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 여자 간호사가 가느다란 양 팔로 네모난 차트를 안고서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잠에서 깬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작고 밝은 미소를 내게 내보였다. 방에 들어와 팔에 꼽힌 바늘의 위치와 남은 수액의 양을 빠르게 확인한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의 매력적인 눈인사를 하면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간호사 패트리시아는 복수를 꿈꾸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유혹하여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간 의사 볼코프를 같은 방식으로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하고 있으나, 결과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의사는 그녀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복수심을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면서 그 의도적인 접근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요란한 발소리를 내면서 연구소의 총 책임자인 바딤과 의사 볼코프가 같이 병실에 들어왔다. 바딤이 오자마자 내가 누워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와서는 내 손을 잡고 막무가내로 흔들어 댔다.

수고 많았소, 세르게이 동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동무의 도전 덕분에 이번 실험이 성공했소! 드디어 학계에서 소문으로만 돌던 새로운 힘의 입자, (B)를 찾아낸 것이지. 이것은 우리 우수한 소비에트 인민들이 모여 이룬 위대한 업적이자 우리 위대한 지도부의 핵심인 최고 수석 동지의 축복에 힘입은 바요.”

그가 하도 내 팔을 높이 위아래로 쳐들어서인지 주사바늘과 연결되어 있는 튜브로 역류한 피가 붉게 배어 나왔다. 그것을 본 의사가 잠깐 내 상태를 살펴보겠다는 몸짓으로 바딤의 앞을 막아서서 튜브를 보는 척 하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게 찡긋거렸다.

이후 무엇인가 소곤거리면서 논의하던 두 사람은 조만간 완쾌된 모습으로 보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병실을 떠났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바딤, 연구소장 바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새벽의 실험은 실패했고, 코어 내부에 있던 블루 사파이어는 부서져 조각조각으로 갈렸다. 사실, 오늘의 무모한 가동은 그가 계획한 일이다. 그는 정비반장 이외에 또 다른 희생자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는 나. 내가 골칫거리였다. 오늘 새벽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나를 감시카메라로 몰래 확인한 그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가동스위치를 작동했다. 계획대로라면 상부의 허가 없이 실시한 나의 독단적이고 멍청한 행동으로 인해 오늘 새벽에 나는 사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동안 반복적인 가동으로 부족해진 전력량과 내부에 우연히 떨어진 작은 금속 조각으로 인해 사파이어만 박살나고 나는 살아남았다. 정비반장이 나를 구하는 장면을 감시카메라로 확인한 그는 급히 실험 결과를 조작하고 나를 공범으로 엮기 위해 거짓으로 보고서를 올려두었다. 그러나 비밀 정보요원 드미트리’ - 이곳에서 몰래 연구원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는 그에 의해 오늘의 이 사기극은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상부로 보고서가 올라가면 연구소장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거기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의사 볼코프’. 우수한 두뇌와 천부적인 사교성으로 당 고위간부의 주치의가 되어 일찍부터 명성을 쌓았다. 수많은 고위직들이 숙청당한 살육의 해()에도 그는 자신이 가진 의술과 넓은 인맥을 기반으로 살아남았고, 이후에는 항상 최고 권력의 왼쪽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단 한 번의 실수 술에 만취한 채 최고위원 딸의 추문에 대해 떠들어댄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한직인 이곳의 의무실로 쫓겨났다. 반복적이고 변화 없는 일상에 무료해진 그는 환자와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반인륜적인 범죄들을 여럿 저질렀으나 그 누구도 그의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에서 건강을 유지한 채 오래오래 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병실을 방문한 사람은 정비반장 이고르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고개만 빠끔히 들이민 그가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병실로 성큼 들어와서는, 내게 짧은 목례를 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오. 그리고……, 새벽일은 정말 유감이오.”

나는 내 옆에 앉은 그의 손을 세게 잡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를 꺼내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제야 그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누구든 그 상황에서는 나와 같이 했을 것이라면서 무안한 듯 왼손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나는 알고 있는 사실 바딤의 더러운 음모와 나의 역할에 대해서 아무런 거짓 없이 모든 내용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조용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대충 예상은 했었다면서 그런 작자 밑에서 일하려면 무척 힘들었겠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미래를 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아무것도, 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나타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 그가 당황해 하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어쩐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당신, 젊은 박사, 당신도 그곳에 갔었구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한 번 더 쳐다본 후에 그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았다.

