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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살펴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천정에 달려있는 형광등 불빛의 자극 때문인지, 하얀색으로 칠해진 벽과 그 사이로 검은 아지랑이 같은 형체가 벽 주위를 따라 울렁거리는 것만 보였다. 속이 메스꺼워져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손을 들어 눈 주위의 눈곱을 좀 떼어내고 다시 주변을 확인했다. 멍이 들어 검어진 눈꺼풀을 간신히 반절쯤 올려 뜬 눈으로 보기에도 내가 누워있는 방 이 병실은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갈라진 틈을 가리기 위해 회반죽으로 덧칠된 벽에서 떨어져 나온 흰색 페인트가 더러운 바닥에 조각으로 갈려 쌓여 있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천장에 달아둔 형광등은 청색이 너무 많이 섞여서 내 팔에 꼽힌 플라스틱 튜브마저 파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최첨단 연구를 진행하는 장소라고 해도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회사는 보이지 않는 곳, 특히 의무실 그들이 낙오자의 쉼터라고 부르는 장소 같은 곳에는 영 투자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몸이 좀 좋지 않다고 해서 이곳을 자진해서 찾는, 정신 나간 사람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다 - 그들은 모든 곳에서 지켜보고 모두에게 점수를 부여하니까. 어쨌든 아마도, 이곳도 직원 복지를 위한 병원 같은 시설에 투자하는 것은 뒷전이거나 혹은 그 비용을 누군가가 자신의 뒷주머니로 쓸어 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뒤통수가 가려워 손으로 긁었더니 오른쪽 뒷머리 머리카락 일부가 빠진 것처럼 그 부분에서 맨 살이 만져졌다. 고개를 배계에 내려놓으면서 숨을 길게 내쉰 후 잠시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냥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사고가 있었나보다.

 

충돌 감지기의 정렬 상태를 검사하라는 관리자 바딤의 명령을 받고 수리 엔지니어와 함께 새벽 일찍부터 지하에 있는 입자 가속기까지 갔다. 어제 밤늦게 실시한 실험 결과가 신통치 않자 우리의 위대한 영웅이자 이 실험의 책임자인 바딤은 결국 실패의 원인을 정비 불량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다. 한 참 자고 있을 시간에 불려나온 일급 정비사 이고르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날을 세웠다.

새벽부터 깨워서 누가 큰 사고를 쳤나보다고 생각했는데, 뭘 더 확인을 하자는 거요?” 관리자 바딤의 명령이라고 짧게 답을 했더니 그가 입을 앞으로 삐죽거리면서 바닥으로 침을 뱉고는 허공을 향해 거하게 욕을 쏘아붙였다.

그 책임자 동지가 시킨 일이라고? 젠장.” 한참을 욕과 반말을 섞어 자신의 불만을 뱉어냈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땅이 꺼질 것처럼 길게 한숨을 쉬고선 내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정비는 확실합니다. 그건 내가 보증합니다, 동지.”

만일 우리 반이 일을 그르쳤다면, 내가 성을 갈리다.” 생각할수록 분한 듯 그가 오른 손에 움켜쥔 공구 통을 공중으로 위협적으로 휘휘 저었다. 그에 맞춰 상자 안에 있던 망치 같은 단단한 공구가 상자 벽에 부딪기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울림소리가 긴 튜브 같은 터널 내에 반향을 일으키며 길게 꼬리를 남겼지만 나는 말없이 앞으로 걷기만 했다.

그런 내 표정을 한 번 쓱 보고나서 대충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겠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은 것은 알고 있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번에는 어금니를 꽉 물고 말을 이었다. “우리 정비 쪽에 책임을 지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쇼. , .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을 거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수석 엔지니어, ‘이고르 보브친은 우리 연구소 정비반의 반장이다. 처음 그가 반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무런 학위도 없는 그가 어떻게 우리 연구소의 정비반장까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당 고위부원인 그의 삼촌이 힘을 써 주었을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예전 최고 관리자였던 변태 벨로프와 그 뚱뚱한 아내의 정부가 되어서 그 힘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 소문이 일부는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 연구소는 아무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었다.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최상의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20대에 이미 박사학위 두 세 개쯤은 있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무지막지한 사상검증을 당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일반인이 이곳에 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 식당에서 반쪼가리가 된 고등어의 몸통을 포크로 쿡쿡 쑤시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말로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시골의 공업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할 정도로 머리가 나빴지만 어쩐 일인지 손을 쓰는 일에는 꽤 재간이 많았다면서, 특히 금속과 관련된 일이라면 머리보다는 손이 먼저 움직인다고 했다.

거 내 일이란 게 말이요, 동지들. 가계에서 덧셈도 못하는 이 돌 머리도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금속만 보면 알아서 내 손이 움직여준단 말이지. 고것들이 마치 젤리 같아진다니깐. 아무리 단단한 놈이라도 딱 보면 견적이 나오는 거요, 거기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고등어 반 토막을 입에 털어 넣고선 우물거리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어떨 때는 마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아니, ... 숫자가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리고 손이 따라 오는 거요. 그러면 뭐 잘 되더라고.”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담당한 실험 설비는 완벽했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기구가 규격에 맞게 정확히 맞물렸다. 특히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비브리늄 금속을 합금하여 주물 틀에 성형한 일은 전설로 남을 정도의 위대한 업적이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곧 당의 중앙정부가 명예훈장을 하사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그가 새벽부터 불려 나와서는 자신의 잘못으로 실험을 망쳤다는 비난의 증거를 본인이 직접 만들기 위해 나와 함께 이 긴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로서는 통탄할 만한 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명예훈장 운운하더니 오늘은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한 증거를 만들러 새벽부터 불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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