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이 편지를 네게 쓴다. 어쩌면 이번이 내 마지막 여행일지도. 녹슨 갑옷 안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몸의 관절이 삐걱거리고 썩어가는 살 냄새가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내 후각기관을 통해 이제 죽음이, 영원한 휴식이 내게 닥쳐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형제여.

 그러나 슬퍼하지 말라. 우리의 임무, 아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냈다. 지금 나는 그 물건을 이 마차에 태워 영주의 땅으로 데리고 가고 있다. 그렇다. 저주를 풀 수 있는 세 가지 물건 중 아무도 찾지 못했던 영주의 피가 섞인 가족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붉은 촛불 아래서도 검푸른 빛을 뿜어내는 단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 영주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고자 마지막에 내게 전달하고자 했던 단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우리가 찾던, 우리에게 덧씌워진 이 망할 저주를 풀 마지막 퍼즐 조각임이 틀림없다.

 아쉽게도, 이 젊은이를 포섭하기 위해 내가 가진 생명의 부름을 그에게 주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알아주게 - 어쩌면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네. 마녀 앞에서 그대로 그녀석의 심장을 조각내면 알아서 그 돌에 피가 스며들게 될 것이고, 네가 가진 부활의 두루마리에 그 루비를 박아 넣기만 하면 나머지는 마녀가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기 때문이지.

 형제여.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비록 너의 피부가 뭉개지고 물집이 터져 짓물러진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진다면, 우리 둘이 함께한 무수한 사냥과, 수천 개의 빛나는 별밤 아래서 보낸 우리의 시간들을 기억하거라. - 네가 끝까지 이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너를 다독여 줄 것이다.

 오래 전 마을에 내려진 저주를 풀 수 있는 것은 이제 우리뿐일지도 모른다. - 아니, 이 편지를 네가 보고 있다면 이미 나는 죽었을 것이므로, 이제 모든 일은 네게 달린 것이다. 부디 비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이 저주를 풀고, 대가도 없이 공짜 점심을 처먹고 있는 듯 희희덕거리고 있는 저 영주의 자식을 고통의 비명을 지르게 하며 우리의 원한을 풀어 달라, 형제여!

 이것이 네게 주는 마지막 임무이다. 부디 꼭 완수하기를." 

반응형

 피가 멈추질 않는다. 단도에 옆구리를 살짝 베인 것뿐인데, 한 방울씩 떨어지던 피가 이제는 꿀렁거리는 뱀의 혓바닥처럼 맥박 치듯 흘러내리고 있다. ,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게다. ‘비정의 형제도 여기서 끝이다. -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애송이 도굴꾼 자식 때문이다. 젠장, 젠장, 젠장!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나던 더러운 여관에서 그 애송이가 원정 제안서를 내밀었을 때, 나는 내 동료이자 친구인 문둥이 어윈이라고 내가 이름 지어준 에게 그 자식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난 그자식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랄까, 분명 행복한 감정에 젖어 있어서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눈빛이긴 한데 용병으로서의 날카로운 맛이 떨어졌다. 의례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용병이라면, 만취한 상태에서라도 상대방이 적의를 품으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초짜 용병은 내가 신발에 숨겨둔 작은 칼날을 그의 사타구니에 슬쩍 들이 밀었을 때에도 마냥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은 신호야.’ 내가 나지막이 어윈에게 속삭였을 때 의외로 문둥이 녀석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미 그 애송이 도굴꾼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 용병이 각자의 손목을 잡는 행위는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하며 서로 얼굴에 침을 뱉어 계약을 파기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내 파트너가 그런 애송이와 계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봐, 나는 빠질 거야.” 삐걱거리는 나무의자를 뒤로 물리면서 내가 말했다. “난 빼줘.”

 그때 어윈의 표정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오랫동안 동료로서, 내 뒤통수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전사로서,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그의 얼굴을 보아 왔지만, 그때 그 문둥이가 지은 표정은 살기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치 죽음의 신이 바로 코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한, 험악한 얼굴이었다. - 만일 내가 그때 여관을 나갔다면 즉시 내 머리통은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분명히.

