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J, 프로토콜 여섯 번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죠? 누가 이야기 해 주었나요?”

 

마이크 앞에 있는 모니터에 얼굴이 가려져서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목소리로 보아 중년을 넘은 듯한 여자 목소리였다. 흰색 가운을 걸치고 있는 상의의 절반만 취조실 반대편의 유리창을 통해 보여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라이센스가 있는 의사이거나 그에 준하는 연구원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프로토콜의 여섯 번째 항목이라니? 지금까지는 인사 담당자 Z가 나를 놀리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들은 것 자체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조차 내게 물어볼 정도라면 정말 여섯 번째 항목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것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간다.

내가 뜻밖의 질문에 당황해 하는 상태가 모니터에 수치로 나오는지 검사관들의 입 꼬리가 올라가 있다. 이제야 분석할 만한 데이터가 나왔다는 듯 분주해진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목적이 질문에 대한 내 답보다는 내 정적인 상태를 흔들어 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 번 헛기침을 한 후에 나는 진실을 말했다. 프로토콜의 여섯 번째 항목이 무엇인지 나는 그 내용을 모른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오히려 되물었다.

 

“J. 검사관들에 대한 질문은 금지되어 있다. 방금 내용은 질문과 답을 기록에서 삭제하도록.” 처음 봤을 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콧수염이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그리고선 내 자세가 삐딱하다는 둥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하면서 회사 직원이면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답변을 하라고 내게 성을 내었다. 그리고는 재머에 쓰여 있는 ‘Be the Black’이 무슨 뜻인지 아냐면서, 우리는 암흑의 암살자가 되어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는데 너는 첫 임무부터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등의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가 침을 튀기며 던지는 공격적인 말을 편안한 자세로 왼쪽 귀로 들은 후, 모조리 오른 쪽 귀로 빼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설이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 그렇다. Be the Black! 무선재머!

, AI가 우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휴대용 무선재머! 그것을 켜는 순간, 그 주변 약 10미터 이내에 있는 무선기기는 모두 정지된다. 활성화된 무선네트를 표시한 지도를 모니터에 펼쳐놓고 보면 무선망이 끊겨진 부분은 까만 원으로 나타날 것이다. Be the Black, 깜장 옷을 입은 위대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재머를 사용하는 즉시 우리는 지도에 하나의 검은 점(black dot)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을 활용하면 닥터와 카탈리스트가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훤히 볼 수 있다 이 위치정보는 조직의 임원만이 아니라 네트에 접근이 가능한 인공지능 또한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적대적인 성격이라면 우리 멤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적이 된다.

조직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관리자들의 지적능력은 좀 의심스러운 수준이기는 하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분야의 전문가급 이상이었다.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나도 생각해 낼 수 있는 보안 구멍을 그들이 쉽게 놓쳤을 리는 없다.

, 이들은 그 중요한 정보를 우리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공유하면서 이번처럼 예상된 사고가 터지자 자신들은 모르는 척 얼굴에 철판을 깔고선, 이런 요식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우리 팀이 이런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을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왔다.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조직에 충성하도록 서약서를 썼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들이 우리의 목숨을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와 마이클은 조직이 지시하는 일을 하다가 진짜 죽을 뻔 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관리들이 고의를 갖고 혹은 그들의 무능함 때문에 우리 말단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내 분노에 따라 측정기의 바늘이 춤을 추고 있는 듯, 기계를 지켜보고 있던 콧수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다시 조사를 시작한다고 말하면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래, 도착해서 어떻게 했다고?”

마음을 다시 진정시켜야 했다. 앞으로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나뿐만 아니라 파트너의 목숨도 위험하게 할 수 있다. 지금은 나를 구해준 그를 위해서라도 내가 침착해야 한다, 차분해져야 한다.

 


 

몇 시간을 더 강도 높게 심문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이클이 우리가 검사했던 AI와의 대화(단말 접속 로그)를 삭제했다고 카탈리스트 ‘B’를 통해 내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심적 부담감 없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소리도 지르고, 협박도 해 보았지만(심지어 내가 테러리스트와 접촉한 증거가 있다고 어떤 검사관이 종이를 흔들면서 내게 겁을 줬지만 나중에 그것이 백지임이 들통 나자 콧수염이 경비를 불러 그 사람을 방에서 쫓아냈다) 내게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결국 그날의 심문을 마치겠다고 선언했다.

방을 나가면서 처음 나를 데리고 왔던 의사가 휠체어를 가지고 왔지만, 나는 거부했다. 이제는 조직이 주는 편의는 작은 의자 하나라도 받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지금은 좀, 나의 두 다리로 직접 걷고 싶었다.

절뚝거리며 병실로 걸어가는 중에 의사가 심문과정을 잘 견디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이제 의심이 풀렸으니 더 이상의 구속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좋은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병실에 도착해서 문을 닫기 전에 의사에게 식사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며칠 동안 수액만 맞았더니 너무 배가 고프다고.

의사는 약간의 식사는 나쁘지 않다고, 웃으면서 잘 쉬라고 문을 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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