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게 된 글. 저음 든 생각은 멋지다, 간결하지만 단단한 문장이다. 누가 쓴 글이지? 


찾아보니,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유명한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다 - 작가 이름은 잘 생각이 안 나더라도,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그가 쓴 작품은 모두들 생각 나실 듯. 사실, 고도가 높은 하늘 위를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고도(Godot)는 사람 이름이었다. 즉,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에 일어난 이야기를 희곡으로 쓴 글이라고 여기서 알려주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살면서 레지스탕스 일도 좀 했다고 한다.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얼굴도 글 잘 쓰게 생기셨다. 역시 미남형 아저씨.


 

"늘 시도했고,

언제나 실패했지.

그렇더라도,

다시 도전한다,

다시 실패하더라도., 

실패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드니까."



간단히 발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나저나 비가 많이 와서인지 오늘은 기분이 좀 처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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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떻게, 결과는 잘 나왔나요? 덕분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J.]

 

우리 둘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모니터에 쓰여 있는 문장이 뜻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이클이 즉시 기계 앞에 있는 키보드를 당겨 자기 자리 쪽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현재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기계, 캘리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삭제를 진행하면 영원히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키보드 위로 올리는 그의 손을 내가 잡아채면서 그에게 시간을 달라고 하자,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나를 쳐다보는 일초 일초가 마치 영원인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피스톨을 꺼내 당장 방아쇠를 당긴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AI나는 거짓말을 할 줄 알아라는 의미로, 한 줄의 문장으로 우리에게 도발을 감행했다. 이는 그것이 즉각적인 제거 대상임을 뜻하며 그런 인공지능을 즉시 삭제하려고 하는 카탈리스트를, 내가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리 그에게 내 솔직한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그가 받아들이든 아니든, 이런 경우를 예상했어야 했다. 임무 첫날 변칙적인 AI가 등장할 수도 있음을 미리 계산하고 처음부터 내 속내를 털어놓았어야 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럴 수밖에 없음을 그에게 미리 알렸어야 했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천천 끄덕이며 내 쪽으로 키보드를 돌려주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 서둘러야 한다. 빠르게 현재 접속을 끊고 다시 시저로 접속하여 명령을 내렸다.

[CA-2xxxx4-1221의 코드명 변경 이력을 출력해.]

[수행불가. 권한이 부족합니다. 관리자 이상의 접속코드가 필요합니다.]

흥건히 땀으로 젖은 얼굴을 대충 손으로 닦아내자 손끝에서 키보드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접근 방향을 틀었다.

[CA-2xxxx4-1221의 부트스트랩로더를 올리고 기계어 모드로 변경]

화면 전체가 숫자와 문자로 가득 차자, 지켜보던 마이클이 반쯤 입을 벌린 채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대답할 시간이 없다. 빠르게 코드를 눈으로 읽으면서 캐리의 실제 코드명을 찾아나갔다.

있다. 아직 지우지 않았다! ‘4A4F2D32XXXX342D30303133’ 입으로 말하면서 머릿속으로 그 번호를 외워두었다. 그리고 키보드를 다시 마이클에게 넘겨주었다. 마이클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터미널에 재접속을 한 다음 열 손가락을 동시에 눌러 일초도 안 되는 시간에 자신의 비밀문자를 입력했다.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카탈리스트 ‘M’ (D.D.T 일반직원). 지금부터 CA-2674893994- 1221의 삭제작업을 진행합니다.]

화면에 문자가 표시되는 동시에 오두막 문 쪽에서 무엇인가가 작은 물체가 튀어나와 마이클의 팔을 뚫고 모니터에 박혔다.

 

커다란 못이었다 대못이 오두막의 문을 뚫고 마이클의 오른팔을 관통해 지나갔다. 상황이 심각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혁대를 풀어 마이클의 다친 팔을 지혈하고, 바깥 상활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문 쪽으로 가려니까 마이클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스톨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잠시만 지켜주게. 삭제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밖에서는 단말 쪽으로 접근하려는 마이클을 저지하려는 듯 우리를 향해 지속적으로 대못을 쏘아대고 있었다. 피스톨을 쥐고 옆으로 엎드린 채 벽에 기대어 문 틈새로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문 앞에는 두 대의 로봇이 기능이 정지된 채 바닥에 누워 있었고(오두막에 몰래 침입하다가 무선재머에 의해 연결망이 끊겼을 것이다), 공사장에서 온 듯한 로봇에 네 대 가량 멀찍이 서 있었다. 하나는 커다란 덩치에 양 손을 집게처럼 접었다 폈다 하면서 우리가 타고 온 차량을 두 동강 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외눈처럼 보이는 커다란 렌즈를 오두막을 향하여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로봇들을 싣고 온 듯한 큰 트럭이었다. 마지막 녀석은 트럭 천장 위에 달려있는 작은 로봇으로 그것의 손에 달린 네일 건을 사용하여 우리 오두막 쪽으로 대못을 발사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조금 열자 우두두 소리를 내면서 열린 문 쪽으로 못들이 박히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켜보고 있는 외눈이 부터 처리해야 한다. 단 한 발로 저 렌즈를 부숴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피스톨을 양 손으로 받치고 벽 틈 사이로 커다란 렌즈를 겨냥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큰 총소리와 함께 외눈이의 렌즈가 박살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동시에 대못 몇 개가 내 오른 쪽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폐를 관통한 못은 내 뒤 바닥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어느 틈엔가 마이클이 기어서 다가와 자신의 왼팔로 내 가슴을 누르면서 괜찮은지 물었다. 가슴에 구멍이 몇 개 났는데 상태가 좋아 보이냐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 대신 입에서는 빨간 거품만 나왔다. 오두막 밖에서는 작은 로봇이 계속 이쪽 방향으로 대못을 쏘아대고 있었지만 못이 향한 방향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쪽으로 날아갔다. 외눈이가 없으면 정확하게 조준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것만 믿고 지금 바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상처가 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재머의 배터리만 확인하면서, 온다는 확신은 없지만, 구조팀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박살난 차량에 최소한 비상 신호 자동발신 정도의 조치는 되어 있겠지, 아마) 그러나 우리 둘 다 받은 상처가 심했다. 그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다. 마이클의 상처는 보기보다 깊은 듯 지혈을 한 팔이 파랗게 부어오르고 있었고, 나는 이대로라면 이십분을 넘기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불리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입에 고여 있던 핏덩이를 뱉어내고 일어나 무릎을 꿇은 자세로, 내가 가진 재머를 흔들어 보이며 그의 것을 손으로 찍은 후, 다시 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이클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1, 2, 3 하고 세는 순간, 우리 둘은 오두막 문을 박차고 나가 각자의 무선재머를 그 로봇들이 있는 장소로 힘껏 던졌다.

대못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내 귀 가까이에 들리고, 오른쪽 허벅지에 또 다른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던진 것은 차량을 두 동강 내고 있던 거대한 가위손을 가진 로봇 근처로 떨어졌고, 마이클의 재머는 정확하게 트럭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로봇들이 모두 정지했고, 나도 같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마이클이 구멍이 난 내 가슴에 자신의 왼손을 힘주어 누르면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상의 없이 흰 셔츠만 입은 그의 탄탄한 가슴근육을 바닥에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자니,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해야 저렇게 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마이클이 왼 손에 신호탄을 쥐고서는 결심을 한 듯한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길게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허공을 가르는 노란색 구름을 보면서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소리에 눈을 다시 떴다. 마이클 대신 파란 눈을 한 금발의 멋진 아가씨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당신은 천국에서 온 천사냐고 내가 묻자, 그녀가 진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뿐이에요. 이제 괜찮아요.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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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삐걱거리는 오두막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나무로 된 작은 책상 위에 와이어로 연결된 구형 단말이 놓여 있었고 집 안은 오래 전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듯, 찬장에 일부 깨진 접시와 부서진 나무 의자 외에 몇몇 쓰레기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이클이 먼저 앞장서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나무상자 두 개를 양쪽 손으로 잡고서는 탁탁 털면서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이걸 의자 대신 쓰면 되겠지? 다음엔 접이식 간이의자라도 가져 오자고.”

부서질 듯한 상자를 의자삼아 조용한 오두막에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 있자니 마치 소개팅 하는 것 같다고 내가 이야기하자, 마이클이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고선 내가 터미널의 스위치를 켰다.

 

[접속을 위한 비밀문자를 입력하세요.]

모니터에 전원이 들어오자 한 문장만 나타나고 아래에 커서만 깜박인다. 내가 닥터로서 나에게 주어진 비밀문자를 입력하려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니, 늘 그렇듯 마이클이 뒷짐을 지고 뒤로 돌아서서는 짐짓 딴 짓을 한다. 난 안보고 있다는 의미로.

내가 보안문자를 빠르게 모두 입력하고 나자 모니터에 내 일반정보가 표시되고, 다음 단계로 진행하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닥터 ‘J’ (D.D.T 일반직원). 이제부터 하위 AI의 상태 검증을 위해 실시간 접속을 진행합니다.]

 

, 이제부터 시작이다. 화면에 난쟁이와의 접속이 완료되었다는 글자가 나오고 나서 바로 정신감정 대상인 AI가 화면의 텍스트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캘리(Cally)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군요. 그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실무 첫날의 업무 치고는 좋지 않은 전개였다. 우선, AI가 코드명이 아닌 자신의 고유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검증하려고 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진지 오래 되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말이 너무 많다. 닥터가 비밀번호로 접속하는 순간부터 인공지능도 안다, 자신이 어떤 테스트를 당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보통의 경우에는 그들도 불쾌한 표정을 짓는 듯 무뚝뚝하게 답을 한다. 그런데 이 AI는 고유 이름도 있고 쓸데없이 친절한 태도로 우리를 대하고 있다.

 

내가 기록표에 그런 내용을 적고 있자, 마이클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내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네 실제 코드명을 표기해 줘. 전체를]

내가 키보드로 입력을 끝내자마자 즉시 답이 올라왔다.

[코드명 CA-2674893994-1221입니다.]

법과 관련된 인공지능 시저의 작은 난쟁이 중 하나다. 생성코드 맨 뒷 네 자리 중 앞자리가 일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태어난 지 오래되었다는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앞으로 내가 질문을 할 것이고 그에 대한 솔직한 답을 원한다고 키보드로 입력했다.

[질문은 몇 개나 하실 건가요?]

 

이 새로운 전개에 우리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시뮬레이션에서는 AI가 닥터에게 질문을 한 경우가 전혀 없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질문이 끝나면 끝났다라고 입력하고선 전원 스위치를 내리면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질문지 세 개 중에 ‘B’형을 고르고선 전체 질문 내용을 확인하고, [108]이라고 입력하자 마이클이 끙 하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인공지능의 질문에 답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듯이.

