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침대에 걸터앉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동료들이 두고 간 꽃과 쪽지들이 아직도 그 자리 그대로 나를 쳐다보면서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은 아무것도 못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생각해 보자고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서 말해보았다. 그러나 이 조용한 병실에서 혼자 앉아서 변명 같은 말을 해본들 우울한 기분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살아남기 위해 혼자서 판단하고 살아있기 위해 홀로 움직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와 팀을 이루어 같이 일을 해본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만일 마이클이 없었더라면, 이전처럼 나 혼자 일을 처리했었더라면, 나는 오늘 이렇게 살아서 숨 쉬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조직에서 동료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일들로 부딪기면서, 혼자서는 힘든 일들도 그들과 같이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그들에게 조금 더 의지할수록, 그리고 그런 나를 그들이 조금 더 믿고 따라줄수록, 과거 단독으로 활동하던 나로서는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과실들이 내 손 가까이 닫는 것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어쩌면 나는 마이클이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행동을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어떠한 이유가 있든, 과거 내가 속했던 세계의 방식으로 이해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생명을 빚졌다. 그리고 받은 것이 있다면 그 배로 주어야 하는 것이 과거 내 삶의 규칙이다.

조용한 병실에서 이런 생각들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었는데 빈 위장에서 뭔가를 먹여달라는 듯이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 일단 지금은 배부터 채우자.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식당의 미닫이문을 열었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동료들이 식당 한 곳에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가까이 있던 동료가 가벼운 포옹을 하고는 테이블 한 가운데로 나를 부축하고 의자에 앉혔다.

차가운 물과 스프 한 접시를 테이블에 두고 그들은 서로 말없이 내 얼굴과 다친 상처만 보고 있었다. 직접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그들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 살아 돌아와 줘서 정말 다행이다. 나도 비록 몸에 구멍이 몇 개 났지만, 그럭저럭 하나의 몸뚱이로 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뻤다. 다시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었다. 잠깐 숨을 고르고 난 후에, 나는 먼저 마이클의 상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자네를 수술실까지 업고 온 게 M이였어.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업고 뛰더라고.” ‘K’가 계속 이야기 했다.

네 상처도 심했지만 M의 오른 쪽 팔도 위험했대. 시간이 더 지체되었더라면 잘라야 했을 거라고.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았는지 그날 본 이후로는 아직까지 얼굴을 보지 못했어.”

그러면서,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의 사건과 오늘 있었던 취조의 내용들을 하나씩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오두막에 들어가서 잔뜩 긴장한 채로 처음 대면했던 인공지능과의 대화와 도발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삭제되기 전에 날아온 대못에 M이 다친 장면에서 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놀라워했으며, 가슴에 구멍이 난 상태로 재머를 던진 장면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해 주었다. 이후의 일들은 심문과정에서 답변했던 내용을 그대로 알려주었다아직 M과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남아 있어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재머의 검은 구멍, 우리 조직의 모토인 ‘Be the Black’이 바로 우리들의 위치추적과 연관되어 있다는 나의 추론은 알려야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명령을 받고 출동해야 할 팀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재머와 블랙이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카탈리스트 ‘B’가 내 맞은편에 앉은 ‘K’를 밀어내고, 의자를 거꾸로 돌려서 앉은 다음, 오른 손으로 턱을 괴고선 나를 쳐다봤다.

헤이, J”

안녕, B”

B가 내 가슴에 감긴 붕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건강해 보이네.”

덕분에.” 라고 내가 대답하자 맘에 안 드는 듯 그녀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나는 B와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다. 입사 후보자로서 같이 교육을 받을 때, 내가 식당에서 B에게 살짝 목례 인사를 했는데 그때 B가 콧방귀를 끼듯 하고 그냥 가버린 이후로, 나는 우리 사이에 친밀감이란 단어는 각자 따로 놀자는 의미로 여겼다. 그런 그녀가 마이클의 메시지를 쪽지로 내게 전달했을 때에는 좀 놀랬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둘이 모종의 팀으로 같이 움직인다니, 그것도 비밀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 조직에서.

내 쪽지는 받았지?” 그녀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 잘 받았어. 고마워.” 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녀가 다시 인상을 쓴다. 이번엔 이마에 주름도 잡혔다.

그럼 가자, 내 방에

 

B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식당에는 우워하는 놀라움의 감탄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있자, B가 식탁을 뛰어넘어 내 오른쪽 겨드랑이에 자신의 어께를 넣어 나를 부축하듯 일으켜 세우고는 문 쪽으로 같이 걸어갔다.

주변의 동료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휘파람을 불면서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쥔 손을 연신 돌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를 문 밖으로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한 B, 그날 기어코 자신의 숙소인 W012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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