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눈을 뜨자 광대 카르넷이 재빨리 다가왔다.


이봐, 괜찮은 거야? 너 말이야, 닷새나 잠들어 있었다고.” 그가 주는 물 잔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입술 가까이로 움직이려하는데 심장 언저리에서부터 통증이 몰려온다.

잠깐 기다리게, 내가 도와줄게.” 갑자기 친절해진 광대의 태도에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살짝 미소 짓는 표정으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나? 자네가 날 살렸어.”




던전 안에서 마녀와 마주친 이후로 어떻게 상황이 변해갔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맨 뒷자리에서 치료와 혼란의 주술을 부려야 할 역병의사가 갑자기 선두의 문둥이 앞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면서 내 뒤통수를 팔꿈치로 가격했고,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기 전에 아마도 내가,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옆구리를 단도로 찌르려 했다는 기억만 드문드문 날 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후인지 마녀도, 원정대도,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는 솥단지 안에서 간신히 나만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솥단지에서 나와 물컹하게 젖은 바닥을 기어가다가 옆에 심장이 터져 널브러져 있는 문둥이의 시체를 발견했다. 몸을 뒤졌지만 둘둘 말린 붕대 하나와 그가 쓰던 장검만 발견했을 뿐 그의 배낭 안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검을 지팡이삼아 자세를 바로잡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투를 벌인 현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주변이 깨끗했다. 단지 문둥이의 시체와 진동하는 피냄새만이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었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땀이 차오른 듯 얼굴이 간지러워 손바닥으로 문질렀다가 비명을 질렀다. 내 얼굴의 살점이 손바닥에 묻어 나왔다. 코와 볼, 입술이 젤리 덩어리처럼 하나로 뒤엉켜 벗겨지고 있었다 아마도 저 끓는 솥단지 안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왜 물 밖에 내놓은 얼굴만 이럴까 계속 손으로 만져 더 상하게 하지 않도록, 붕대를 얼굴에 칭칭 감고 장검에 의지해서 앞으로 한 발짝씩 걸어 나갔다. 서둘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거대한 생물의 내장 속 같은 동굴의 계단을 한 발짝씩 힘겹게 오르내리고 있을 때, 구석 모퉁이에서 사람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검을 든 손에 힘을 주고 살금살금 바위 뒤로 다가갔다. 광대였다. 광대가 관처럼 네모난 동굴 구석 모퉁이에서 혼자 훌쩍이고 있었다. 안도감에 그에게 다가가자 깜짝 놀란 듯 광대가 반 쯤 부러진 만돌린을 내게 휘둘렀다. 장검으로 살짝 밀어내고 그에게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지 물었다.

정말 너 그 애송이야?”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나 보다. 나는 내가 가진 단검 두 동강으로 부러진 을 그에게 내 보이고, 그의 이름과 한때는 심장이 뛰고 있던 문둥이 - 어윈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그가 홀로 남겨진 후에 겪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옥이 따로 없네. 돼지만한 크기의 바퀴벌레와 쥐새끼, 그리고 배에 녹색의 독무늬가 있는 거대한 거미와 싸워 살아남았지. 그런데, 길을 찾을 수 없었어. 며칠을 헤맨 것 같은데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네.”

의례 용병이라면, 이런 칠흑의 미로에서 전투를 벌일 예정이라면,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신만이 아는 표식을 남기는 법이다. 그래야 전투가 끝난 후 챙긴 전리품을 들고 미리 점찍어 두었던 여자를 만나러 술집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를 애송이라고 부르는, 이 길치 광대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지막이 한 숨을 내쉬며 내가 남긴 표식에 대해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눈가에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겉치레는 그 이후에 받겠다고 하자 그가 결연한 표정을 하고서는 내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자신의 어께를 들이민다. 그가 나를 부축하고, 우리는 표식을 좌표삼아 출구를 향해 조금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굴 내부가 약간씩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출구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부축하던 광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다시 동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뒤에서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곤충의 관절처럼 생긴 팔이 광대의 다리를 꿰어 낚고 있었다. 재빨리 장검으로 관절을 잘라내자 다른 쪽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그것이 나를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겨내었다.