 첫 원정은 의외로 순조롭게 끝났다. 내가 치료자로서 수녀원의 성녀를 동료로 데려 갈 것을 주장했지만, 끝내 이름 모를 역병의사가 마지막 원정자로 선정된 것은 탐탁지 않았는데 의외로, 첫 원정은 싱겁게 끝이 났다. 물론 문둥이 어윈이 돌리는 장검의 날에 버틸 도적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도굴꾼이 던진 단검이 착실하게 적의 약점을 파고들긴 했지만, 나의 신들린 듯한 만돌린연주솜씨가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 정신이 붕괴되어 저 깊은 동굴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한낱 괴물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도 밝힌다- 사실 공짜 점심운운하며 애송이가 날 비난만하지 않았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문제는 두 번째 원정이 시작되고 나서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여관에서 사라진 여급의 이야기를 들은 그 애송이 도굴꾼이 이상증세를 보인 것이다. - 어쩌면 캠프파이어 중에 내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던진 농담이 그를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원정만 끝내면 넌 전설로 남을 거야. 마녀를 작은 단도 하나로 끝장낸 용사라고 말이야. 그리고 여자들, 네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귀족의 딸들도 여관의 창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 - 속옷도 입지 않고 바로 널 보러 뛰쳐나온다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그 애송이의 얼굴을 당신이 봤어야 하는데. 세상에나. 그렇게 절망적인 눈을 하고 있는 표정을 난 본적이 없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가? 나는 그냥 용병들이 쓰는 일반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을 뿐이다.

 결국, 마녀와의 전투는, 예상했었지만, 최악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후방에 있어야할 역병의사가 먼저 앞장서더니 마녀의 끓는 항아리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고 우리 세 명이서 마녀의 역겨운 공격을 버텨야만 했다. 마녀가 누군가의 눈알처럼 보이는 미끈거리는 구슬과 창자를 던지기 시작하자 문둥이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내 뒤로 숨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애송이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살기 가득한 눈으로 휘두르는 애송이의 단도가 내 옆구리에 파고들었고, 그것을 본 문둥이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미안, 어윈. 아마도 내가 최후의 일격을 내 파트너에게 날린 것 같다. 난 단지 애송이를 없앨 생각뿐이었는데…….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원정은 실패했고, 나 혼자 살아남아 죽을힘을 다해 이 동굴을 빠져나가고 있다. 내 평생 유일한 친구이자 과거 내 목숨을 살려준 파트너 어윈을 잃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이 어두운 동굴을 홀로 빠져나가고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애송이 도굴꾼이다. 그놈만 없었더라면, 우리 비정의 형제- 물론 자잘한 복수를 의뢰받는 일 뿐이었겠지만 - 계속 잘 나갔을 것이다. 의뢰를 해결하고 그 보수를 받으면 술집에서 어윈은 노란 색 맥주를 들이키고, 나는 그를 위해 신나는 곡을 연주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 애송이만 없었더라면.......

 내 뒤로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끓는 솥 안에서 허우적대던 역병의사의 목소리인지 그 애송이가 지르는 비명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내 뒤에 누가 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내 목숨이 중요하다. 어쨌든 난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

 붕대를 찾기 위해 배낭을 뒤지던 중, 금화 몇 개와 어윈의 필적이 담긴 편지 같은 두루마리를 찾았다. 문둥이가 언제? 왜 내게 이런 것을? 확인은 나중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걸아야 한다. 출구가 멀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더.

 그런데, 저 비명소리. 출구가 가까워지자 더 가까이 들리는 것 같다. 어찌 내가 다시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냥 기분 탓일까? 그럴 거야, 그런 거겠지?

반응형

 아무래도 오늘 밤은 어려울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그믐은 그 오두막 얼굴에 곰보가 덕지덕지 붙은 주름투성이의 마녀가 사는 곳에 가는 날이지만 오늘은 추적거리며 내리는 이슬비에다가 바람도 많이 분다.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서 저 어두운 산길을 오르기에는 무리다.

 맥주가 가득 든 술잔을 테이블로 나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엉덩이 쪽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새로 도착한 용병들이 짓궂은 표정으로 – 모두 셋인데 하나는 등에 커다란 활을 달고 있지만 머리카락이 위쪽으로 한 움큼 빠져있는 반 대머리고, 하나는 완전히 술에 쩔어 누런 이빨만 보이는 냄새나는 주정뱅이고, 나머지 한 명은 그나마 반들반들하게 젊고 잘생긴 사내인데 옷 위로 도드라진 근육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사는 아닌 것 같다 -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나마 잘생긴 쪽을 향해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여관 주인이 내 옆에 서서는 슬쩍 물어 본다.

 “어떻게 할 거야? 오늘은 재들이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주인이 초조해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좀 있으면 그걸 줘야할 지도 몰라.”

 나도 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불해야 할 것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하루를 버텨가고 있던, 도시에 사는 검은 쥐새끼와 같은 처지였다. 그런 나를 이 여관주인이 발견하고는 내게 잠잘 곳과 진짜 먹을 것을 주었다. 처음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지었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한데, 마치 귀한 보석을 방금 캐 낸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고 있었다.

 “이건 정말 행운이야. 신이 내게 주신 기회라고!”

 처음에는 그의 말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이내 영주의 집에 보내지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기운을 차리고 몸에 살이 붙기 시작한 지 두 달 후에, 주인은 나를 불러서는 내가 영주의 집에 가야하며 그곳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와야 한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집에 있는 책 한 권만 가져오면 된다고. 흔한 책 한 권이라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지. 집에서 나올 때 그것만 가져다주게.”