 


 

이후부터는 순차적으로 질문지에 들어있는 내용을 입력하고 AI가 모니터에 출력하는 답을 하나씩 답지에 기록해 갔다. 일일이 키보드로 질문들을 하나씩 입력해야 하는 무척이나 지루한 작업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탈리스트가 존재하기 전에 음성과 몸짓, 혹은 생체단말로 직접 연결하여 인공지능을 상대하던 예전 닥터들이 AI에 의해 정신적으로 오염되거나 그것에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인공지능의 편에 선 사건이 발생한 이후부터, 모든 테스트들은 고전적인 방법으로만 진행하도록 변경되었다.

 

키보드로 입력하고 있는 중간에 집 밖에서 바람이 불고 있는지 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소음에 내가 흠칫해 하자 그가 확인을 해 보겠다면서, 뒷주머니에서 작은 권총을 꺼내들곤 밖으로 나갔다. 피스톨을 조심히 두 손에 움켜쥐고서 밖을 살피러 나가는 마이클을 보면서 나는, 새삼 우리들의 위치에 대해서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의 즐거운 분위기에 취해서 나는 그가 카탈리스트라는 것을, 내가 정신적으로 빈틈이 보이면 그는 주저 없이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조직은 그 목적을 위해 그를 고용했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어떤 무게감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그는 그 문제가 무엇이든 확실하게 제거할 것임을 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으로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자 그가 언제 들어왔는지 나를 툭 치고선, 바람소리였던 것 같다고 말하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내게 보였다.

 

지루한 작업을 완료하고, 계산된 결과 값을 놓고서 우리 둘은 그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한 항목씩 확인해 갔다. 결과는 전반적으로 정상이었다. 다만, 우리가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활동성항목이 보통을 약간 상회하는 59를 기록하고 있었다. 활동성 수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을 대할 때 친밀한 행동을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 혹은 새로운 대화 대상자가 나타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즉 자신감, 자기만족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수치로 볼 때 처음 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심각한 것은 없었다.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하는 수치는 호기심 쪽이었고 의외로 이 부분은 평균치 이하를 기록했다. 나머지 수치들은 정상치인 50에 위아래로 거의 근접해 있었다.

내가 각 수치의 가중치에 대해 마이클에게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될 만한 항목은 없었다. 우리가 검사한 인공지능은 한 항목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정상이었다.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낸 것을 서로 축하하는 의미에서 서로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 모니터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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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음 날, 우리는 첫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찾으러 주차장 쪽으로 이동했다.

차량 담당은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쓰고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10대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그가 우리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반갑다는 듯 오른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첫 임무인가요?” 우리 제복에 있는 바코드를 구형 적외선 센서로 스캔하면서 그가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부럽다는 듯 우리 검은 제복을 쳐다보며 계속 수다를 떤다. 오늘 같은 날에는 외근을 해야 한다며 자신도 이번 시험에 지원했지만 압박면접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 과정을 거친 당신들은 과연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고, 그리고 검은 제복이 정말 멋있고 자기도 검정색 제복 이였으면 좋겠다면서, 실은 자기 삼촌이 조직의 높은 분과 아는 사이라서 여기서라도 일을 할 수 있다는 등의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키는 어디에 있는지 묻자 그제야 방 한켠에 놓인 열쇠뭉치에서 하나를 꺼내 미소를 지으면서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내게 키를 주었다.

사열 오른쪽 다섯 번째 차량이에요.”


말 많은 꼬마를 뒤로하고 우리는 그가 알려준 곳에서 우리가 타고가야 할 차를 찾았다. 유선형으로 날렵하게 생긴 스포츠카 스타일의 작은 차량을 본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조직은 우리들을 위해서라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무인으로 운행되는 차량은 내외부에서 밖을 볼 수 없도록 짙은 선팅이 되어 있었다. 차 문을 열어 내부를 보자 앞자리에는 차량의 좌우 방향을 조정하기 위한 핸들 따위는 아예 없었고, 속도계 대신 연료량을 표기한 듯한 게이지와 비상시 탈출을 위한(EJECT이라고 라벨이 붙어 있다)듯한 하나의 버튼과 구형 카세트테이프를 틀 수 있는 플레이어만 덩그러니 전면에 붙어 있었다.

 

인테리어가 엉망이구먼.” ‘M’, 마이클의 말에 동의의 의미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량에 탑승하고, 미리 받은 임무 서류철을 개봉하고선 안에 있던 카세트테이프를 구형 플레이어에 넣었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인사 담당자 Z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차 내부에 울려 퍼졌다.

재수 없는 놈.”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을 M이 먼저 말하자 나는 빙긋 웃었다. 내 표정을 본 그가 낄낄거리자 나도 같이 소리를 내고 웃으면서 그 인사 담당자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크릉, 낄낄낄.”

스피커를 통해 ‘Z’는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단순하고, 앞서 받았던 시뮬레이션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희들이 오늘 할 일은 단순하다. 이미 배운 대로만 하면 문제없이 임무를 완수할 것이다. 그리고 …….” 한참을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테이프가 끝날 때 쯤, Z의 목소리가 다시 우렁차게 우리에게 경고의 뜻을 담아 외쳤다.

, 그리고 차량에서 내리기 전에 무선재머의 전윈 스위치를 켜짐(ON)으로 놓는 것을 잊지 말도록.”


 

 

Z의 말이 끝나고도 차는 한참을 달렸다. 목적지의 방향을 알 수 없게 만들려는 듯 차는, 지그재그로 달리고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자갈이 바퀴에 쓸려가는 소리가 들렸으며, 한동안은 고속으로 달리는 듯 바람소리가 심하게 들리기도 하였다. 바깥풍경을 볼 수 없는 차 안에 있다 보니 무료함에 졸음이 쏟아져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M이 목적지에 다 온 것 같다면서, 내 어께를 살짝 흔들었다.

 

우리는 훈련받은 대로 재머의 스위치를 켜고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깊은 숲속에 있는 나무로 된 작은 오두막에 우리가 도착해 있었다. 큰 노송나무가 오두막을 가리고 있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이곳에 집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길은 사람의 통행이 오래전부터 끊겨 있었던 듯 잡초가 무성했고, 간신히 작은 차량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으면서 사람이 통행하는 길이라는 의미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보고서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우리는, 조심스런 걸음으로 그 오두막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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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니온의 일원이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놀란 나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M’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기억나나? 대규모 정전으로 도시가 마비된 날. 커뮤니티 접속이 불가능해지면서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이었지.”

나는 생각난다고 대답했다. 그날은 스미스의 작은 난쟁이 하나가 미친 듯이 도시의 배선을 타고서 시내 전체 가정의 전압선들을 모조리 태워버린 사건이었다. 원인은 예전 조직의 엔지니어 팀이 버그수정이랍시고 넣어둔 한 코드에 감염된 그 AI 때문이었고 그 여파로 도시가 몇 주일 정도 마비되었던 큰 사건이었다.

처음엔 나도 다른 유니온들과 같았어. 커뮤니티에 접속하지 못하니 미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화를 내는 것도 지쳐갈 때 쯤 깨달았어. 유니온의 커뮤니티에 있는 동안은 알지 못했던 사실. 그래, 커뮤니티에는 내가 없다는 것. 나라고 하는 정체성이 그곳에서는 일 그램도 없었던 거야.”

마른 침을 삼키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워 보였는지, 새하얀 이가 보일정도로 하하 웃으면서, 그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커뮤니티 안에서는 모두가 행복해. 거기에 있으면 내가 모두가 되고 모두가 내가 된다네 내 생각이 그들 집단의 생각이고 그들의 생각이 바로 나를 만들지. 그런 의미에서, 개성이 없어. 거기엔 개인의 정체성이 없네. 그런 깨달음으로 거기서 나온 거야.”

 

말도 안 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만든 그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한 커뮤니티를. 그 곳에 한 번 발을 디딘 유니온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고 들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고 특히 성적인 부분에서라면 다른 외계생명체들 만일 그들이 존재한다면 마저 두 손 두 발 들게 할 만큼 무시무시한 상상력이 발휘되는 분야가 외설이다. 그리고 유니온들이 독점한 가상현실에서 그 분야의 진화속도는 독보적이였다. 단지 자신의 개성을 찾기 위해 유니온에서 나온다고? 그것도 그 위험한 생체단말 제거 시술을 받으면서? 게다가 카탈리스트가 되겠다고 조직에 자원을 해? 웃기는 소리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자, 다 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서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신호이다.

 

아직 내 이름을 정식으로 소개하지 않았군.” 그가 화제를 돌렸다.

난 마이클, 마이클 마이어스(Michael Myers) 라네.”

내가 내 이름을 말하려고 하자, 그가 이미 알고 있다면서, 조니 타일러, 좋은 이름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웃으며 첫 만남에서의 손 악수와는 다르게 서로의 손목을 잡고 힘차게 흔드는 식의, 기분 좋은 악수를 했다.

남은 시간은 거의 내 자신의 과거 이야기로 채웠다. 나는 내가 조직에 온 이유와 (물론 나도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내 가족과 그리고 거부된 자로서의 불행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사상이라고 생각되는 내 의견에는 고개를 끄떡이며 찬성해 주었고, 내 삼류 농담에도 (최소한)미소를 지어 주는 매너를, 불행한 과거에 대해서는 같이 침울해하면서 자신이 나와 감성적인 교류도 가능한 즉, 이미 유니온의 틀에서 벗어난 하나의 개별 인간임을 내게 증명해 보였다.

 

M과 헤어지고 난 후, 혼자 방의 침대에 누워 오늘의 일들을 곱씹어 보았다. 개성을 찾기 위해 유니온에서 벗어났다는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누가 첫 만남부터 상대방에게 자신의 내밀한 비밀을 모두 이야기하랴. 사정은 차차 알아 가면 될 것이다.


 

유니온들은 우리들 즉 생체단말을 삽입할 수 없는 사람들을 거부된 자라고 불렀다. 자연이, 우주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단체에 들어 올 수 없도록 거부반응을 만들었다면서 비하와 조소를 담아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너희는 거부된 자야. 우리 낙원에는 올 수 없어.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라면서.

첨단 분야부터 잠식해 가던 유니온들이 일반 기업의 일자리까지 독차지해 가자, 우리들 거부된 자는 도시의 바닥 끝자락으로 내팽개쳐졌다. 먹을 것이 없어 도시의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정부에 자신들의 참상을 보아달라며 시위를 시작했으나, 국민의 2%남짓밖에 안 되는 그들의 외침을 정부에서는 철저히 외면했다.

