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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둘이서 원치 않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터널을 지나가자 드디어 거대한 크기의 충돌 감지기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고르가 감지기 앞에 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입구를 감싸고 있는 코일을 쓱 손으로 쓸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거 감는다고 반년이나 잠을 제대로 못 잤었지. 그래도 다 해 놓으니 보람은 있어. 저 모습을 보시오, 동무. 마치 수천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아 거대한 똬리를 튼 것처럼 아름답지 않소?”

그의 말처럼 충돌 감지기는 거대한 크기뿐만 아니라 그 형체도 기괴했다. 마치 수천의 작은 바람들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고 그것을 중앙의 원으로 일제히 몰아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중앙으로 빨아들이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한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로 좁혀서 세부적인 구조를 자세히 보면, 그렇게 큰 구조물이 사실은 아주 작고 반짝이는 수천 개의 코일을 일일이 꼬아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눈으로 그 광경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코어를 감싸고 있는 중앙 돔에 다다르자, 이고르가 먼저 입구에 놓인 간이 사다리를 타고 중심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래에서 보조하면서 그가 이르는 대로 공구 통에 있는 장비들을 하나씩 올려 주었다. 혼자서 끙끙거리며 사람 어께너비의 코어 입구 문에 머리를 들이민 그가 한참 후에서야 이제 다 됐다라면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잘 알고 있겠지만.” 공구를 든 오른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자 그의 코에 검댕이 묻어나왔다.

실험이 끝난 다음엔 꼭 중앙 크리스털을 손 봐야 합니다. 충돌인지 뭔지로 매번 위치가 조금 틀어지니까.”

그리고, 말이오, 동무그가 일부러 표정을 험하게 일그러뜨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크리스털 위치는 말이요. 어제 실험 이전에는 원래 있어야 할 장소에 한 치 오차도 없이 있었단 말이오, 실험 전에는! 절대 그것 때문에 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정비반장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보는 사람은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는 어떠한 학위도, 아무런 연줄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자신을 대신해 벌을 받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부로 그의 화려한 경력도 이제 내리막 길만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그가 작업한 것을 내가 확인할 일은 남아 있었다. 고위부에서는 그가 작업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려며 나를 딸려 보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를 쫓아내기 위한 증거품의 하나로서 나를 여기에 끼워 놓았다. 오늘 여기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최종 보고서는 모두 그의 잘못 때문으로 기록될 것이다. <애초에 정비 반장이 설계대로 시공을 하지 못한 탓에 실험이 실패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다>라고. 아무런 죄가 없는 그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시나리오는 이미 짜여 승인까지 완료되었고 지금으로서는 우리 둘 모두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다, 정말 안타깝지만.

그런 생각으로 바닥을 향해 한숨을 쉬었더니, 그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이크로미터를 내게 주면서 기운 내라는 듯 내 어께를 가볍게 툭 쳤다.

살다보면 말이요.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일로 골머리를 썩을 때도 있는 거요. 그렇지만, , 그런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

 

희미한 미소를 띠고선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를 아래에 두고 나는, 사다리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돔의 열린 뚜껑을 한 쪽으로 밀고서 어께와 머리를 코어 입구 쪽에 넣었다. 멀리 중앙 쪽에 크리스털, 즉 커다란 블루 사파이어가 네 개의 금속 다리를 지렛대 삼아 공중에 떠 있었다. 마이크로미터를 금속 사이에 집어넣고 사파이어와의 간격을 차례대로 측정하기 시작했다. 세 개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금속 대에 손을 뻗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천정에 달린 경고등이 붉게 번쩍였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입자 가속기를 한 번 돌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어제 밤의 가동실험에만 3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의 전력을 모두 쏟아 부어야 했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가 끊긴 도시 시민들의 항의로 사내 전화가 모두 불통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일정에도 없는 실험을, 일 주일도 아니고 몇 시간 만에 다시 한다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 논리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없다는 듯 천정의 경고등은 붉게 번쩍이며 요란한 경고의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 ‘좀 있으면 굉장한 양의 에너지가 네가 있는 곳으로 들이 닥칠 거야. 얼른 빠져 나와.’라고.

코어에서 몸을 빼려고 하는데 마음만 급하지 몸이, 어께가 잘 빠지지 않았다. 침착하자고, 이건 경고등의 오류일거라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주문을 외우듯 외치면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과는 반대로 코어가 있는 돔의 온도는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내뱉은 숨이 수증기가 되어 벽에 달라붙고 있었고 철제 빔을 잡은 왼손은 얼어붙을 듯 차가워져 갔다. 가동은, 시스템의 가동은 지금 시작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허둥대다가 마이크로미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꺼내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둔 다면 저 작은 금속 때문에 코어 자체가 녹아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반쯤 빼낸 어께를 다시 코어에 밀어 넣고 손으로 마이크로미터를 잡았다. 이제 됐다고 생각한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것은 순수한 백색의 세상이었다. 눈 안에 있는 비문조차 보이지 않는, 티끌 한 점 없는 순수한 색. 아마도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리라.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리를 움직여 걸어보려 아래를 봤더니 내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점이 보였다. 완벽한 백색의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먼지가 들러붙었다. 기분이 나빠져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는데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저 순수한 백색과 바닥의 검은 점 하나만 있을 뿐.  

뭔가 잘못되어 있다, 모순되어 있다. 여기가 꿈 속 세상이 아니라면 내 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내가 보고 있는 이 백색의 세상은 내 눈을 통해 보는 것인가? 생각의 끈을 하나 풀기 시작하자 연쇄작용처럼 수많은 의문들이 동시에 머릿속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에 공명하듯 내 아래에 있던 검은 점이 점점 커지더니 둥근 원이 되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내 몸(그것이 존재한다면)을 빨아들였다.

 

암흑.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까만색으로도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칠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지만 여기에는 (백색의 세상에는 없던) 누군가가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소리도 없이 지켜보더니 갑자기 내가 살아온 날들을 억지로 되짚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수 밀리세컨드 단위의 시간으로 내 삶의 행적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까발려지는 것은 그 어떠한 육체적 고문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이 일이 꿈이기를, 어서 빨래 악몽에서 깨어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그 누군가를 향해 부탁했으나 일은 중단되지 않았다결국 나는 나의 과거를 전부 확인하고 나서 그 이전에 내가 어떠한 존재였는지 까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과거 유독한 바다에 사는 꼬리달린 작은 생명체였고, 소행성의 일부가 되어 영겁의 시간을 별들 사이를 여행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푸른 별의 재료이었고, 훨씬 이전의 시간에서는 눈이 부시도록 밝은 한 점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며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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