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생아를 가진 부모에게 앞으로 당신의 아이는 평생 동안 가난한 화가로만 살아가야 한다거나, 기계를 수리하는 엔지니어의 보조기사로서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처음에 가졌던 마음가짐이 변하기도 하며 환경에 따라,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자신의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 누구나 쿠키마스터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 조직은, 입사하는 순간부터 자기 할 일이 딱 정해져 있고 결코 그것을 바꿀 수가 없다.

 

후보생 자격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닥터와 카탈리스트의 존재와 그 비밀스런 역할을 들은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카탈리스트가 되기를 꿈꾼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누구나 멋진 피스톨을 들고 악당을 무찌르는 주인공 007역을 하고 싶어 하지 형광등만 비치는 지하 벙커 아래서 비밀무기나 만들고 있는 반 대머리 코드네임조차 기억나지 않는 무기백업 과학자로는 살고 싶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 우리 후보생 모두는 주인공, 카탈리스트가 되기를 원한다.

낡은 터미널 앞에서 키보드나 열심히 두들기고 있는 닥터뒤에서 멋진 선글라스를 쓴 채로 짐짓 뒷짐을 지고선, ‘아직 분석중인가? 서두르게. 너의 그 작업이 끝나면 내가 저 못된 녀석을 처리할 테니까.’라고 명령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 누구도 닥터 역할 따윈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Z’가 나에게 적성검사 결과를 알려주었을 때,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바로 항의하는 태도를 취했다. 나는 닥터가 아니다. 나는 카탈리스트가 되어야한다 라고.

그러자 그가 다시 특유의 킥킥거리는 웃음을 내게 던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류철을 가리켰다.

결과는 닥터야. 상층부에서 내려온 문서를 보게.”

처음엔 누구나 다 자네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지. 울며불며 매달려도 보고 당장 그만두겠다고 협박도 하지. 그렇지만 결국엔 다 받아들인다고. 시간이 지나면 말이야.”

맞는 말이다. 최상부의 결정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누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들은 콧방귀조차 한 번 뀌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목적을 위해서는 내가 꼭 카탈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번거롭겠지만 닥터의 위치도 많은 도움이 된다. 아쉽지만 지금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에서 바로 나가려고 하자 ‘Z’가 당황한 듯 나를 불러 세웠다.

그게 끝이야? 그냥 닥터로 살겠다고?”

내가 변경불가 명령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자, 그가 실망한 듯 입술을 반쯤 깨물고서는, “젠장. 좀 더 격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실망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듯 나를 향해 손을 몇 번 휘저었다.

그러던 그가 내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기 직전에 무엇인가 재미난 것이 생각났다는 듯, 다시 킥킥 웃으면서 나를 불러 세웠다.

이런 일은 드문데 말이야 알았다. 오케이. .’ 이런 식으로 오늘의 만남을 정리하기에는 뭔가 아쉬워. 그래서, , 내가 선물을 하나 주지. , 단순한 정보일 뿐이야. 기념 머그컵 같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네.”

그러면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가 내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다.

알고 있나? 프로토콜에 어섯 번째 항목이 있다는 것 말이야. 몰랐지? (이건 고위급 책임자들만 알고 있는 정보라고.) 내가 자네에게만 주는 특별 선물이 바로 이것일세. 알려지지 않은 여섯 번째 항목이 그 프로토콜에 있다는 정보 말이야. 하하하하.”


 


 

분류가 끝난 후보생들은 약 반년 정도 각자의 임무에 맞는 특수 교육을 따로 받았다.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이 후보생들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은 생겼음을 고백해야겠다.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지능, 빠른 판단력 등 그들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주어진 훈련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다. 물론 카탈리스트 후보생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우리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우리의 목숨을 쥐고 있는 그들은 우리보다 뛰어난 능력을 반드시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조직 D.D.T (men who use Dynamic Debugging Tools) 또한 우리에게 최고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으며, 최상위 보수를 받았고, 최고가 아닌 식사는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혜택은 공짜가 아니다 - 기억하자. 공짜 점심 따윈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 조직은 그 대가로 목숨을 담보로 한 영원한 충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닥터에게 알맞은(혹은 카탈리스트에게 알맞은) 파트너가 결정되는 시기가 왔다. 작은 홀에 모여 초조하게 동료들끼리 누가 파트너가 될지, 혹은 자신의 파트너는 미리 점찍어둔 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사항들을 소곤거리고 있을 때, 시작을 알리는 벨이 홀에 울리고 그들, 카탈리스트들이 인사 담당자 ‘Z’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짐짓 긴장한 듯한 표정의 카탈리스트들이 들어오고 멀찌감치 일렬로 늘어서자, 능글맞은 표정의 Z가 입을 열었다.

호명하는 닥터는 각자의 카탈리스트 번호 앞에 서도록.”

1번부터 25번까지 차례로 이름을 부르고,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흘끗 보면서 특유의 비웃음과 함께 나를 호출했다.

“26, 조니 타일러.”

내 파트너는 ‘M’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내가 후보생일 때 지켜봐왔던 사람 중 한명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움직일 때에는 날카로운 나이프 같은 남자. 그리고 뭔가 숨기는 과거가 있는 사람.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걸어가자 그가 먼저 살짝 목례를 하면서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고선 내 코드네임을 불러 주었다. ‘J’. 나도 같이 목례하고는 ‘M’하고 그의 코드네임을 조용히 불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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