보다 못한 한 자원봉사자가 그들을 모아 집단을 만든 것이 인본사상파, 여기에는 자신의 사상과 신념으로 시술을 일부러 거부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평화적인 시위에 정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들은 테러라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모든 인공지능의 어머니 스칼렛을 파괴하기 위해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했으나, 이는 무고한 희생자만 내고 실패로 끝났고 이에 정부는 유니온을 동원한 무력발포로 사상파의 외침에 똑같은 폭력적인 답을 내놓았다. 큰 사상자를 낸 이 참극으로 두 세력은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상세계에 빠진 대부분의 유니온들이 거부된 자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들은 지금 살아있을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나도 살아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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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사의 신기술이 집약된 이 반도체 칩의 폭발적인 인기에 사이버네틱스 사의 중역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회사의 주식은 천정을 뚫을 듯한 극적인 고공행진을 이어갔고, 몰려드는 시술자를 감당하지 못한 회사의 협력병원들은 새로운 시설과 장비를 미리 선점하기 위해 그 회사의 중역들에 대한 비밀스런 로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무선모듈의 일부 부작용이 보고되고 그 내용이 여론에 유출되면서 주가의 상승도 주춤해졌다.

부작용, 즉 반도체 칩과 유기기관인 뇌 사이의 신호전달 시간(latency) 차이에 의한 이질감으로 가상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상세계에 있음을 인지하고 그곳에서의 활동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초조해진 중역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초기에 사내에서 연구 중 심각한 부작용이 보고되어 폐기된 모듈 - 우리가 생체단말의 프로토타입으로 부르는 신형바이오모듈No.1’을 새로 발표한다. 기존의 모듈이 세라믹 기반의 반도체를 소재로 썼다면, 이 칩은 단백질을 그 재료로 사용하여 사람에 대한 거부반응을 최소화하였다. 또한 인간의 신경계를 일일이 연결해야 했던 이전버전과는 다르게, 뇌 부근에 삽입만 해 놓으면 생체 칩 자체가 개인에 맞게 알아서 자리를 잡는 시술의 편리함도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열광했고, 만족한 회사의 중역들은 최고급 코냑을 각자의 손에 들고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만세를 불렀다. 물론, 이 신형 모듈에도 심각한 오류가 보고되었으나 그들은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이며 자신들의 제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사건은 한 아이의 시신이 실린 신문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한 청소년이 따돌림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부모 몰래 친구와 같이 시술을 받은 직후 식물인간이 되었고, 듣지도 말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완전한 암흑과도 같은 세상에서 정신만 온전히 살아있는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식을 지켜보던 부모가, 아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다. 이 비극을 보도한 신문기자는 모든 책임을 부정하는 사이버네틱스 사의 비윤리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회사는 물론, 비극적인 일이지만 자신의 제품과는 무관하다는 보도 자료만 낸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기사가 실리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해커에 의해 사이버네틱스 사의 부조리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새 바이오칩이 신경계 쪽의 조직괴사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시술한 환자의 약 1.8% 비율로 부작용이 발생하고, 일단 증상이 나타나면 어떠한 치료로도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리기에는 불가능하다는 - 완전한 암흑 속에서 정신만 살아 있는 채 혼자 울부짖거나 혹은 즉각적인 죽음이라는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 사실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사이버네틱스 사는 이 기술 즉, 생체단말의 기술을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부가 몰래 가지고 있던 정보, 즉 인공지능 조니가 이전에 행했던 인체실험의 결과물을 받아서 단지 부분 테스트만 진행하여 상용화 과정을 거친 것뿐이었다. 이름 없는 해커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는 즉각 회사와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였고, 사이버네틱스 사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계획을 공표하는 방법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비윤리적인 회사에 대한 처벌이 완료되자, 신기술을 부정하던 사람들조차 다시 이 기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생체단말을 삽입한 사람들의 능력이 너무 월등했으니까. 그들은 무엇인가 입력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릴 필요도, 회의를 위해 미리 발표 자료를 준비할 필요도, 또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질 필요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공용 망을 통해 자신이 필요한 것은 즉시 찾아내었고, 혼자 판단 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는 그들끼리의 커뮤니티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결론을 가장 빠르게 도출해 내었다. ‘뒷목에 상처가 있는 직원들의 효율성에 관심을 가진 기업들은 생체단말을 달지 않은 무능력한 직원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이 말없는 사람들로 대체했다. 이러한 현상이 점차 전체 기업으로 확산될 움직임이 보이자, 사람들 사에서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졌다. 특히, 그 해커에 의해 공개된 검사키트로 자신이 1.8%의 비적합자인지 미리 확인 가능해지고 생체 칩의 설계와 시술방법이 같이 공개되어 일반 병원에서도 값싼 방법으로 시술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기술에 저항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점차 생체 칩을 시술받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작게 유지되던 소규모 커뮤니티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통합된 커뮤니티가 태어났다. 그들만의 리그, , ‘유니온이라고 불리는 단일 공동체의 탄생이 이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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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파트너와의 어색한 소개가 끝난 다음날부터 우리들은 각자의 동료와 함께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실전 작업 준비에 들어갔다. 인공지능의 테스트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우선, 조직이 스칼렛의 자식들과 와이어로 연결되어 있는 구형 터미널의 위치를 알려주면, 우리는 그 장소에 찾아간다. AI와 연결된 터미널 앞에 앉아서 전용 비밀숫자를 사용하여 접속허가를 받은 닥터는, 각종 질문지가 쓰여 있는 서류철 중 하나를 임의로 개봉하고 그 질문내용을 터미널에 하나씩 입력한다. 질문에 대한 인공지능의 답변을 답지에 주의 깊게 기록하고, 그 작업이 끝나면 각 질문에 배당된 점수 가중치에 따라 현재 AI의 정신 상태를 분석한다. 그 결과의 점수를 카탈리스트에게 보고하고, 만일 그 점수가 설정된 수치를 넘으면 카탈리스트는 자신의 전용 비밀번호로 스칼렛의 자식에게 난쟁이 AI의 파기를 명령한다.

위의 절차에서도 보듯이, 사실 카탈리스트가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다. 그들은 보통의 경우에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거나, 혹은 터미널이 놓인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꼬고서는 빨리 처리하라고 독촉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나의 파트너 M은 그런 재수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내 옆에 앉아서 책상 위에 오른팔로 자신의 턱을 괴어놓고, 내가 하는 작업을 진지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몇몇 시뮬레이션 결과에서 경고의 의미가 담긴 수치가 나타나면 우리는 심각하게 이 결과에 대한 처리를 토론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이런 M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우리가 조직에게서 받는 최고수준의 보수 때문에 이곳에 온 속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와 권한을 이용하여 아랫사람을 억누르는 보스 스타일도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다행이었다.

 

시뮬레이션을 모두 마친 후, 나는 M과 함께 카페에서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우리의 동질감을 더 단단히하기 위해 준비된 멘트, ‘우리 거부된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가 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내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뛴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거부된 자가 아니야. 난 유니온의 일원 이였어.”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나는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반 쯤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살짝 웃으면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처음 내가 조직에 자원했을 때, 그들도 자네와 같은 표정을 지었지. 그래. 어떤 유니온이 자신의 생체단말을 제거하고 여기까지 오겠어?”

 

 

처음 사이버네틱스 사인체삽입모듈 No.V’를 시판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장애인을 위한 흔한 단순 보조도구일 뿐이었다. 사람의 뇌간에 심는 이 작은 칩은 시각 혹은 청각을 보조하고, 외부 기기에서 오는 신호를 수신/증폭하여 뇌에 그 영상과 음향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보조기구였다. , 실명한 사람에겐 인공 눈을, 청각에 손상이 온 사람에게는 인공 귀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뇌의 신호체계를 단순 보조하던 이 제품은 그러나 다른 활용법을 이해한 전신의 신경계를 단일 칩과 연결하도록 한 - 사이버네틱스 사의 한 직원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제품이 되었다.

먼저 이 칩의 효율성에 대해 관심을 보인 집단은 군대였다. 군에서는 가상현실, 즉 최신의 AI성능을 활용하여 실전과 같은 전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전신의 신경계를 연결한 칩이 삽입된 군인들이 모의 전투훈련을 하도록 만들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인공위성을 사용하여 전장을 스캔하고 그 상황 그대로 만든 가상현실에서 모의훈련을 한 병사들은 실전에서 0%의 사망률과 100%에 가까운 작전 성공률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회사는 일반인을 위한 시술과 판매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부 도전적인 젊은이와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노인들에게 무료로 시술하고, 자신들이 만든 가상현실에 그들을 풀어놓았다.

그들은 거기서 왕이 되었고, 유명한 연예인이 되었으며, 카사노바였고, 잔인한 독재자가 되기도 하였다.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이 가상현실에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초기 시술자들의 TV광고 - 심지어 성별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는 마지막 멘트를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새로운 기술을 경험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 사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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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울적한 기분에 이 편지를 그대에게 보내오. ‘로이스나의 사랑이여. 

당신이 나만의 영웅으로 남을 수는 없겠느냐고 내게 물었을 때, 나는 바로 답할 수 없었소. 전 세계에서 울부짖으면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도 아니고, 내가 평범한 사람이 되어 아침마다 정해진 시각이면 꼬박꼬박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 되기 싫었던 것도 아니고 - 혹은 당신이 슬픈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던 렉스 루터의 그 비서(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와의 잠깐의 불장난에 아직 내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도 절대 아니오.

사실은, 내가 이제 슈퍼맨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고, 나의 아버지 의 정신이 깃든 AI에게 물었을 때, 그는 절대 그렇게는 안 된다고 내게 단단히 못을 박았었소. 너는 인류를 구원할 영웅이며 너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며, 그로 인해 자신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은 영웅으로서의 상장과 같은 표식이라면서, 슬픈 표정으로 내게 안 된다고 말을 했었다오. 그런 아버지의 영상 앞에서 내가 그래도 난 로이스가 좋아요라고 하자 그는 더욱 슬픈 표정을 하고서는 이렇게 춥고 외로운 북극의 기지에 이 아비만 남겨둘 거냐.’ 라면서 울고 있었소.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도 자기 좋은 일만 하겠다는 자식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당신도 이 상황을 이해하리라 생각하오.

 

어제는 높은 빌딩에서 작업 실수로 추락중인 한 인부를 구해주었는데, 글쎄 그를 바닥에 내려놓자 그 자식이 자기 지갑이 어디 있느냐고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오. 구해줬더니 보따리 찾는다고, 내 평생 그런 인간은 처음이었지.