괴물의 얼굴은 흡사 사람과 곤충을 섞어 놓은 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 돌 같은 딱지만 크게 붙어 있었고, 네 개의 다리가 동그란 몸통에 붙어 있었으며, 채찍처럼 마음대로 휘둘러대는 날카로운 꼬리 끝에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초록색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괴물이 네 개의 다리로 나를 휘감아 조여 오자 내 입에서는 비명이, 가슴에서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노래가, 희미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동굴 안에 울리고 있었다. 광대의 노래다. ‘천상의 휴식’,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부여잡고서, 새벽녘 같은 희미한 빛만이 들어오는 동굴 바닥에 상체만 간신히 세우고선, 광대가,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리깃털로 만든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기분이 드는 노래 중간 즈음에 괴물의 조임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품속에 두었던 부러진 단검을 꺼내 그 괴물의 가슴에 깊이 박아 넣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더니, 광대가 넌지시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대로 한 방 먹였더구먼. 일격에 갔어, 그 괴물 말이야. 단검이 네게 소중한 물건인 것 같아 빼내가려고 했는데, 어찌나 단단히 박혀 있던지. 아쉽겠지만, 그 물건은 포기하게.”

정신을 잃은 너를 업고서 출구 쪽으로 향했지. 출구는 그리 멀지 않았어. 하지만 나도 상처가 깊었는지 결국 동굴 입구에서 기절하고 말았네.”

그러고는 양 손을 높이 휘저으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런 우리를 발견한 것이 바로 여기 집주인, 장의사 양반일세.”

그러면서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장의사 양반이 말이야,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염을 하려고 했단 말이야. 소독약을 내 발에 붓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내가 깨어나자 그, 흐흐, 장의사 표정을 자네가 봤어야 하는데 말이지. 분위기 장난 아니었다네.”




광대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꿈속에서는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굴에 피범벅이 된 시체들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죽여도 시체들은 다시 살아났다. 철퇴에 머리통이 깨지고 작살에 심장이 관통된 시체들은 다시 일어나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분전하던 한 사람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다가 허우적대며 잠에서 깨어났다

내 옆에는 아직도 그 광대 카르넷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자네에게 줄 것이 있어.”

그가 주섬주섬 자기 배낭에 있던 물건을 꺼내어 침대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꽤 많은 양의 편지와 문서들과 한 권의 책, 그리고 열다섯 개의 금화와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보석이 든 주머니가 있었다.

모두 우리의 절반이 죽었지만 원정 결과물일세. 보석과 금화는 거의 같은 가치이니 둘 중 자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게. 그리고……. 무엇보다 이 편지 말인데, 자네가 좀 읽어주었으면 하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니까 읽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편지는 문둥이 어윈이 자신의 가족이나 지역 친지에게 보내는 유언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가 다시 내게 설명했다.

장의사가 자네를 살짝 알아보더군. 이 지역 출신이라고 말이야. 자네 얼굴은 이미 못쓰게 되었지만 내 설명을 듣자 어렴풋이 알아채더라고. 그리고 어윈의 가족은 모두 죽었어. 내가 아는 한 어윈과 가까운 사람은 자네밖에 없으니, 상관없지 않은가. 한 번 찬찬히 읽어보게.”


말 많은 광대가 문 밖으로 나가자 한껏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쌓여있는 문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밤늦은 시각에서야 문서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피곤이 산처럼 밀려 왔으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직도 내 심장 옆에서 꿈틀대고 있는 녹색의 독극물이 주는 고통 때문도 아니고,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얼굴의 상처 때문만도 아니었다. 불쌍한 나의 아버지, 불쌍한 가족, 불쌍한 사람들, 그리고 불쌍한 카르넷…….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어렴풋하게 태양 빛이 창밖으로 올라올 때 쯤, 카르넷이 긴장한 표정으로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나는 조용히 문둥이의 필체가 담긴 편지들을 순서대로 그에게 보여 주었다. 광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편지에 의하면 광대와 문둥이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문둥이의 발작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광대의 노래가 반드시 필요했다. 두 형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름 없는 기사와 문둥이 는 지역 주민을 매수하여 카르넷을 죽기 직전까지 매질하도록 하였고, 마치 자신이 구해준 것처럼 위장했다. 광대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사람이 되자,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주민들이 이 사실을 퍼뜨릴까 염려되어 모조리 도륙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조용히 편지를 끝까지 읽은 카르넷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내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 진정으로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것과 진실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해.

