐걱거리는 나무의자를 뒤로 물리면서 내가 말했다. “난 빼줘.”

 그때 어윈의 표정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오랫동안 동료로서, 내 뒤통수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전사로서,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그의 얼굴을 보아 왔지만, 그때 그 문둥이가 지은 표정은 살기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치 죽음의 신이 바로 코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한, 험악한 얼굴이었다. - 만일 내가 그때 여관을 나갔다면 즉시 내 머리통은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분명히.

 첫 원정은 의외로 순조롭게 끝났다. 내가 치료자로서 수녀원의 성녀를 동료로 데려 갈 것을 주장했지만, 끝내 이름 모를 역병의사가 마지막 원정자로 선정된 것은 탐탁지 않았는데 의외로, 첫 원정은 싱겁게 끝이 났다. 물론 문둥이 어윈이 돌리는 장검의 날에 버틸 도적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도굴꾼이 던진 단검이 착실하게 적의 약점을 파고들긴 했지만, 나의 신들린 듯한 만돌린연주솜씨가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 정신이 붕괴되어 저 깊은 동굴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한낱 괴물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도 밝힌다- 사실 공짜 점심운운하며 애송이가 날 비난만하지 않았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문제는 두 번째 원정이 시작되고 나서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여관에서 사라진 여급의 이야기를 들은 그 애송이 도굴꾼이 이상증세를 보인 것이다. - 어쩌면 캠프파이어 중에 내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던진 농담이 그를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원정만 끝내면 넌 전설로 남을 거야. 마녀를 작은 단도 하나로 끝장낸 용사라고 말이야. 그리고 여자들, 네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귀족의 딸들도 여관의 창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 - 속옷도 입지 않고 바로 널 보러 뛰쳐나온다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그 애송이의 얼굴을 당신이 봤어야 하는데. 세상에나. 그렇게 절망적인 눈을 하고 있는 표정을 난 본적이 없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가? 나는 그냥 용병들이 쓰는 일반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을 뿐이다.

 결국, 마녀와의 전투는, 예상했었지만, 최악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후방에 있어야할 역병의사가 먼저 앞장서더니 마녀의 끓는 항아리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고 우리 세 명이서 마녀의 역겨운 공격을 버텨야만 했다. 마녀가 누군가의 눈알처럼 보이는 미끈거리는 구슬과 창자를 던지기 시작하자 문둥이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내 뒤로 숨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애송이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살기 가득한 눈으로 휘두르는 애송이의 단도가 내 옆구리에 파고들었고, 그것을 본 문둥이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미안, 어윈. 아마도 내가 최후의 일격을 내 파트너에게 날린 것 같다. 난 단지 애송이를 없앨 생각뿐이었는데…….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원정은 실패했고, 나 혼자 살아남아 죽을힘을 다해 이 동굴을 빠져나가고 있다. 내 평생 유일한 친구이자 과거 내 목숨을 살려준 파트너 어윈을 잃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이 어두운 동굴을 홀로 빠져나가고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애송이 도굴꾼이다. 그놈만 없었더라면, 우리 비정의 형제- 물론 자잘한 복수를 의뢰받는 일 뿐이었겠지만 - 계속 잘 나갔을 것이다. 의뢰를 해결하고 그 보수를 받으면 술집에서 어윈은 노란 색 맥주를 들이키고, 나는 그를 위해 신나는 곡을 연주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 애송이만 없었더라면.......

 내 뒤로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끓는 솥 안에서 허우적대던 역병의사의 목소리인지 그 애송이가 지르는 비명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내 뒤에 누가 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내 목숨이 중요하다. 어쨌든 난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

 붕대를 찾기 위해 배낭을 뒤지던 중, 금화 몇 개와 어윈의 필적이 담긴 편지 같은 두루마리를 찾았다. 문둥이가 언제? 왜 내게 이런 것을? 확인은 나중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걸아야 한다. 출구가 멀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더.

 그런데, 저 비명소리. 출구가 가까워지자 더 가까이 들리는 것 같다. 어찌 내가 다시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냥 기분 탓일까? 그럴 거야,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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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오늘 밤은 어려울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그믐은 그 오두막 얼굴에 곰보가 덕지덕지 붙은 주름투성이의 마녀가 사는 곳에 가는 날이지만 오늘은 추적거리며 내리는 이슬비에다가 바람도 많이 분다.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서 저 어두운 산길을 오르기에는 무리다.

 맥주가 가득 든 술잔을 테이블로 나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엉덩이 쪽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새로 도착한 용병들이 짓궂은 표정으로 – 모두 셋인데 하나는 등에 커다란 활을 달고 있지만 머리카락이 위쪽으로 한 움큼 빠져있는 반 대머리고, 하나는 완전히 술에 쩔어 누런 이빨만 보이는 냄새나는 주정뱅이고, 나머지 한 명은 그나마 반들반들하게 젊고 잘생긴 사내인데 옷 위로 도드라진 근육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사는 아닌 것 같다 -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나마 잘생긴 쪽을 향해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여관 주인이 내 옆에 서서는 슬쩍 물어 본다.