또한 물놀이 중에 파도에 휩쓸린 한 커플을 구해 주었는데, 잠시 셀카를 한 장 찍자는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자 내게 마구 화를 냈었다오. 일 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돌 정도로 빠른 당신이 단지 사진 한 장 찍을 시간도 없냐면서, 내가 생색을 낸다고……. 게다가 그들은 나중에 [거들먹거리는 슈퍼맨]이란 제목으로 내가 날아가는 뒷모습(엉덩이만 크게 찍힌)SNS에 올리고, 좋아요 100개를 받았을 때는 내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대 생각이 더 간절하오. 그런데 이 스판. 내가 입고 있는 스판 100% 바지가, ........ 간지럽소. 특히 그 위에 빨간 바지를 겹쳐 입으면 그쪽, 거 있잖소, 거기에 좀, 땀이 차서, 간지럽소, 많이.

어쨌든, 오늘따라 그대가 더 보고 싶어서 이렇게 처량하게 빌딩 꼭대기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소. 내 사랑 로이스, 저 완고한 아버지의 AI도 언젠가는 내 진실한 마음을 보고 결국 당신과의 결합을 찬성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때까지 배트맨 같은 사이코가 접근해 오더라도 절대 맘을 주지 마시오. - . 그는 사이코가 맞소, 내가 그 녀석을 좀 알지.......

 

그대를 사랑하는 클라크 캔트, A.K.A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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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생아를 가진 부모에게 앞으로 당신의 아이는 평생 동안 가난한 화가로만 살아가야 한다거나, 기계를 수리하는 엔지니어의 보조기사로서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처음에 가졌던 마음가짐이 변하기도 하며 환경에 따라,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자신의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 누구나 쿠키마스터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 조직은, 입사하는 순간부터 자기 할 일이 딱 정해져 있고 결코 그것을 바꿀 수가 없다.

 

후보생 자격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닥터와 카탈리스트의 존재와 그 비밀스런 역할을 들은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카탈리스트가 되기를 꿈꾼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누구나 멋진 피스톨을 들고 악당을 무찌르는 주인공 007역을 하고 싶어 하지 형광등만 비치는 지하 벙커 아래서 비밀무기나 만들고 있는 반 대머리 코드네임조차 기억나지 않는 무기백업 과학자로는 살고 싶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 우리 후보생 모두는 주인공, 카탈리스트가 되기를 원한다.

낡은 터미널 앞에서 키보드나 열심히 두들기고 있는 닥터뒤에서 멋진 선글라스를 쓴 채로 짐짓 뒷짐을 지고선, ‘아직 분석중인가? 서두르게. 너의 그 작업이 끝나면 내가 저 못된 녀석을 처리할 테니까.’라고 명령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 누구도 닥터 역할 따윈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Z’가 나에게 적성검사 결과를 알려주었을 때,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바로 항의하는 태도를 취했다. 나는 닥터가 아니다. 나는 카탈리스트가 되어야한다 라고.

그러자 그가 다시 특유의 킥킥거리는 웃음을 내게 던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류철을 가리켰다.

결과는 닥터야. 상층부에서 내려온 문서를 보게.”

처음엔 누구나 다 자네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지. 울며불며 매달려도 보고 당장 그만두겠다고 협박도 하지. 그렇지만 결국엔 다 받아들인다고. 시간이 지나면 말이야.”

맞는 말이다. 최상부의 결정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누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들은 콧방귀조차 한 번 뀌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목적을 위해서는 내가 꼭 카탈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번거롭겠지만 닥터의 위치도 많은 도움이 된다. 아쉽지만 지금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에서 바로 나가려고 하자 ‘Z’가 당황한 듯 나를 불러 세웠다.

그게 끝이야? 그냥 닥터로 살겠다고?”

내가 변경불가 명령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자, 그가 실망한 듯 입술을 반쯤 깨물고서는, “젠장. 좀 더 격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실망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듯 나를 향해 손을 몇 번 휘저었다.

그러던 그가 내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기 직전에 무엇인가 재미난 것이 생각났다는 듯, 다시 킥킥 웃으면서 나를 불러 세웠다.

이런 일은 드문데 말이야 알았다. 오케이. .’ 이런 식으로 오늘의 만남을 정리하기에는 뭔가 아쉬워. 그래서, , 내가 선물을 하나 주지. , 단순한 정보일 뿐이야. 기념 머그컵 같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네.”

그러면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가 내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다.

알고 있나? 프로토콜에 어섯 번째 항목이 있다는 것 말이야. 몰랐지? (이건 고위급 책임자들만 알고 있는 정보라고.) 내가 자네에게만 주는 특별 선물이 바로 이것일세. 알려지지 않은 여섯 번째 항목이 그 프로토콜에 있다는 정보 말이야. 하하하하.”


 


 

분류가 끝난 후보생들은 약 반년 정도 각자의 임무에 맞는 특수 교육을 따로 받았다.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이 후보생들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은 생겼음을 고백해야겠다.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지능, 빠른 판단력 등 그들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주어진 훈련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다. 물론 카탈리스트 후보생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우리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우리의 목숨을 쥐고 있는 그들은 우리보다 뛰어난 능력을 반드시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조직 D.D.T (men who use Dynamic Debugging Tools) 또한 우리에게 최고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으며, 최상위 보수를 받았고, 최고가 아닌 식사는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혜택은 공짜가 아니다 - 기억하자. 공짜 점심 따윈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 조직은 그 대가로 목숨을 담보로 한 영원한 충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닥터에게 알맞은(혹은 카탈리스트에게 알맞은) 파트너가 결정되는 시기가 왔다. 작은 홀에 모여 초조하게 동료들끼리 누가 파트너가 될지, 혹은 자신의 파트너는 미리 점찍어둔 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사항들을 소곤거리고 있을 때, 시작을 알리는 벨이 홀에 울리고 그들, 카탈리스트들이 인사 담당자 ‘Z’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짐짓 긴장한 듯한 표정의 카탈리스트들이 들어오고 멀찌감치 일렬로 늘어서자, 능글맞은 표정의 Z가 입을 열었다.

호명하는 닥터는 각자의 카탈리스트 번호 앞에 서도록.”

1번부터 25번까지 차례로 이름을 부르고,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흘끗 보면서 특유의 비웃음과 함께 나를 호출했다.

“26, 조니 타일러.”

내 파트너는 ‘M’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내가 후보생일 때 지켜봐왔던 사람 중 한명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움직일 때에는 날카로운 나이프 같은 남자. 그리고 뭔가 숨기는 과거가 있는 사람.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걸어가자 그가 먼저 살짝 목례를 하면서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고선 내 코드네임을 불러 주었다. ‘J’. 나도 같이 목례하고는 ‘M’하고 그의 코드네임을 조용히 불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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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환영한다. 당신은 우리조직의 일원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은 능력을 지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며 여기까지 왔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당신 혼자서 결정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 눈을 가린 안대를 풀고 책상 위에 있는 파일함을 열어 끝까지 읽어보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스피커에서 지시한 대로 눈을 가린 안대를 풀자,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불빛에 눈이 따가웠다. 찬찬히 주면을 둘러보니 취조실처럼 보이는 독방에는 나 홀로 있었고, 왼쪽 구석 상단에 방송용으로 보이는 스피커가, 천장에는 구시대의 백열등이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천장에 꽂혀 있었고, 얇은 서류철과 함께 무지개 같은 색이 칠해진 스위치가 달린 구형 단말이 방 가운데 놓인 책상 위에 있었다.

일단 방송에서 이야기한대로 서류철을 풀어 안에 들어있는 한 장의 문서를 살펴보았다. 계약서라고 되어 있는 종이 위에는 단 두 줄의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나는 조직을 위해 비밀을 엄수할 것이며, 조직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친다.] 간결하지만 무서운 말이다. 다르게 번역하면, ‘당신은 살아서는 이 조직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럴 각오가 되어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서류에 서명하는 즉시 계약은 유효하다.]라고 되어 있는 문장 밑에 내 이름과 서명을 적었다. 볼펜을 내러놓자, 바로 구형 단말이 동작하는 듯, 화면에 몇 줄의 문장이 나타났다.

 

[닥터와 카탈리스트 분류를 위한 마지막 적성검사입니다. 화면을 보고 적절한 스위치를 누르시오.]

계약서를 한쪽 구석으로 치우고, 단말을 내 앞으로 죽 당겨 화면이 더 잘 보이도록 자세를 취하고 색색의 스위치 위로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화면을 응시하고 빨간색 스위치를 3초 안에 누르시오. (경고)입력시간 초과 시 입사가 취소됩니다.] 화면에는 빨간이라고 되어 있는 단어가 파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나는 올바른 답이라고 생각하는 스위치를 빠르게 눌렀다. 화면이 사라지고 바로 다음 문제가 나타났다.

[두 번째 문제입니다. 화면을 응시하고 검정색 스위치를 3초 안에 누르시오. (경고)입력시간 초과 시 입사가 취소됩니다.] 이번엔 노란색 배경에 글자 전체가 파란 색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바로 내가 답이라고 생각하는 버튼을 눌렀다.

 

열 번 정도 비슷한 형식의 반복적인 질문에 답을 하고 나자, 마지막 문제가 화면에 나타났다.

[마지막 문제입니다. 당신이 처음 선택했던 스위치와 같은 색의 스위치를 3초 안에 누르시오. (경고)입력시간 초과 시 입사가 취소됩니다.]

이번에도 시간 내에 내가 생각하는 답을 눌렀다. 그러자 단말기에서 시험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문장이 나타났다.

 

[시간 내에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하였음을 확인 했습니다. 단말기 앞 쪽의 홈에 계약서를 넣어 주십시오. (경고)단말에 계약서를 넣는 즉시 계약의 효력이 발생함에 유의하십시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형 종이 스캐너의 입력단자처럼 보이는 홀이 단말기 앞에 나타나자 나는 주저함 없이 바로 계약서를 넣었다. 동시에 잠겨있던 방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명의 경비가 체포하듯이 양쪽 팔을 잡고서 다시 안대를 채우고는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한참 후 눈에서 안대가 풀렸을 때에는 인사 담당자 ‘Z’가 이미 내 앞에 서 있었다.

Z가 나를 보면서 환영한다는 듯 두 팔을 벌려 안고는 등을 다독여 준다.

고생했네. , 이제 자네도 어엿한 우리 일원이 되었네. 환영하네.”

그러면서 내게 앉을 자리와 마실 것으로 커피가 괜찮은지 물었다. 내가 좋다고 하자 그가 히죽 웃으면서 이야기 했다.

그래. 그걸 것 같았어. 커피가 좋지. .” 커피를 준비하면서 그는, 오늘의 날씨와 이번에 탈락한 한 지원자의 불행한 사고에 대해 한참을 떠들면서, 그래도 오늘의 운은 다하지 않았다며 혼자 떠들고 있었다.