나는 별 것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문을 반 쯤 열고 나가면서 그는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여기서 장의사 일을 도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자신을 찾으려면 수도원으로 오라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입술이 잠시 씰룩거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마도 그는 문 밖에서, 소리 내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닫고서는, 울고 있을 것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을 위해 살았다. 생명의 은인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그 문둥이는 철저히 이용해 왔었다.

 

그리고 나의 가족 - 아버지, 어머니 과 이웃들. 이제 그 때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영주가 죽은 자신의 부인을 살리겠다고 부활의 주문을 사용한 순간, 우리 마을에는 저주가 내렸다. 어떤 사람은 쓰고 있는 갑옷을 평생 벗을 수 없어 갑옷 안에서 살이 썩어가는 상태로, 어떤 사람은 문둥병 환자가 되어 밤마다 두통에 시달리는 저주를, 어떤 사람은 보름달이 뜨면 괴물로 변하고, 어떤 소녀는 기억과 목소리를 잃게 되며, 어떤 여인 나의 어머니는 - 살아서는 자식을 안아 볼 수 없는 저주를, 그리고 어떤 남자 나의 아버지 - 는 평생 의혹의 씨앗을 마음에 품고 살게 되고, 그리고 어떤 아이는 아비의 원수와 똑같이 생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는 저주를…….


오랜 전 내 부모님은 이 지역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금실 좋은 부부였다. 새로 부임한 영주가 자신의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서 활기차고 부유한 곳이었다. 탐욕스러운 영주가 자신의 카르마에 의해 부인을 잃고 나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동굴을 파기 시작했다.

마녀의 저주가 터졌을 때, 만삭의 몸으로 그 현장에 끌려간 어머니만이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나를 낳은 후 어머니가 사망하자, 주변에서는 난리 통에 살아남았던 어머니가 저주의 원흉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나와 함께 몰래 이 마을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전혀 아버지를 닮지 않자, 그의 마음에 심어진 의혹의 씨앗이 싹을 틔우면서 그를 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이 녀석은 내 아들이 아닐지도 몰라.’ 검은 의혹이 승리할 때면 아버지는 나를 모질게 매질했었다. 문둥이 같은 자식, 지어미를 잡아먹은 놈. 그리고 창녀의 자식이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그날, 비바람이 치던 날, 높은 보수를 받아 신나하던 날, 내 아버지는 자신의 심장에 푸른 단도를 꼽고선 나를 끌어안으며 울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사과라고 하면서 그는 울고 있었다.


창밖으로 완전히 해가 뜨자 밖으로 나가고 싶어져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느껴진다. 내 안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저 동굴의 썩은 공기를 몰아내고자 크게 심호흡을 하고 오른 쪽 손에 목발을 짚고서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갔다. 집 앞 개울에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붕대로 감긴 얼굴은 사람의 형상으로서 갖춰야 할 살가죽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이젠 상관없다라고 작게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아니 내게 내려진 저주가 이제야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온 몸이 망가져 정상적인 삶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아직, 나는 살아있다. 그렇게 한 번 더 목소리를 내어 말해 보았다.


내게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지 지금은 알 수가 없지만, 여기에 남아, 나는 장의사의 일을 돕기로 했다. 내게 떨림을 남겨준 여급 스베틀리나가 언젠가는 날 찾아올 지도 모르고,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든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여기서 빌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결심을 굳히듯 하늘에 떠 있는 해를 향해 한 번 더 입술을 움직여 말해 보았다.

나는 아직 살아있으며,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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