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하는 나를 뒤에 두고 B, 자신의 방문을 여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내가 ‘B108xx’가 맞는지 슬쩍 물어보자 이 바보는 뭐지하는 표정으로 멍하게 나를 보다가 한 숨을 쉬면서 내가 모르는 번호로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방은 내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정에는 예의 그 화재경보기가 특유의 작고 파란 전구를 깜박거리며 지금 이 방은 화재로부터 안전하다고 알려주고 있었고, 출입문 방향으로 왼쪽 끝에 세워진 반사등과 천정의 백색 형광등도 우리가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방 중앙에서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신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을 구경하고 있는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B, 턱을 까딱이며 침대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저 처음으로 여자 방에 들어와서 좀 신기했을 따름이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더니 그녀가 자신의 오른 손 검지를 펴서 내 입에 댔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그 자세에서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재머를 꺼내어 스위치를 켰다. 전선이 일시적으로 합선되는 듯한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의 형광등이 잠시 깜박이다가 다시 밝아지자 그녀가 벽으로 다가가 천정에 달린 형광등과 구석에 세워져 있는 반사등, 두 개 모두와 연결된 스위치를 껐다.

파란색의 화재경보기 전구도 나간 듯, 코앞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방 안이 갑자기 암흑으로 바뀌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 어찌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카탈리스트 B그리고 보니 나는 아직 그녀의 진짜 이름도 모르고 있는데 - 동료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내게 하려고 자신의 방에 일부러 데려온 것 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왜 침대에 앉혀놓고 불까지 꺼야 하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초조해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둠속에서 깍지 낀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위아래로 열심히 교차시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앞에 서서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을 거야.”

상처 입은 사람을 이렇게 심하게 대하다니…….”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옷을 벗고 있는 듯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암흑으로 덮인 방으로 작고 약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다만 단둘이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내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 B는 계속 혼잣말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우리 카탈리스트 동료를 구해준 영웅이 깨어난 첫날은 좀 특별한 기억이 남도록 해야겠지?”

 

그 말을 듣고 나는 더욱 세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눈을 떠서는 안 된다, 오늘의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되뇌었다. 그런 상태로 몇 초의 시간이 지나자, 약하지만 노란색 빛이 질끈 감은 내 눈꺼풀을 살짝 통과하여 들어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며시 실눈을 뜨고 앞을 보았더니 그녀가 손가락 사이에 반지처럼 끼워둔 작은 플래시로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왼 손을 허리위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내 얼굴을 비추면서, 속옷만 입은 상태로, 무엇인가 재미난 장면을 보고 있다는 듯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내가 더듬거리면서 이런 상황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자 그녀가 정말 환하게, 소리 내지 않고, 웃으면서 왼손 검지를 이번엔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선 플래시를 반 쯤 열려있는 화장실 쪽을 비추었다.

 

반 쯤 열린 화장실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거기서 검은 실루엣의 키가 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B가 그 사람의 얼굴을 플래시로 비추자.......

M이었다! 내 파트너 마이클이 오른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으로 나를 보고선 빙긋 웃고 있었다.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그가 내 옆에 앉아서 왼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서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힘찬 악수를 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 M이 내 옆에, 온전한 하나의 몸으로, 머리에 전극이 꼽히지 않은 채로, 내 앞에 직접 와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을 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도 B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왼손 검지를 입에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 방은 도청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처음 도착해서 B가 재머의 스위치를 켠 것도, 내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몸짓을 보인 것도 모두 도청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자신의 왼 손을 펼쳐 거기에 쓰인 글자를 내게 보여주었다. 날짜와 만날 장소, 시간을 적은 글을 머릿속으로 외우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를 감은 오른쪽 손에는, 내가 괜찮은지,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이 써져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였다. 그가 내게 미안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신세를 진 쪽은 나였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마이클이다.

 

그렇게 나와 M이 말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듯, 출입문 쪽 구석에 서 있던 B가 다시 혼잣말을 했다.

“J. 상의 좀 빨리 벗을 수 없어? 시간만 끌고 있잖아.”

나와 마이클은 뜨거운 포옹을 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생사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어떻게든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면서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 느낌을 그도 받았는지 내 등에도 따뜻한 무언가가 떨어지며 젖어들고 있었다.


 


한참을 그런 모습으로 있었던 듯, 구석에 있던 B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손 너무 오래 한자리에만 있는 것 아니야? 거기가 아니라니까.”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붕대가 감긴 내 오른쪽 허벅지를 강하게 손으로 잡았다.

내가 비명을 내 장담하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때 불시에 그런 공격을 받으면 그 누구라도 입에서 아픈 소리가 자동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지르자 그녀가 능청스럽게, “어머 내가 너무 세게 쥐었나 봐. 상처에서 피가 나네. 오늘은 안 되겠는걸.” 하면서 마이클을 나와 따로 떼어놓았다. 마이클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다시 화장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 한 후에 나는 절뚝거리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방 안에서 밖을 살피던 B, 이번에는 좀 미안했던지, 피가 베인 내 오른쪽 다리의 붕대를 한번 쳐다본 다음, 나를 향해 한 번 혀를 내밀고 살짝 윙크를 하고서는 꽝소리와 함께 문을 세게 닫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이날 있었던 사고 - 내 오른쪽 다리의 상처가 벌어진 것 - 에 대해 B에게 따질 기회가 있었다. B가 말하길, 그날 자신은 속옷만 입고선 혼자 문에 기대어 있었는데, 웬걸. 자신은 거들떠도 안 보고 남정네 둘이서만 껴안고 있는 장면이 너무 괘씸했었다고 - 식당에서 윗옷 단추만 하나 풀어도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이 부분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다) 자신으로서는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면서, 그날은 정말 미안했다고,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끅끅 웃으면서 내게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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