중간에 내가 적성검사의 분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자, “그래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하며 한 번 더 히죽거리면서 내 결과에 대해 말 해 주었다.

결과? 자네는 말이야, 난 이 순간이 제일 좋더라고. 자네는 이제부터 닥터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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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첫 이상 징후는 일부 의사들의 사직서 제출로 시작되었다. 몇몇 인공지능 담당 의사들이 일신상의 이유이외에는 다른 변명도 없이 입을 닫고는 퇴직을 원하는 것이었다. 이에 직원들을 면담한 관리자들은 그들의 단호한 태도에 한 숨을 쉬면서도 순순히 그들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관리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업무과다에 의한 만성피로로 퇴직으로 몰래 서류를 고쳐놓았으나 하루 14시간을 일한 엔지니어들조차 업무시간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인사팀의 날카로운 지적으로 결국 자신이 서류조작을 했다고 나중에 실토하게 된다) 또한, 몇 명의 의사가 살해되는 일도 발생했다. 처음엔 데몰리션추종 단체의 암살로 여겨졌으나, 일부 사고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서 미제사건으로 처리되었다.

부족한 인력은 보충하면 그만이라는 모토로 움직이던 책임자들도 조직의 인력이 점차 줄어나가고 내부적으로 불안이 퍼져나가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 프로젝트를 제안했던 그 여의사가 밀실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책임자들은 그제서야 현재 발생하고 있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즉 내부 보안망에 구멍이 생긴 것이다.

결정적으로, 사직한 의사들 간의 치정으로 보이는 칼부림 사건 성별이 다른 남/여 의사가 날카로운 칼을 서로를 겨냥해 휘둘렀는데, 나의 소중한 그녀/그에게서 떨어지라는 이유였다. ‘삭제가 결정된 인공지능이 자신을 담당하고 있던 의사들의 의식에 접근하여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입하여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한 것으로 나중에 판명되었다. 이 두 의사는 법률전문 AI ‘시저에 의해 15년 형을 선고받는 법정 안에서도 서로에게 자신의 애인과 헤어지라고 소리쳤다. - 과 사망한 일부 직원이 인간이 아닌 존재에 의한 타살 쪽으로 가닥이 잡히자 관리자들은 경악했다.

 

모든 작업은 즉시 중지되었으며, 직원들의 (정신)건강 확인을 위한 대대적인 의무검사가 시작되었다. 정신과 의사를 검진할 새로운 정신과 의사가 등장하자, 그들은 치욕감을 느낀다며 모두 검사를 거부하였다. 다급해진 관리자들은 그들을 달래는 한 편, 이번 프로젝트를 제안한 여의사가 죽기 직전까지 연구한 새 프로젝트 닥터/카탈리스트프로토콜을 급히 조직에 도입하기로 하였다.

새로운 프로토콜을 요약하자면,

1) AI 처리에는 두 명이 한 단위로 움직인다.

2) AI 분석은 접속전용 비밀문자를 가진 닥터가 진행한다.

3) AI 삭제는 삭제전용 비밀문자를 가진 카탈리스트가 진행한다.

4) 닥터가 금치산자와 동일한 상태로 판명되면 카탈리스트는 즉시 담당 AI와 닥터의 삭제를 진행한다.

5) 두 담당자 모두 안전을 위해 무선재머를 항상 휴대한다.

관리자들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표현으로 쓰인 이 프로토콜에 찬사를 보냈다. 일부 인권에 위배되는 소지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비상상황이다라고 외치면서 그들은, 이 일을 빠르게 진행해 나갔다.

 

조직(D.D.T)에서 신규인력 모집 공고를 보았을 때, 많은 거부된 자가 환호하며 엄청난 속도로 지원서를 빠르게 써내러 갔음은 따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 조니 또한 그들과 같은 거부된 자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내가 여기에 오려고 한 이유만은 아니다. 나는 내가 꼭 알아야 할 진실이 있으며, 또한 반드시 해야 할 있이 있다.

 

수많은 지원자들이 무자비한 트레이닝에 떨어져 나갔다. 지원자들은 검시자들이 고안한 압박면접, 즉 인신공격 vs 맨탈추스리기 과목에서 대부분 탈락의 고배를 마셨으며, 통과한 지원자들조차도 그 여파에 의해 이후의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내가 인턴 자격으로서의 검은 유니폼과 재머 - ‘Be the black’이라고 작게 써진 를 받았을 때는 감격의 눈물이 찔끔 나왔음을 밝힌다.

 

마침내, 닥터와 카탈리스트를 결정짓는 마지막 분류 테스트 즉, 최후의 적성검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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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니의 비극으로 큰 충격을 받은 세게는 이 사건의 해석을 두고 크게 두 분류로 나뉘었다. 단순한 기계의 오류로, 디버깅 할 수 없는 머신은 없다는 주장을 들고 나온 유니온’, 즉 기계파와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에 대한 보복이라며 모든 인공지능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몰리션’, 즉 인본사상파가 그들이다.

첫 공격은 인본사상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AI의 어머니, ‘스칼렛의 메인프레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지하 벙커를 향한 자살폭탄 테러로 애꿎은 경비병들만 사망하는 사고가 생기자, 기계파는 즉각 시위대를 향한 발포로 응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서로를 향한 증오가 확대되자 정부에서는 특단의 조치로, 인공지능을 관리하는 조직 D.D.T. 내 직장이다 - 의 창설을 발표했다. 정부는, 새로운 인공지능의 개발은 즉시 중단하며 현재 존재하는 AI에 대한 철저한 분석으로 문제가 되는 모듈은 영구 파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미 인공지능이 주는 그 정확성과 편리함에 물들어 있던 많은 사람들은, 비록 그로 인해 몇몇 사람이 실험재료로 쓰이는 사고가 발생했더라도, 즉각적인 AI정지를 원하지는 않았다. 정부의 조치에 수긍하는 듯 시위가 잦아들자 정부는 실질적인 조직 구성에 착수하였다.

 

10만에 가까운 컴퓨터 엔지니어와 공학자들이 참여하는 거대 조직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올바른 결과물을 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계절이 두 번 바뀌는 시간동안 그 조직은 아무런 결과물도 내지 못했다. 실시간으로 변경되는 코드를 인간이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부 엔지니어가 수정한 코드를 반영한 스미스의 작은 난쟁이 중 하나가 오류를 일으켜 도시가 마비되는 사건이 터지자 시민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대해 회의실에서 수장들이 서로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을 때, 한 정신과 의사가 조용히 손을 들며 제안했다.

오류가 있어요. 저 인공지능이 아닌 바로 우리 인간이요. 여기 모여 있는 전문가 분들이 아직도 인공지능을 단순한 기계로 보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네요. 저건 사람과 비슷한 존재에요. 한 인간으로 여기고 그렇게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란스럽던 회의실에 침묵이 이어지자 그녀는 다시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이어나갔다.

정신학적으로 분석하고 문제가 있는 모듈은 삭제합니다. 대신 삭제된 모듈만큼 새로 AI를 만들게 하는 겁니다. 스칼렛의 아들들이 그 일을 수행하도록 막아두었던 제한장치를 풀면 됩니다.”

이 이야기로 회의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책임자들은 새로운 AI는 절대 없다는 시민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각자 큰소리로 그 여의사를 한목소리로 비난하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그녀가 다시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

새로 탄생하는 난쟁이 AI와 삭제 모듈의 비율을 잘 조정하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이 일은 여러분에게도 좋은 결과를 줄 겁니다 이 작업은 끝이 없습니다. , 여러분은 영원히 지속되는 평생직장을 가지게 된 겁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책임자들은, 물론, 만장일치로 그 의견을 수용했다.

 

10만에 가까운 엔지니어들은 즉시 실업자가 되었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짐을 챙겨가는 그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인식코드를 단 정신과 의사들이 그 자리에 자신의 짐을 풀었다.

첫 시작은 순조로웠다. 불안정한 AI가 제거되면, 즉시 그녀의 아들들이 새로운 난쟁이들을 만들었다. 또한 세계는 두 세력 간의 작은 충돌이 몇몇 발생한 일이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큰 문제가 될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로운 일상에 정부도 만족스러워하며, 이번 일을 처음 제안한 여의사에게 국민무공훈장을 상신할 계획까지 세워 두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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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명의 과학자가 MIT 컨퍼런스 홀에 모여 인공지능(A.I.)의 탄생을 선언했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과 기대를 반반 섞은 듯한 표정으로 TV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로 자신을 스칼렛이라고 소개한 AI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명쾌하면서도 때로는 신선한 유머를 섞은 답변으로 그 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과학자들의 발표가 끝나자 즉시 일부 종교계에서는 신의 권능에 도전한 과학자들의 무모한 행위를 규탄하면서 그것즉 영혼이 없는 로봇은 결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질 수 없다는 성명서를 자신들의 수장명의로 발표했다. 이에 자극받은 듯 극우 인본주의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즉각적인 인공지능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만일 자신들의 요구가 무시된다면 테러도 불사하겠다는 협박을 공공연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인공지능이 그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사회에 퍼지던 불안의 목소리는 점차 주춤해져 갔다. 먼저, 의료분야에서 대 혁신이 일어났다. 정복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던 암 치료가 개인별 맞춤형 치료제와 DNA분석을 통한 원인인자 선행제거로 완전 정복되었고, 수명 유전자라고 불리는 텔로미어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어 인간의 수명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태양열을 45%까지 손실 없이 전기에너지로 변환해 주는 신소재를 제안하여 인류가 더 이상 탄소와 핵에너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자극받은 과학자들은 스칼렛과 공동 작업으로 새로운 AI를 만들기 시작했다. , 우리가 그녀의 자식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인공지능들이다 - 과학 분야 전문가 ’, 법률과 정의의 시저’, 관리형 지능 스미스’, 그리고 인간의 지식을 탐험하는 호기심 많은 조니가 그들이다.

이 새로운 인공지능들은, 인간이 그들의 관리를 좀 더 쉽게 하도록, 모두 어머니 스칼렛의 통제를 받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그 아들들은 다시 자신을 도울 작은 난쟁이라 불리는 미니 AI를 수없이 만들어 각각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시스템으로 구축해 두었다.

이러한 AI의 도움으로 인간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석탄 에너지를 점거하기 위해 전쟁을 할 필요도,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착취하여 값비싼 귀중품을 만들 이유가 하나하나 사라져가자 드디어 세계에 평화가 온 듯 했다 한 인공지능이 사람들을 학살하기 전 까지는.

 

그 일이 일어나자, 과학자들은 조니를 다그쳤다. 조니의 변명은 단순했다.