 “어떻게 할 거야? 오늘은 재들이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주인이 초조해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좀 있으면 그걸 줘야할 지도 몰라.”

 나도 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불해야 할 것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하루를 버텨가고 있던, 도시에 사는 검은 쥐새끼와 같은 처지였다. 그런 나를 이 여관주인이 발견하고는 내게 잠잘 곳과 진짜 먹을 것을 주었다. 처음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지었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한데, 마치 귀한 보석을 방금 캐 낸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고 있었다.

 “이건 정말 행운이야. 신이 내게 주신 기회라고!”

 처음에는 그의 말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이내 영주의 집에 보내지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기운을 차리고 몸에 살이 붙기 시작한 지 두 달 후에, 주인은 나를 불러서는 내가 영주의 집에 가야하며 그곳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와야 한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집에 있는 책 한 권만 가져오면 된다고. 흔한 책 한 권이라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지. 집에서 나올 때 그것만 가져다주게.”

 그러면서 전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는 한 마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네게도 기회야. 영주는 쭈그렁 주름투성이의 영감이지만 지역의 제일가는 부자라고. 네게도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거야.”

 영주의 집에 도착하자 그가 여관 주인과 똑같은 환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를 반겼다 부활이라고, 신의 기적이 틀림없다고.......

 아, 내 평생 그곳에서의 생활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귀한 음식들, 밤이면 끝없는 육체의 향연이 펼쳐지고, 곱게 갈아 만든 암송아지의 뼈 조각이 들어간 붉은 음료는 그 즐거움을 배가 해 주었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공짜 점심은 그렇게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는다. 곧 내 결점을 보게 된 영주는 즉시 나를 집 밖으로 내쫓고야 말았다.

 여관에 돌아오자 주인은 즉시 그가 응당 받아야 할 것을 요구했으나 나는 그곳에서의 달콤한 생활에 빠져있어서, 그가 원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탄식과 비난에 젖은 그의 분노를 온전히 몇 시간 동안 감내한 후에야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손에서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오두막 마녀를 찾아가. 그리고 마녀가 시키는 대로 해.”

 이후, 매번 그믐이 찾아오면, 나는 마녀를 만나 작은 물병에 그녀가 주는 물을 받아 온다. 그리고 내가 뭔가 요구할 것이 있는 상대가 나타나면 나는 그 물을 마신다. - 그러면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 목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상대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주방 한 구석에서 손으로 턱을 괴고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고 있을 때, 오늘 아침에 새로 도착한 신입 용병이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아침에 오는 길목에서 도적과 한바탕 일이 있어서 동료가 죽었다고 했던가. 허름한 옷에 왼쪽 혁대에 작은 단검만 차고 걷는 모습을 보니 수중에 금화 따위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의자에 앉는 순간, 나는 봤다.

 뱀의 눈처럼 생긴 검고 붉은 루비 - 생명의 부름이라고 불리는 귀한 보석이다! 마녀가 찾고 있던, 그것만 준다면 자신이 가진 어떠한 능력이라도 주겠다고 했던 귀중품이다! 저것만 있으면.......

 침착하자. 가슴속에 숨겨둔 비약이 남아 있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 그래, 있다! 한 모금 정도 남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절대 약병을 완전히 비우지 말라는 마녀의 경고 따위는 무시하자. 저 보석만 있으면 이런 미약은 평생 쓸 만큼 많이 만들 수 있다.

 약병을 모두 비우고 그에게 다가가자 즉시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동공이 커지면서 놀라는 모습이다. 잠시 윗입술을 핥더니 일어서서 내게 다가온다. 여관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가 은화 한 닢을 들이민다. 뭘 원하는가 싶었는데, 가슴이 살짝 답답한 기분이 든다. 앞섶의 끈을 풀었더니 그가 내 가슴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인다. - , 그렇군. 은화 한 닢 따위에 이런 일은 하지 않지만 뭐 보석정도라면……. 이봐, 뜨내기 용병 양반, 너의 보석은 이미 내 주머니에 있다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두고 나는 조심스럽게 바로 여관을 빠져 나온다. 주인이 나의 부재를 조만간 눈치 채겠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다. 미혹의 술잔만 있으면 나는 다시 영주의 집으로 갈 수 있다. 거기서 평생 가짜가 아닌 진짜 안주인으로 살 수 있다. 미약을 사용하며 영주를 평생 내 남편이자 하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마녀를 만나야 한다. 비와 바람이 섞인 날씨 탓인지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왔던 길을 틀릴 리가 없다. , 저 멀리 오두막의 불빛이 보인다. 조금이다 조금만 더.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할 때 비에 젖은 돌계단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두막 안에서, 마치 보고 있다는 듯 마녀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관을 나설 때부터 왜 엉덩이 꼬리뼈 쪽이 가려운걸까 - 그곳에서 뭔가 꿈틀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불빛 탓인지 자꾸만 다리가 겹쳐 보인다. 마치 네 개의 다리가 달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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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의 기회가 있는 거야. 두 번도 아니고 딱 세 번."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않아 검고 누런 냄새가 나는 딱지가 들러붙은 맥주잔을 흔들면서 그 사람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 번 이거든. 여기 이 땅을 - 저주 받을, 툇 – 물려받은 어린 도련님도, 남은 술을 몰래 섞어 파는 저 더러운 술집 주인도, 너 같은 창녀의 자식도 모두 똑 같은 기회가 있는 거야. “ 마지막 말을 하며 그가 히죽대며 웃었다.