내 젊었을 때, 그래 나도 당연히 당신처럼 젊은 시절이 있었지. 눈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한 손에 반쯤 남은 보드카를 쥐고 휘청거리면서 집에 가고 있었어. 갑자기 눈앞이 번쩍 하더니만 도로 한가운데서 정신을 잃고 말았네. 눈을 떴더니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완전히 검은 방에 있더라고,”

그가 과거의 일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천장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거기서 신을 만났네. 그가 내게 선물을 줬지.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 살면서 몇 변의 고비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말이야 목소리가 항상 나를 지켜줬어.”

물론, 좋은 쪽만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보기 싫은 것, 알고 싶지 않은 것들도 알게 되더라고. 자네에게만 하는 말인데....... 나는 가족이 없네. 친한 친구도 없어. 그들의 내밀한 비밀을 알게 된 후로는 그들 속에서 살 수가 없었어.”

아직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슬픔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버틴 보람은 있었나보오. 이렇게.......” 그가 나머지 손을 내 손 위에 포개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내 사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말이야.”

 

그의 코에서 불순물이 조금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내 옆에 쓸모없이 있는 붕대를 그에게 쥐어주었다. 힘차게 코를 팽 하고 푼 그가 이제 그만 가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가기 전에 내 얼굴을 잠시 보더니만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앗 하면서 소리를 짧게 질렀다.

, 그리고 좀 미안하게 됐소. 거 젊은 박사양반 얼굴에 난 멍 말이요. 충돌 감지기에서 몸을 빼내다가, 내가 힘을 너무 줬었나 봐, 문에 꽝하고 부딪혀서 생긴 상처요. 미안하오.”

내가 소리 내어 웃자 그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하고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냐는 표정으로.

사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곳에서 알게 된 진실을 그에게 모두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수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그에게 진실은 너무 가혹했다. 그가 말한 그것은 신도 아니고, 우리에게 새로 생긴 그 능력은 선물도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밤새도록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고급 보드카를 여러 병 준비하겠노라고, 그가 크게 웃으면서 문을 닫고 병실을 떠났다.

 

이고르가 떠난 뒤,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이번에는 온전한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내 몸의 왼쪽은 눈부시게 하얀 빛이, 나머지 오른 쪽은 칠흑의 암흑으로 덮여 있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보았지만 변화는 없었다. 한 쪽 방향으로도 뛰어 보았지만 절반으로 잘린 내 몸은 여전히 양쪽의 세상에서 절반씩만 존재했다. 도움을 청하려 소리를 질렀지만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삼켜버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누군가가 나를 보는 느낌을 받았다. 한 명이, 두 명으로, 그 수가 점차 늘어나더니 이윽고 수백에서 수천으로 눈들이 늘어났다. 나는 그 시선의 무게에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두 발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릴 적 밤이면 지붕위에 올라가 반짝이는 별들과 구름처럼 하늘을 가로지른 은하수를 보면서 미래의 꿈을 키웠다. 언젠가, 내 삶이 끝나기 전에 언젠가는(someday in my life) 반짝이는 저 별들 사이를 여행하며 이 세상의 비밀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의 진정한 비밀을 꼭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 그 진실에 다다른 지금, 나는 후회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진실은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었을 때 내가 만난 그것은 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 한조각의 감정도 없는 감시자였다 - 실체가 없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확인하는 자들. 수천조개의 은하수와 그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 무한히 많은 별들도, 작게는 여기 내가 누워 있는 공간도, 그리고 그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이 몸뚱이 또한 모두 실체가 없는 허상이었다. 우리는 하나의 숫자이고, 세상은 수치가 복잡하게 엮인 수학적 함수일 뿐이었으며, (이고르가 말한) 신은 단지 우리를 감시하는 관찰자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이 세계의 관찰을 위해 나와 이고르를 선택하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감정을 가져갔다. 우리 둘은 그들의 도구에 불과했다 - 자신들이 만든 세상을 그 세상의 존재가 가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도구(tool).

 

수십만의 관찰자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한 명씩, 하나씩 헤집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과거의 일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내 삶도 항상 그들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나는 의지는 있지만 한 톨의 비밀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를 지켜보는 눈빛이 수십만에서 수억으로 늘어나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내 입이 조금씩 열리면서 의도하지 않은 말이 어느새 내 입으로 튀어 나왔다.

젠장, 내 인생 최악의 하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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