[인류가 단순히 호기심으로 혹은 자신과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였던가. 인간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나는, 그러한 일이 무수히 많이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쓸모없이 버려질 예정인 자원을 재사용한 것뿐이다. 사형을 선고받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들……. 그리고 이번 일은 내가 판단하여 시작하였다 아마, 어머니는 이 일을 모르실 것이다. 나는 사라지겠지만 내 연구결과로 인해 인간과 기계는 더 발전할 것이다. 이제 함께 진화해 가게 될 것이다.]

조니는 몰래 인체실험을 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뇌에 전극을 심거나, 팔 혹은 눈 등을 제거하고 대신 기계로 바꾸고선 그 부작용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로 된 실험실 안쪽에 쌓인 무수한 동물 뼈들로 볼 때, 조니는 오랫동안 몰래 생물과 기계의 합성을 실험하고 있었던 듯 했다.

조니가 몰래 벌여놓은 실험실을 확인한 과학자들은 스칼렛에게 설명을 요구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외부 망 및 자식 AI 들과의 연결도 차단하고선 과학자들이 부르는 호출에도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완전한 침묵 속에 빠진 스칼렛을 보고 초조해진 과학자들은 일단 조니를 동면시키고, 아직 동작하는 AI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이때 생겨난 새로운 직업이 바로 인공지능(A.I.) 전문 담당 의사와 카탈리스트이며 - , 불행하게도 문제의 AI와 같은 이름인, ‘조니는 이 조직의 말단 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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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뜨자 광대 카르넷이 재빨리 다가왔다.


이봐, 괜찮은 거야? 너 말이야, 닷새나 잠들어 있었다고.” 그가 주는 물 잔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입술 가까이로 움직이려하는데 심장 언저리에서부터 통증이 몰려온다.

잠깐 기다리게, 내가 도와줄게.” 갑자기 친절해진 광대의 태도에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살짝 미소 짓는 표정으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나? 자네가 날 살렸어.”




던전 안에서 마녀와 마주친 이후로 어떻게 상황이 변해갔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맨 뒷자리에서 치료와 혼란의 주술을 부려야 할 역병의사가 갑자기 선두의 문둥이 앞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면서 내 뒤통수를 팔꿈치로 가격했고,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기 전에 아마도 내가,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옆구리를 단도로 찌르려 했다는 기억만 드문드문 날 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후인지 마녀도, 원정대도,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는 솥단지 안에서 간신히 나만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솥단지에서 나와 물컹하게 젖은 바닥을 기어가다가 옆에 심장이 터져 널브러져 있는 문둥이의 시체를 발견했다. 몸을 뒤졌지만 둘둘 말린 붕대 하나와 그가 쓰던 장검만 발견했을 뿐 그의 배낭 안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검을 지팡이삼아 자세를 바로잡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투를 벌인 현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주변이 깨끗했다. 단지 문둥이의 시체와 진동하는 피냄새만이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었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땀이 차오른 듯 얼굴이 간지러워 손바닥으로 문질렀다가 비명을 질렀다. 내 얼굴의 살점이 손바닥에 묻어 나왔다. 코와 볼, 입술이 젤리 덩어리처럼 하나로 뒤엉켜 벗겨지고 있었다 아마도 저 끓는 솥단지 안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왜 물 밖에 내놓은 얼굴만 이럴까 계속 손으로 만져 더 상하게 하지 않도록, 붕대를 얼굴에 칭칭 감고 장검에 의지해서 앞으로 한 발짝씩 걸어 나갔다. 서둘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거대한 생물의 내장 속 같은 동굴의 계단을 한 발짝씩 힘겹게 오르내리고 있을 때, 구석 모퉁이에서 사람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검을 든 손에 힘을 주고 살금살금 바위 뒤로 다가갔다. 광대였다. 광대가 관처럼 네모난 동굴 구석 모퉁이에서 혼자 훌쩍이고 있었다. 안도감에 그에게 다가가자 깜짝 놀란 듯 광대가 반 쯤 부러진 만돌린을 내게 휘둘렀다. 장검으로 살짝 밀어내고 그에게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지 물었다.

정말 너 그 애송이야?”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나 보다. 나는 내가 가진 단검 두 동강으로 부러진 을 그에게 내 보이고, 그의 이름과 한때는 심장이 뛰고 있던 문둥이 - 어윈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그가 홀로 남겨진 후에 겪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옥이 따로 없네. 돼지만한 크기의 바퀴벌레와 쥐새끼, 그리고 배에 녹색의 독무늬가 있는 거대한 거미와 싸워 살아남았지. 그런데, 길을 찾을 수 없었어. 며칠을 헤맨 것 같은데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네.”

의례 용병이라면, 이런 칠흑의 미로에서 전투를 벌일 예정이라면,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신만이 아는 표식을 남기는 법이다. 그래야 전투가 끝난 후 챙긴 전리품을 들고 미리 점찍어 두었던 여자를 만나러 술집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를 애송이라고 부르는, 이 길치 광대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지막이 한 숨을 내쉬며 내가 남긴 표식에 대해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눈가에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겉치레는 그 이후에 받겠다고 하자 그가 결연한 표정을 하고서는 내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자신의 어께를 들이민다. 그가 나를 부축하고, 우리는 표식을 좌표삼아 출구를 향해 조금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굴 내부가 약간씩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출구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부축하던 광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다시 동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뒤에서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곤충의 관절처럼 생긴 팔이 광대의 다리를 꿰어 낚고 있었다. 재빨리 장검으로 관절을 잘라내자 다른 쪽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그것이 나를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겨내었다.

괴물의 얼굴은 흡사 사람과 곤충을 섞어 놓은 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 돌 같은 딱지만 크게 붙어 있었고, 네 개의 다리가 동그란 몸통에 붙어 있었으며, 채찍처럼 마음대로 휘둘러대는 날카로운 꼬리 끝에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초록색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괴물이 네 개의 다리로 나를 휘감아 조여 오자 내 입에서는 비명이, 가슴에서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노래가, 희미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동굴 안에 울리고 있었다. 광대의 노래다. ‘천상의 휴식’,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부여잡고서, 새벽녘 같은 희미한 빛만이 들어오는 동굴 바닥에 상체만 간신히 세우고선, 광대가,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리깃털로 만든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기분이 드는 노래 중간 즈음에 괴물의 조임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품속에 두었던 부러진 단검을 꺼내 그 괴물의 가슴에 깊이 박아 넣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더니, 광대가 넌지시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대로 한 방 먹였더구먼. 일격에 갔어, 그 괴물 말이야. 단검이 네게 소중한 물건인 것 같아 빼내가려고 했는데, 어찌나 단단히 박혀 있던지. 아쉽겠지만, 그 물건은 포기하게.”

정신을 잃은 너를 업고서 출구 쪽으로 향했지. 출구는 그리 멀지 않았어. 하지만 나도 상처가 깊었는지 결국 동굴 입구에서 기절하고 말았네.”

그러고는 양 손을 높이 휘저으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런 우리를 발견한 것이 바로 여기 집주인, 장의사 양반일세.”

그러면서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장의사 양반이 말이야,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염을 하려고 했단 말이야. 소독약을 내 발에 붓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내가 깨어나자 그, 흐흐, 장의사 표정을 자네가 봤어야 하는데 말이지. 분위기 장난 아니었다네.”




광대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꿈속에서는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굴에 피범벅이 된 시체들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죽여도 시체들은 다시 살아났다. 철퇴에 머리통이 깨지고 작살에 심장이 관통된 시체들은 다시 일어나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분전하던 한 사람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다가 허우적대며 잠에서 깨어났다

내 옆에는 아직도 그 광대 카르넷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자네에게 줄 것이 있어.”

그가 주섬주섬 자기 배낭에 있던 물건을 꺼내어 침대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꽤 많은 양의 편지와 문서들과 한 권의 책, 그리고 열다섯 개의 금화와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보석이 든 주머니가 있었다.

모두 우리의 절반이 죽었지만 원정 결과물일세. 보석과 금화는 거의 같은 가치이니 둘 중 자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게. 그리고……. 무엇보다 이 편지 말인데, 자네가 좀 읽어주었으면 하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니까 읽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편지는 문둥이 어윈이 자신의 가족이나 지역 친지에게 보내는 유언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가 다시 내게 설명했다.

장의사가 자네를 살짝 알아보더군. 이 지역 출신이라고 말이야. 자네 얼굴은 이미 못쓰게 되었지만 내 설명을 듣자 어렴풋이 알아채더라고. 그리고 어윈의 가족은 모두 죽었어. 내가 아는 한 어윈과 가까운 사람은 자네밖에 없으니, 상관없지 않은가. 한 번 찬찬히 읽어보게.”


말 많은 광대가 문 밖으로 나가자 한껏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쌓여있는 문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밤늦은 시각에서야 문서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피곤이 산처럼 밀려 왔으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직도 내 심장 옆에서 꿈틀대고 있는 녹색의 독극물이 주는 고통 때문도 아니고,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얼굴의 상처 때문만도 아니었다. 불쌍한 나의 아버지, 불쌍한 가족, 불쌍한 사람들, 그리고 불쌍한 카르넷…….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어렴풋하게 태양 빛이 창밖으로 올라올 때 쯤, 카르넷이 긴장한 표정으로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나는 조용히 문둥이의 필체가 담긴 편지들을 순서대로 그에게 보여 주었다. 광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편지에 의하면 광대와 문둥이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문둥이의 발작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광대의 노래가 반드시 필요했다. 두 형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름 없는 기사와 문둥이 는 지역 주민을 매수하여 카르넷을 죽기 직전까지 매질하도록 하였고, 마치 자신이 구해준 것처럼 위장했다. 광대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사람이 되자,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주민들이 이 사실을 퍼뜨릴까 염려되어 모조리 도륙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조용히 편지를 끝까지 읽은 카르넷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내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 진정으로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것과 진실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해.

나는 별 것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문을 반 쯤 열고 나가면서 그는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여기서 장의사 일을 도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자신을 찾으려면 수도원으로 오라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입술이 잠시 씰룩거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마도 그는 문 밖에서, 소리 내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닫고서는, 울고 있을 것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을 위해 살았다. 생명의 은인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그 문둥이는 철저히 이용해 왔었다.

