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욕망의 뿌리

 

  “환자분, 사망할 확률이 50%입니다. 너무 늦게 왔어요.”

  의사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농담인줄로만 알았다. 부모님께 연결된 휴대전화로 50%라는, 그 이상한 사망확률을 똑같이 반복하는 의사를 보고서야, 이것이 심각한 일임을 알았다. 

  산책 중에 시작된 가슴의 통증이 집에 와서도 멈추질 않았다. 참아보려 했으나, 가슴의 고통은 그 한계를 이미 넘었다는 듯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앰뷸런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도, 가슴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무거운 해머로 내려치는 듯 고통스러웠으며, 숨은 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몸에서 난 식은땀은 구급차의 시트를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병원에서 조영제와 마약성 진통제를 맞아 몽롱한 상태에서도 가느다란 철사가 내 핏줄을 뚫고 지나가는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당장은 저 작은 스프링 하나에, 그것을 다루는 의사의 손길에 내 목숨이 달려 있다는 생각보다는, 내 심장이 이렇게 작았구나 하는 생각만, 그때는 그것만 떠올랐을 뿐이다.

  병원에서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운이 좋았다 - ‘환자분 운이 좋았어요.’

  며칠을 중환자실에서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똥도, 오줌도 내 스스로 일어나서 눌 수 있다 –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매일 행했던 이런 작은 일들도, 사람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이 병원이라는 곳이다.

  일반 병실에 누워 생각해 본다. 남은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렇게 거창한 것 보다는 내 삶의 버켓 리스트를 하나하나 짚어본다. 기타를 배우겠다는, 신나게 기타 줄을 댕겨보겠다는 바램. 글을 쓰고 소설을 쓰고 생각을 나누어 보고 싶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조용히 같이 늙어 가는 것.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를 무척 좋아한다. 그 소설에서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주인공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앞에 놓인 이상한 부조리에 맞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신분을 얻어서 부자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는 것 –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나라는 작은 존재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 작은 삶에서의 큰 의미를 깨닫고, 그 힘으로 세상에 맞선다.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태엽을 감으며, 작은 삶이지만 그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사는 것. 시련이 있으면 같이 사는 동반자와 함께 헤엄치며 넘으면 될 것이다 - 나는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가며 늙어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오카다 도루’와 그의 아내 ‘오카다 구미코’처럼.

 


 

  아내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그것도 꽤나 오래된 사이의 애인.

  아내는 조심스러웠다. 처음엔 친구를, 다음엔 동네 모임을, 이후엔 처가까지 핑계거리로 팔아넘겼다. 나중에는 핑계 대는 것도 귀찮아지자, 아내의 직장 근처에 애인과 둘만의 집까지 잡아서 저녁이나 주말이면 둘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슴 아픈 것은 아내와 그녀의 애인이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내 휴대전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혹시나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들킬까봐서 내 핸드폰을 조작하도록 도왔고, 그리하여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 지 남김없이 자신의 애인이 알게 만들었다. 우리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우리 집에는 한 명의 이상한 사람이 더 살고 있던 셈이다. 누군가가, 내가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안방에 똬리를 틀고선 집 안팎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셈이다 –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것부터 부부사이의 일들까지.

  나는 이것을 오래된 내 핸드폰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우더라도 흔적은 남는 법.

  20년이 넘은 이 둘의 은밀한 관계가 어떻게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아내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 20년 전 당시에는 내 사생활 전부를 제 3자에게 넘겨줄 정도로 우리가 모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협박을 받았고, 그로인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 하긴 그게 사실이더라도 남에게 까발려진 남편의 사생활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방식은 분명 잘못되었다.

 


 

  생각해 본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오게 한 욕망의 뿌리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천박함이라고. 남의 아내를 협박하여 남의 가정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남의 손으로 자신의 가정의 일상을 그대로 전달한 그 두 사람의 욕망의 뿌리는 불륜이라는 천박함 그 자체라고.

  결국 내가 살고 있던 가정이라는 세계는, 소설 [태엽감는 새] 속의 주인공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가 아닌, 오카타 도루와 와타야 노부루의 관계였던 것이다. 주인공이 그렇게나 싫어하던 와타야 노부루의 – 천박한 섬의 원숭이가 그들의 관계였던 것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순환하는 천박함의 사이클.

 

  「어딘가 아주 먼 곳에 천박한 섬이 있었어요. 이름을 붙일 만한 섬도 아니죠. 아주 천박한 모양의 천박한 섬으로, 그곳에는 천박한 모양을 한 야자나무가 잘 어울리죠. 
그 야자나무는 천박한 냄새를 풍기는 야자 열매를 만드는데, 마침 그곳에는 천박한 원숭이가 살고 있고, 그 천박한 냄새를 풍기는 야자 열매를 좋아해서 즐겨 먹죠.
그리고 천박한 배설을 하죠. 그 배설물은 땅바닥에 떨어져 천박한 토양을 더욱 천박하게 하고, 그 토양에서 자란 천박한 야자나무를 더욱 천박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한 순환이 계속 되는 거죠.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겁니다. 어떤 종류의 천박함, 어떤 종류의 물구덩이, 어떤 종류의 어두운 부분은 그 자체의 힘으로 그 자체의 사이클을 통해 점점 커지죠.
그리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 아무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게 되죠. 가령 당사자가 멈추고 싶어도 마찬가지예요.」 

 


 

  ‘환자분 운이 좋았어요.’

  그렇다. 나는 운이 좋았다. 급성 신근경색에 결렸어도 절반의 확률에도 살아남았고, 이 이상한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기회가 생겼으니 어쩌면 의사의 말대로 50%의 행운이 함께 한 것인지도 모른다.

  병실의 천정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본다. 의사의 말처럼 죽다 살아난,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여행도 가고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저 버켓 리스트에 한두 가지 항목을 추가한 것 정도일 뿐이다. 사실 100% 깨끗하게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금의 모습을 만들고, 지금의 모습으로부터 미래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과거 없이 미래가 없는 것처럼, 내개 있었던 지난날의 과오나 슬픈 일들을 마냥 잊고 앞으로만 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 최소한 나는 그렇다.

  다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하루하루의 태엽을 감으며 살아가고, 그러다보면 언젠간 좋은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의 나, 50% 확률이라면 이런 믿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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