 그러면서 전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는 한 마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네게도 기회야. 영주는 쭈그렁 주름투성이의 영감이지만 지역의 제일가는 부자라고. 네게도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거야.”

 영주의 집에 도착하자 그가 여관 주인과 똑같은 환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를 반겼다 부활이라고, 신의 기적이 틀림없다고.......

 아, 내 평생 그곳에서의 생활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귀한 음식들, 밤이면 끝없는 육체의 향연이 펼쳐지고, 곱게 갈아 만든 암송아지의 뼈 조각이 들어간 붉은 음료는 그 즐거움을 배가 해 주었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공짜 점심은 그렇게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는다. 곧 내 결점을 보게 된 영주는 즉시 나를 집 밖으로 내쫓고야 말았다.

 여관에 돌아오자 주인은 즉시 그가 응당 받아야 할 것을 요구했으나 나는 그곳에서의 달콤한 생활에 빠져있어서, 그가 원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탄식과 비난에 젖은 그의 분노를 온전히 몇 시간 동안 감내한 후에야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손에서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오두막 마녀를 찾아가. 그리고 마녀가 시키는 대로 해.”

 이후, 매번 그믐이 찾아오면, 나는 마녀를 만나 작은 물병에 그녀가 주는 물을 받아 온다. 그리고 내가 뭔가 요구할 것이 있는 상대가 나타나면 나는 그 물을 마신다. - 그러면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 목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상대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주방 한 구석에서 손으로 턱을 괴고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고 있을 때, 오늘 아침에 새로 도착한 신입 용병이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아침에 오는 길목에서 도적과 한바탕 일이 있어서 동료가 죽었다고 했던가. 허름한 옷에 왼쪽 혁대에 작은 단검만 차고 걷는 모습을 보니 수중에 금화 따위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의자에 앉는 순간, 나는 봤다.

 뱀의 눈처럼 생긴 검고 붉은 루비 - 생명의 부름이라고 불리는 귀한 보석이다! 마녀가 찾고 있던, 그것만 준다면 자신이 가진 어떠한 능력이라도 주겠다고 했던 귀중품이다! 저것만 있으면.......

 침착하자. 가슴속에 숨겨둔 비약이 남아 있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 그래, 있다! 한 모금 정도 남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절대 약병을 완전히 비우지 말라는 마녀의 경고 따위는 무시하자. 저 보석만 있으면 이런 미약은 평생 쓸 만큼 많이 만들 수 있다.

 약병을 모두 비우고 그에게 다가가자 즉시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동공이 커지면서 놀라는 모습이다. 잠시 윗입술을 핥더니 일어서서 내게 다가온다. 여관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가 은화 한 닢을 들이민다. 뭘 원하는가 싶었는데, 가슴이 살짝 답답한 기분이 든다. 앞섶의 끈을 풀었더니 그가 내 가슴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인다. - , 그렇군. 은화 한 닢 따위에 이런 일은 하지 않지만 뭐 보석정도라면……. 이봐, 뜨내기 용병 양반, 너의 보석은 이미 내 주머니에 있다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두고 나는 조심스럽게 바로 여관을 빠져 나온다. 주인이 나의 부재를 조만간 눈치 채겠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다. 미혹의 술잔만 있으면 나는 다시 영주의 집으로 갈 수 있다. 거기서 평생 가짜가 아닌 진짜 안주인으로 살 수 있다. 미약을 사용하며 영주를 평생 내 남편이자 하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마녀를 만나야 한다. 비와 바람이 섞인 날씨 탓인지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왔던 길을 틀릴 리가 없다. , 저 멀리 오두막의 불빛이 보인다. 조금이다 조금만 더.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할 때 비에 젖은 돌계단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두막 안에서, 마치 보고 있다는 듯 마녀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관을 나설 때부터 왜 엉덩이 꼬리뼈 쪽이 가려운걸까 - 그곳에서 뭔가 꿈틀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불빛 탓인지 자꾸만 다리가 겹쳐 보인다. 마치 네 개의 다리가 달린 것처럼


반응형

 "세 번의 기회가 있는 거야. 두 번도 아니고 딱 세 번."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않아 검고 누런 냄새가 나는 딱지가 들러붙은 맥주잔을 흔들면서 그 사람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 번 이거든. 여기 이 땅을 - 저주 받을, 툇 – 물려받은 어린 도련님도, 남은 술을 몰래 섞어 파는 저 더러운 술집 주인도, 너 같은 창녀의 자식도 모두 똑 같은 기회가 있는 거야. “ 마지막 말을 하며 그가 히죽대며 웃었다.