 

그리고 나의 가족 - 아버지, 어머니 과 이웃들. 이제 그 때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영주가 죽은 자신의 부인을 살리겠다고 부활의 주문을 사용한 순간, 우리 마을에는 저주가 내렸다. 어떤 사람은 쓰고 있는 갑옷을 평생 벗을 수 없어 갑옷 안에서 살이 썩어가는 상태로, 어떤 사람은 문둥병 환자가 되어 밤마다 두통에 시달리는 저주를, 어떤 사람은 보름달이 뜨면 괴물로 변하고, 어떤 소녀는 기억과 목소리를 잃게 되며, 어떤 여인 나의 어머니는 - 살아서는 자식을 안아 볼 수 없는 저주를, 그리고 어떤 남자 나의 아버지 - 는 평생 의혹의 씨앗을 마음에 품고 살게 되고, 그리고 어떤 아이는 아비의 원수와 똑같이 생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는 저주를…….


오랜 전 내 부모님은 이 지역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금실 좋은 부부였다. 새로 부임한 영주가 자신의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서 활기차고 부유한 곳이었다. 탐욕스러운 영주가 자신의 카르마에 의해 부인을 잃고 나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동굴을 파기 시작했다.

마녀의 저주가 터졌을 때, 만삭의 몸으로 그 현장에 끌려간 어머니만이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나를 낳은 후 어머니가 사망하자, 주변에서는 난리 통에 살아남았던 어머니가 저주의 원흉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나와 함께 몰래 이 마을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전혀 아버지를 닮지 않자, 그의 마음에 심어진 의혹의 씨앗이 싹을 틔우면서 그를 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이 녀석은 내 아들이 아닐지도 몰라.’ 검은 의혹이 승리할 때면 아버지는 나를 모질게 매질했었다. 문둥이 같은 자식, 지어미를 잡아먹은 놈. 그리고 창녀의 자식이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그날, 비바람이 치던 날, 높은 보수를 받아 신나하던 날, 내 아버지는 자신의 심장에 푸른 단도를 꼽고선 나를 끌어안으며 울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사과라고 하면서 그는 울고 있었다.


창밖으로 완전히 해가 뜨자 밖으로 나가고 싶어져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느껴진다. 내 안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저 동굴의 썩은 공기를 몰아내고자 크게 심호흡을 하고 오른 쪽 손에 목발을 짚고서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갔다. 집 앞 개울에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붕대로 감긴 얼굴은 사람의 형상으로서 갖춰야 할 살가죽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이젠 상관없다라고 작게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아니 내게 내려진 저주가 이제야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온 몸이 망가져 정상적인 삶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아직, 나는 살아있다. 그렇게 한 번 더 목소리를 내어 말해 보았다.


내게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지 지금은 알 수가 없지만, 여기에 남아, 나는 장의사의 일을 돕기로 했다. 내게 떨림을 남겨준 여급 스베틀리나가 언젠가는 날 찾아올 지도 모르고,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든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여기서 빌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결심을 굳히듯 하늘에 떠 있는 해를 향해 한 번 더 입술을 움직여 말해 보았다.

나는 아직 살아있으며,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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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의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이 편지를 네게 쓴다. 어쩌면 이번이 내 마지막 여행일지도. 녹슨 갑옷 안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몸의 관절이 삐걱거리고 썩어가는 살 냄새가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내 후각기관을 통해 이제 죽음이, 영원한 휴식이 내게 닥쳐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형제여.

 그러나 슬퍼하지 말라. 우리의 임무, 아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냈다. 지금 나는 그 물건을 이 마차에 태워 영주의 땅으로 데리고 가고 있다. 그렇다. 저주를 풀 수 있는 세 가지 물건 중 아무도 찾지 못했던 영주의 피가 섞인 가족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붉은 촛불 아래서도 검푸른 빛을 뿜어내는 단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 영주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고자 마지막에 내게 전달하고자 했던 단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우리가 찾던, 우리에게 덧씌워진 이 망할 저주를 풀 마지막 퍼즐 조각임이 틀림없다.

 아쉽게도, 이 젊은이를 포섭하기 위해 내가 가진 생명의 부름을 그에게 주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알아주게 - 어쩌면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네. 마녀 앞에서 그대로 그녀석의 심장을 조각내면 알아서 그 돌에 피가 스며들게 될 것이고, 네가 가진 부활의 두루마리에 그 루비를 박아 넣기만 하면 나머지는 마녀가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기 때문이지.

 형제여.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비록 너의 피부가 뭉개지고 물집이 터져 짓물러진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진다면, 우리 둘이 함께한 무수한 사냥과, 수천 개의 빛나는 별밤 아래서 보낸 우리의 시간들을 기억하거라. - 네가 끝까지 이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너를 다독여 줄 것이다.

 오래 전 마을에 내려진 저주를 풀 수 있는 것은 이제 우리뿐일지도 모른다. - 아니, 이 편지를 네가 보고 있다면 이미 나는 죽었을 것이므로, 이제 모든 일은 네게 달린 것이다. 부디 비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이 저주를 풀고, 대가도 없이 공짜 점심을 처먹고 있는 듯 희희덕거리고 있는 저 영주의 자식을 고통의 비명을 지르게 하며 우리의 원한을 풀어 달라, 형제여!

 이것이 네게 주는 마지막 임무이다. 부디 꼭 완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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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가 멈추질 않는다. 단도에 옆구리를 살짝 베인 것뿐인데, 한 방울씩 떨어지던 피가 이제는 꿀렁거리는 뱀의 혓바닥처럼 맥박 치듯 흘러내리고 있다. ,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게다. ‘비정의 형제도 여기서 끝이다. -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애송이 도굴꾼 자식 때문이다. 젠장, 젠장, 젠장!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나던 더러운 여관에서 그 애송이가 원정 제안서를 내밀었을 때, 나는 내 동료이자 친구인 문둥이 어윈이라고 내가 이름 지어준 에게 그 자식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난 그자식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랄까, 분명 행복한 감정에 젖어 있어서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눈빛이긴 한데 용병으로서의 날카로운 맛이 떨어졌다. 의례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용병이라면, 만취한 상태에서라도 상대방이 적의를 품으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초짜 용병은 내가 신발에 숨겨둔 작은 칼날을 그의 사타구니에 슬쩍 들이 밀었을 때에도 마냥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은 신호야.’ 내가 나지막이 어윈에게 속삭였을 때 의외로 문둥이 녀석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미 그 애송이 도굴꾼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 용병이 각자의 손목을 잡는 행위는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하며 서로 얼굴에 침을 뱉어 계약을 파기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내 파트너가 그런 애송이와 계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봐, 나는 빠질 거야.” 삐걱거리는 나무의자를 뒤로 물리면서 내가 말했다. “난 빼줘.”

 그때 어윈의 표정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오랫동안 동료로서, 내 뒤통수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전사로서,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그의 얼굴을 보아 왔지만, 그때 그 문둥이가 지은 표정은 살기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치 죽음의 신이 바로 코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한, 험악한 얼굴이었다. - 만일 내가 그때 여관을 나갔다면 즉시 내 머리통은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분명히.

 첫 원정은 의외로 순조롭게 끝났다. 내가 치료자로서 수녀원의 성녀를 동료로 데려 갈 것을 주장했지만, 끝내 이름 모를 역병의사가 마지막 원정자로 선정된 것은 탐탁지 않았는데 의외로, 첫 원정은 싱겁게 끝이 났다. 물론 문둥이 어윈이 돌리는 장검의 날에 버틸 도적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도굴꾼이 던진 단검이 착실하게 적의 약점을 파고들긴 했지만, 나의 신들린 듯한 만돌린연주솜씨가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 정신이 붕괴되어 저 깊은 동굴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한낱 괴물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도 밝힌다- 사실 공짜 점심운운하며 애송이가 날 비난만하지 않았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문제는 두 번째 원정이 시작되고 나서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여관에서 사라진 여급의 이야기를 들은 그 애송이 도굴꾼이 이상증세를 보인 것이다. - 어쩌면 캠프파이어 중에 내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던진 농담이 그를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원정만 끝내면 넌 전설로 남을 거야. 마녀를 작은 단도 하나로 끝장낸 용사라고 말이야. 그리고 여자들, 네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귀족의 딸들도 여관의 창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 - 속옷도 입지 않고 바로 널 보러 뛰쳐나온다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그 애송이의 얼굴을 당신이 봤어야 하는데. 세상에나. 그렇게 절망적인 눈을 하고 있는 표정을 난 본적이 없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가? 나는 그냥 용병들이 쓰는 일반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을 뿐이다.

 결국, 마녀와의 전투는, 예상했었지만, 최악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후방에 있어야할 역병의사가 먼저 앞장서더니 마녀의 끓는 항아리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고 우리 세 명이서 마녀의 역겨운 공격을 버텨야만 했다. 마녀가 누군가의 눈알처럼 보이는 미끈거리는 구슬과 창자를 던지기 시작하자 문둥이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내 뒤로 숨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애송이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살기 가득한 눈으로 휘두르는 애송이의 단도가 내 옆구리에 파고들었고, 그것을 본 문둥이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미안, 어윈. 아마도 내가 최후의 일격을 내 파트너에게 날린 것 같다. 난 단지 애송이를 없앨 생각뿐이었는데…….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원정은 실패했고, 나 혼자 살아남아 죽을힘을 다해 이 동굴을 빠져나가고 있다. 내 평생 유일한 친구이자 과거 내 목숨을 살려준 파트너 어윈을 잃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이 어두운 동굴을 홀로 빠져나가고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애송이 도굴꾼이다. 그놈만 없었더라면, 우리 비정의 형제- 물론 자잘한 복수를 의뢰받는 일 뿐이었겠지만 - 계속 잘 나갔을 것이다. 의뢰를 해결하고 그 보수를 받으면 술집에서 어윈은 노란 색 맥주를 들이키고, 나는 그를 위해 신나는 곡을 연주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 애송이만 없었더라면.......

 내 뒤로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끓는 솥 안에서 허우적대던 역병의사의 목소리인지 그 애송이가 지르는 비명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내 뒤에 누가 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내 목숨이 중요하다. 어쨌든 난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

 붕대를 찾기 위해 배낭을 뒤지던 중, 금화 몇 개와 어윈의 필적이 담긴 편지 같은 두루마리를 찾았다. 문둥이가 언제? 왜 내게 이런 것을? 확인은 나중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걸아야 한다. 출구가 멀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더.

 그런데, 저 비명소리. 출구가 가까워지자 더 가까이 들리는 것 같다. 어찌 내가 다시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냥 기분 탓일까? 그럴 거야,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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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오늘 밤은 어려울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그믐은 그 오두막 얼굴에 곰보가 덕지덕지 붙은 주름투성이의 마녀가 사는 곳에 가는 날이지만 오늘은 추적거리며 내리는 이슬비에다가 바람도 많이 분다.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서 저 어두운 산길을 오르기에는 무리다.