 영주의 심부름을 위해 언덕 위의 오두막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들어 온 술집에서, 그 사내는 짐짓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인들을 매섭게 매질하고 높은 이자로 금화를 빌려주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남의 땅을 뺏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가 무슨 일인지 그에게 꽤나 좋은 보수를 내걸고 단순한, 정말 단순한 심부름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가 오면 알려 준다고, 저 높은 곳에서 기분 나쁘게 내려다보면서 그 염병할 신이라는 작자가 말이지.“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남자는 작은 술집에서 몇 명의 여자를 데리고 영업을 하던 포주였다.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질 좋은 럼주를 만들어 그 동네에서는 한동안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내가 태어났고, 이후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몸을 팔던 여자 한 명이 병에 걸렸는데, 그게 도시 내에 퍼져 살던 지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멀리 여기까지 도망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일 이후부터 나는 재수 없는 아이가 되었고 그에게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면 늘 매질을 당하곤 했다. 

 재수 없는 놈, 지어미를 잡아먹은 놈.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나를 집 밖으로 아주 쫓아버리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를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를 싫어했는데……. 


 어쨌든 그 사람이 말했던 세 번의 기회가 내게도 찾아 왔다 - 첫 번째 행운은 그것을 정말 운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알쏭달쏭하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 아마 이것이 하늘이 내게 준 또 하나의 기회일 것이다.

 용병에 참가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음을 밝힌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짝을 이루어 의뢰를 해결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것인가? 내가 자고 있을 때 슬금 다가와 철퇴로 내 두개골을 쪼개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혹은 전장에서 한창 단검을 날리고 있는 와중에 내 뒤통수에 화실을 쏘지 말란 법이라도 있던가? 더욱이 보수를 두둑이 받아 주머니에 금화가 가득 있는 상황이나 혹은 남은 머릿수 비율로 임금을 지불하는 용병 단에 속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내가 지켜온 철칙을 깨기로 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임무다 – 그리고 그만큼 보수도 크다. 


 영주가 용병 단을 모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금세 마을에 알려졌고, 여기저기 힘깨나 쓴다는 풋내기 기사부터 오랫동안 용병생활에 잔뼈가 굵은 나이든 용사들까지 모두 여기에 동참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돈 많은 영주가 쓸 만한 용병을 구하기 위해 깨작거리는 가짜 이야기야 흔하고, 나로서는 그것보다 새로 발굴된 거대무덤 쪽에 마음이 동했지만, 내게 동참을 제안한 그 기사는 이미 한 번 그곳을 가본 적이 있는 경험자였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그 보석들....... 한 번 보기만 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가치는 기껏 금화 몇 닢에 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덤의 부장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영주의 저택으로 가는 길에 마차가 전복되었고 – 아마 산적들이 함정을 설치했을 것이다. 영주로 가기 위해서는 외길밖에 없으니까 - 같이 온 용병은 전복 시 입은 부상과 도적들이 던진 독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내가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우리들 세계에선 누가 죽든 남은 사람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 단 하나, 편지만 빼고.


 술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같이 동참할 용병들을 살펴본다. 다들 긴장감을 애써 없애기 위해 술잔을 들고 크게 웃으며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있지만, 진정한 프로는 혼자 조용히 마시며 관찰한다. 믿을만한 실력 있는 동료를 찾는 것, 그것이 전장에서 살아남는데 가장 중요하므로.


 술집 여급이 나를 보고 웃는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아리다. 지금껏 용병생활에서 많은 여자를 만나보았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아버지의 일 이후로 가정이나 아이는 갖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스베틀리나, 예쁜 이름이다. 은화 한 닢을 주고 가슴을 만져 보았다. 나쁘지 않다. 아이를 여럿 키울 수도 있겠다. 같이 살 수 있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 여관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주인에게서 여관을 인수하여 안주인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곳을 운영하며 이 여자와 같이 살 수도 있다 – 여긴 늘 사람들이 죽고 그만큼 새로 오는 곳이니 장사는 잘 될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 어두운 던전을 몇 번이고 갔다 와야 한다. 누구도 가지 못했던, 그믐보다도 더 어둡고 어두운 곳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생물과 마주쳐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약간의 보석과 신비한 주문이 적혀 있는 책 한권만 훔쳐가려고 했었다 – 오래 있다가는 나도 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처럼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스베틀리나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저 여자와 같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몇 번이나 목숨을 담보로 괴물과 마주치더라도 그녀와 같이 살 수만 있다면 해 볼만하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래, 내일이라도 당장 용병을 고용하며 저 동굴에 들어갈 것이다. 진귀한 루비와 다이아몬드를 구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지도 모른다. - 세상에 공짜로 점심을 주는 곳은 없으니까


 그러나 스베틀리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겠다. 그것이 내가 오늘 이 여관에서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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