 영주의 심부름을 위해 언덕 위의 오두막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들어 온 술집에서, 그 사내는 짐짓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인들을 매섭게 매질하고 높은 이자로 금화를 빌려주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남의 땅을 뺏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가 무슨 일인지 그에게 꽤나 좋은 보수를 내걸고 단순한, 정말 단순한 심부름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가 오면 알려 준다고, 저 높은 곳에서 기분 나쁘게 내려다보면서 그 염병할 신이라는 작자가 말이지.“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남자는 작은 술집에서 몇 명의 여자를 데리고 영업을 하던 포주였다.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질 좋은 럼주를 만들어 그 동네에서는 한동안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내가 태어났고, 이후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몸을 팔던 여자 한 명이 병에 걸렸는데, 그게 도시 내에 퍼져 살던 지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멀리 여기까지 도망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일 이후부터 나는 재수 없는 아이가 되었고 그에게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면 늘 매질을 당하곤 했다. 

 재수 없는 놈, 지어미를 잡아먹은 놈.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나를 집 밖으로 아주 쫓아버리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를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를 싫어했는데……. 


 어쨌든 그 사람이 말했던 세 번의 기회가 내게도 찾아 왔다 - 첫 번째 행운은 그것을 정말 운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알쏭달쏭하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 아마 이것이 하늘이 내게 준 또 하나의 기회일 것이다.

 용병에 참가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음을 밝힌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짝을 이루어 의뢰를 해결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것인가? 내가 자고 있을 때 슬금 다가와 철퇴로 내 두개골을 쪼개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혹은 전장에서 한창 단검을 날리고 있는 와중에 내 뒤통수에 화실을 쏘지 말란 법이라도 있던가? 더욱이 보수를 두둑이 받아 주머니에 금화가 가득 있는 상황이나 혹은 남은 머릿수 비율로 임금을 지불하는 용병 단에 속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내가 지켜온 철칙을 깨기로 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임무다 – 그리고 그만큼 보수도 크다. 


 영주가 용병 단을 모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금세 마을에 알려졌고, 여기저기 힘깨나 쓴다는 풋내기 기사부터 오랫동안 용병생활에 잔뼈가 굵은 나이든 용사들까지 모두 여기에 동참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돈 많은 영주가 쓸 만한 용병을 구하기 위해 깨작거리는 가짜 이야기야 흔하고, 나로서는 그것보다 새로 발굴된 거대무덤 쪽에 마음이 동했지만, 내게 동참을 제안한 그 기사는 이미 한 번 그곳을 가본 적이 있는 경험자였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그 보석들....... 한 번 보기만 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가치는 기껏 금화 몇 닢에 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덤의 부장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영주의 저택으로 가는 길에 마차가 전복되었고 – 아마 산적들이 함정을 설치했을 것이다. 영주로 가기 위해서는 외길밖에 없으니까 - 같이 온 용병은 전복 시 입은 부상과 도적들이 던진 독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내가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우리들 세계에선 누가 죽든 남은 사람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 단 하나, 편지만 빼고.


 술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같이 동참할 용병들을 살펴본다. 다들 긴장감을 애써 없애기 위해 술잔을 들고 크게 웃으며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있지만, 진정한 프로는 혼자 조용히 마시며 관찰한다. 믿을만한 실력 있는 동료를 찾는 것, 그것이 전장에서 살아남는데 가장 중요하므로.


 술집 여급이 나를 보고 웃는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아리다. 지금껏 용병생활에서 많은 여자를 만나보았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아버지의 일 이후로 가정이나 아이는 갖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스베틀리나, 예쁜 이름이다. 은화 한 닢을 주고 가슴을 만져 보았다. 나쁘지 않다. 아이를 여럿 키울 수도 있겠다. 같이 살 수 있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 여관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주인에게서 여관을 인수하여 안주인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곳을 운영하며 이 여자와 같이 살 수도 있다 – 여긴 늘 사람들이 죽고 그만큼 새로 오는 곳이니 장사는 잘 될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 어두운 던전을 몇 번이고 갔다 와야 한다. 누구도 가지 못했던, 그믐보다도 더 어둡고 어두운 곳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생물과 마주쳐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약간의 보석과 신비한 주문이 적혀 있는 책 한권만 훔쳐가려고 했었다 – 오래 있다가는 나도 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처럼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스베틀리나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저 여자와 같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몇 번이나 목숨을 담보로 괴물과 마주치더라도 그녀와 같이 살 수만 있다면 해 볼만하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래, 내일이라도 당장 용병을 고용하며 저 동굴에 들어갈 것이다. 진귀한 루비와 다이아몬드를 구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지도 모른다. - 세상에 공짜로 점심을 주는 곳은 없으니까


 그러나 스베틀리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겠다. 그것이 내가 오늘 이 여관에서 내린 결론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