 맥주가 가득 든 술잔을 테이블로 나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엉덩이 쪽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새로 도착한 용병들이 짓궂은 표정으로 – 모두 셋인데 하나는 등에 커다란 활을 달고 있지만 머리카락이 위쪽으로 한 움큼 빠져있는 반 대머리고, 하나는 완전히 술에 쩔어 누런 이빨만 보이는 냄새나는 주정뱅이고, 나머지 한 명은 그나마 반들반들하게 젊고 잘생긴 사내인데 옷 위로 도드라진 근육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사는 아닌 것 같다 -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나마 잘생긴 쪽을 향해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여관 주인이 내 옆에 서서는 슬쩍 물어 본다.

 “어떻게 할 거야? 오늘은 재들이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주인이 초조해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좀 있으면 그걸 줘야할 지도 몰라.”

 나도 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불해야 할 것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하루를 버텨가고 있던, 도시에 사는 검은 쥐새끼와 같은 처지였다. 그런 나를 이 여관주인이 발견하고는 내게 잠잘 곳과 진짜 먹을 것을 주었다. 처음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지었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한데, 마치 귀한 보석을 방금 캐 낸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고 있었다.

 “이건 정말 행운이야. 신이 내게 주신 기회라고!”

 처음에는 그의 말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이내 영주의 집에 보내지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기운을 차리고 몸에 살이 붙기 시작한 지 두 달 후에, 주인은 나를 불러서는 내가 영주의 집에 가야하며 그곳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와야 한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집에 있는 책 한 권만 가져오면 된다고. 흔한 책 한 권이라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지. 집에서 나올 때 그것만 가져다주게.”

 그러면서 전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는 한 마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네게도 기회야. 영주는 쭈그렁 주름투성이의 영감이지만 지역의 제일가는 부자라고. 네게도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거야.”

 영주의 집에 도착하자 그가 여관 주인과 똑같은 환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를 반겼다 부활이라고, 신의 기적이 틀림없다고.......

 아, 내 평생 그곳에서의 생활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귀한 음식들, 밤이면 끝없는 육체의 향연이 펼쳐지고, 곱게 갈아 만든 암송아지의 뼈 조각이 들어간 붉은 음료는 그 즐거움을 배가 해 주었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공짜 점심은 그렇게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는다. 곧 내 결점을 보게 된 영주는 즉시 나를 집 밖으로 내쫓고야 말았다.

 여관에 돌아오자 주인은 즉시 그가 응당 받아야 할 것을 요구했으나 나는 그곳에서의 달콤한 생활에 빠져있어서, 그가 원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탄식과 비난에 젖은 그의 분노를 온전히 몇 시간 동안 감내한 후에야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손에서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오두막 마녀를 찾아가. 그리고 마녀가 시키는 대로 해.”

 이후, 매번 그믐이 찾아오면, 나는 마녀를 만나 작은 물병에 그녀가 주는 물을 받아 온다. 그리고 내가 뭔가 요구할 것이 있는 상대가 나타나면 나는 그 물을 마신다. - 그러면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 목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상대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주방 한 구석에서 손으로 턱을 괴고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고 있을 때, 오늘 아침에 새로 도착한 신입 용병이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아침에 오는 길목에서 도적과 한바탕 일이 있어서 동료가 죽었다고 했던가. 허름한 옷에 왼쪽 혁대에 작은 단검만 차고 걷는 모습을 보니 수중에 금화 따위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의자에 앉는 순간, 나는 봤다.

 뱀의 눈처럼 생긴 검고 붉은 루비 - 생명의 부름이라고 불리는 귀한 보석이다! 마녀가 찾고 있던, 그것만 준다면 자신이 가진 어떠한 능력이라도 주겠다고 했던 귀중품이다! 저것만 있으면.......

 침착하자. 가슴속에 숨겨둔 비약이 남아 있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 그래, 있다! 한 모금 정도 남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절대 약병을 완전히 비우지 말라는 마녀의 경고 따위는 무시하자. 저 보석만 있으면 이런 미약은 평생 쓸 만큼 많이 만들 수 있다.

 약병을 모두 비우고 그에게 다가가자 즉시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동공이 커지면서 놀라는 모습이다. 잠시 윗입술을 핥더니 일어서서 내게 다가온다. 여관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가 은화 한 닢을 들이민다. 뭘 원하는가 싶었는데, 가슴이 살짝 답답한 기분이 든다. 앞섶의 끈을 풀었더니 그가 내 가슴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인다. - , 그렇군. 은화 한 닢 따위에 이런 일은 하지 않지만 뭐 보석정도라면……. 이봐, 뜨내기 용병 양반, 너의 보석은 이미 내 주머니에 있다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두고 나는 조심스럽게 바로 여관을 빠져 나온다. 주인이 나의 부재를 조만간 눈치 채겠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다. 미혹의 술잔만 있으면 나는 다시 영주의 집으로 갈 수 있다. 거기서 평생 가짜가 아닌 진짜 안주인으로 살 수 있다. 미약을 사용하며 영주를 평생 내 남편이자 하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마녀를 만나야 한다. 비와 바람이 섞인 날씨 탓인지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왔던 길을 틀릴 리가 없다. , 저 멀리 오두막의 불빛이 보인다. 조금이다 조금만 더.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할 때 비에 젖은 돌계단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두막 안에서, 마치 보고 있다는 듯 마녀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관을 나설 때부터 왜 엉덩이 꼬리뼈 쪽이 가려운걸까 - 그곳에서 뭔가 꿈틀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불빛 탓인지 자꾸만 다리가 겹쳐 보인다. 마치 네 개의 다리가 달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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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의 기회가 있는 거야. 두 번도 아니고 딱 세 번."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않아 검고 누런 냄새가 나는 딱지가 들러붙은 맥주잔을 흔들면서 그 사람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 번 이거든. 여기 이 땅을 - 저주 받을, 툇 – 물려받은 어린 도련님도, 남은 술을 몰래 섞어 파는 저 더러운 술집 주인도, 너 같은 창녀의 자식도 모두 똑 같은 기회가 있는 거야. “ 마지막 말을 하며 그가 히죽대며 웃었다.

 영주의 심부름을 위해 언덕 위의 오두막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들어 온 술집에서, 그 사내는 짐짓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인들을 매섭게 매질하고 높은 이자로 금화를 빌려주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남의 땅을 뺏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가 무슨 일인지 그에게 꽤나 좋은 보수를 내걸고 단순한, 정말 단순한 심부름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가 오면 알려 준다고, 저 높은 곳에서 기분 나쁘게 내려다보면서 그 염병할 신이라는 작자가 말이지.“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남자는 작은 술집에서 몇 명의 여자를 데리고 영업을 하던 포주였다.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질 좋은 럼주를 만들어 그 동네에서는 한동안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내가 태어났고, 이후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몸을 팔던 여자 한 명이 병에 걸렸는데, 그게 도시 내에 퍼져 살던 지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멀리 여기까지 도망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일 이후부터 나는 재수 없는 아이가 되었고 그에게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면 늘 매질을 당하곤 했다. 

 재수 없는 놈, 지어미를 잡아먹은 놈.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나를 집 밖으로 아주 쫓아버리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를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를 싫어했는데……. 


 어쨌든 그 사람이 말했던 세 번의 기회가 내게도 찾아 왔다 - 첫 번째 행운은 그것을 정말 운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알쏭달쏭하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 아마 이것이 하늘이 내게 준 또 하나의 기회일 것이다.

 용병에 참가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음을 밝힌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짝을 이루어 의뢰를 해결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것인가? 내가 자고 있을 때 슬금 다가와 철퇴로 내 두개골을 쪼개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혹은 전장에서 한창 단검을 날리고 있는 와중에 내 뒤통수에 화실을 쏘지 말란 법이라도 있던가? 더욱이 보수를 두둑이 받아 주머니에 금화가 가득 있는 상황이나 혹은 남은 머릿수 비율로 임금을 지불하는 용병 단에 속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내가 지켜온 철칙을 깨기로 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임무다 – 그리고 그만큼 보수도 크다. 


 영주가 용병 단을 모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금세 마을에 알려졌고, 여기저기 힘깨나 쓴다는 풋내기 기사부터 오랫동안 용병생활에 잔뼈가 굵은 나이든 용사들까지 모두 여기에 동참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돈 많은 영주가 쓸 만한 용병을 구하기 위해 깨작거리는 가짜 이야기야 흔하고, 나로서는 그것보다 새로 발굴된 거대무덤 쪽에 마음이 동했지만, 내게 동참을 제안한 그 기사는 이미 한 번 그곳을 가본 적이 있는 경험자였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그 보석들....... 한 번 보기만 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가치는 기껏 금화 몇 닢에 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덤의 부장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영주의 저택으로 가는 길에 마차가 전복되었고 – 아마 산적들이 함정을 설치했을 것이다. 영주로 가기 위해서는 외길밖에 없으니까 - 같이 온 용병은 전복 시 입은 부상과 도적들이 던진 독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내가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우리들 세계에선 누가 죽든 남은 사람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 단 하나, 편지만 빼고.


 술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같이 동참할 용병들을 살펴본다. 다들 긴장감을 애써 없애기 위해 술잔을 들고 크게 웃으며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있지만, 진정한 프로는 혼자 조용히 마시며 관찰한다. 믿을만한 실력 있는 동료를 찾는 것, 그것이 전장에서 살아남는데 가장 중요하므로.


 술집 여급이 나를 보고 웃는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아리다. 지금껏 용병생활에서 많은 여자를 만나보았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아버지의 일 이후로 가정이나 아이는 갖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스베틀리나, 예쁜 이름이다. 은화 한 닢을 주고 가슴을 만져 보았다. 나쁘지 않다. 아이를 여럿 키울 수도 있겠다. 같이 살 수 있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 여관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주인에게서 여관을 인수하여 안주인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곳을 운영하며 이 여자와 같이 살 수도 있다 – 여긴 늘 사람들이 죽고 그만큼 새로 오는 곳이니 장사는 잘 될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 어두운 던전을 몇 번이고 갔다 와야 한다. 누구도 가지 못했던, 그믐보다도 더 어둡고 어두운 곳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생물과 마주쳐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약간의 보석과 신비한 주문이 적혀 있는 책 한권만 훔쳐가려고 했었다 – 오래 있다가는 나도 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처럼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스베틀리나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저 여자와 같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몇 번이나 목숨을 담보로 괴물과 마주치더라도 그녀와 같이 살 수만 있다면 해 볼만하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래, 내일이라도 당장 용병을 고용하며 저 동굴에 들어갈 것이다. 진귀한 루비와 다이아몬드를 구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지도 모른다. - 세상에 공짜로 점심을 주는 곳은 없으니까


 그러나 스베틀리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겠다. 그것이 내가 오늘 이 여관에서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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